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23화 (323/956)

적자생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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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에 앉은 상대에게서 거북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런 대화를 예상치 못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혹은 주제가 거슬렸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왕에 꺼낸 말을 물릴 수는 없었고, 보다 확실하게 자기 뜻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좀 더 선명한 주장과 근거가 필요했다.

“우주가 생성된 원리, 인간의 시초에 대한 과학적 설명 등은 모두 아직까지는 이론에 불과할 뿐,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의 호기심과 합리적 이성은 설명을 요구했고, 과학자들은 가장 이성적인 방식과 합리적 수단을 이용하여 호기심을 충족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상대는 여전히 왜 이 대화가 이렇게까지 진행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상대에게 뱉는 선언이자,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사람들의 호기심과 합리적 이성이라는 두 요소가 재미있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 철학적 사고의 근원이라는 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 전반, 일상생활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죠. 가령, 왜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하는가? 라는 철학적 물음이 있다고 할 때, 분명 여기에는 ‘왜’라는 물음에 대한 호기심과 그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 대한 합리적 검토 절차가 뒤따르죠. 그런데 조금 변형시켜서, 왜 저 사람은 돈을 벌려고 하는 걸까, 라는 물음이 있다고 해봐요. 같은 의미로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끼고, 그 호기심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해석되기를 기대합니다.”

****

“장 태호, 어딨어!”

문이 벌컥 열리며 박 이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직원들 중 몇몇은 그대로 고개를 든 채 얼어붙었고, 또 몇몇은 벌떡 일어나서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장 태호!”

박 이사의 외침에 사람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답을 찾아보았지만, 누구 하나 답을 내놓는 이가 없었다. 만약 이곳이 회사가 아닌 다른 장소였다면, 그렇게 수군대는 와중에 제풀에 지친 박 이사가 다른 곳으로 답을 찾으러 떠나는 장면을 그려볼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이곳은 회사였다. 불행히도 회사에는 직급이 있고, 불행히도 박 이사는 직급이 높은 사람이었다. 또 불행히도 이 자리에 있는 사원들 간에도 직급이 있는데, 박 이사의 호령에 답을 해야 하는 사람의 직급 역시 정해져 있었다.

해당 직급의 남자, 강 부장이 얼른 파티션 밖으로 튀어나와 박 이사의 물음에 답했다.

“여기 없는 것 같은데요.”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정답이 아니면, 궁색하지라도 말았어야 했는데, ‘같은데요’라는 식의 종결어미는 박 이사의 화를 돋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같은데요?”

“어, 없습니다.”

“이 양반이··· 점심 먹으니까 배부르고 등 따시지? 그래서 정신 못 차리고 아주 꿈속을 헤매지?”

졸지 않았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럴 때는 입 다물고 그저 ‘죄송합니다’를 말해야 했다. 그게 ‘상식’이니까.

“장 태호 어디 갔어?”

‘어딨어’라는 질문이 ‘어디 갔어’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분명 눈앞의 사자는 ‘모릅니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걸 거야. 모릅니다, 라고 답변하는 순간 잘 됐다, 는 마음으로 눈을 빛내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목을 물어뜯을 테지. 따뜻한 피와 연한 육질이 잘근잘근 씹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야 오늘 하루 일했다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퇴근할 테지. 그런 사람이지, 박 이사는.

하지만 강 부장도 바보는 아니었고, 모릅니다, 라는 말로 상황을 대처할 생각은 없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대답 대신 얼른 부하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니, 빨리 답 안 찾으면 죽여버린다, 는 눈빛으로 오른쪽에 있던 대리를 노려보았다. 다른 누구보다 눈치 빠른 한 대리라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아, 지금 가디스R이랑 스케줄 마치고 오는 중일 겁니다.”

강 부장은 한 번 더 눈을 부라렸다.

“지금 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서 태호에게 연락하는 한 대리의 태도에 강 부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새끼, 일 하나 똑바로 처리 못 하고 말이야. 굳이 자기가 간다고 자청해서 보냈더니 이게 뭐야!”

화를 내고는 있지만, 분명히 그 방향은 강 부장을 비껴간 듯 보였다. 박 이사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뒤끝이 없나 하면, 자신이 방금 강 부장을 물어뜯으려 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뒤끝이 없었다.

“강 부장, 장 매니저 오면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박 이사는 머리를 조아리는 강 부장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폭풍이 휩쓸고 간 탓에 강 부장뿐만 아니라 모두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깊은숨을 토해냈다.

“아니, 지금 일 잘하는 태호 씨는 왜 못 잡아먹어서 저런대?”

“왜 그거 있잖아요? 리모트 부른 남자애. 걔 때문인가 봐.”

“걔? 아, 설마 계약한다는 거? 고작 그거 때문에 저 난리야?”

“쉿. 단어는 가려 쓰자고.”

하지만 사원들이 모르는 윗분들만의 사정이 있는 법. 박 이사가 단순히 단유의 재능만을 가지고 계약하려는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순진한 장태호나 할 법한 것이었다.

“예, 회장님. 태호 오면 단도리 쳐서 진행 시켜 보겠습니다. 아, 그럼요. 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도,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미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유를 풀어쓰면 간단한 것이었다.

단유의 후원자, 연성 그룹으로부터 적당한 투자금을 지원받아 상장사로 발돋움한다.

물론 단유의 후원자가 연성 그룹에서 내쳐진 것으로 알려진 막내 손자라는 점은 계산이 복잡해지는 변수가 되지만, 그래도 이 점은 천천히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라는 게 윗분들의 생각이었고, 박 이사의 아이디어였다.

“한때 찌라시에서 암암리에 돌던 소문은, 100%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연성 그룹의 영향력이 전무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즉, 김단유와 연재훈, 그리고 연 회장님에게로 이어지는 커넥션은 분명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성질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박 이사는 자신 있게 프리젠테이션 했었다.

“그 후, 빠른 시일 내에 그 아이를 데뷔시키고 저희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성공시킵니다. 다행히 그 아이도 재능 면에서는 충분히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검증받았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후, 본격적으로 투자지원을 받으며 규모를 확장, 최대한 빠르게 자격 요건을 갖추어서 상장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회사가 작다고? 키우면 된다. 회사가 커지면? 사람들은 몰려들기 마련이다. 돈 더 준다는 곳으로 올 사람이 적을까? 아니. 이쪽 업계는 모름지기 돈이었다. 돈이 힘이고, 힘은 돈으로 드러난다. 돈이 돈을 부르니, 돈이 배우를 부르고, 가수를 부르고, 연예인들을 부른다. 돈이 구르고 돈이 불리고 돈이 커지니, 더 큰 스타들이 들어온다.

이미 많은 사례가 있고, 학술적으로도 검증된 방법이다.

“자본의 확충은 에이바운스의 성공과 직결됩니다.”

회장은 허락했고, 박 이사는 총대를 멨다. 그리고 잠시 화약을 태호에게 건넸더니 터뜨리라는 화약은 안 터뜨리고 구경만 하고 앉았으니, 박 이사의 심정이 오죽할까.

“부르셨습니까?”

어떤 서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책상만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 중이던 박 이사는 태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순간적으로 열이 오르며 가슴이 터질 듯 뛰는 기분이었다.

“장태호! 너!”

라고 부르며 벌떡 일어섰던 박 이사는 물에 젖은 화약처럼 목소리에 힘이 떨어지고 눈빛이 온순해지는 변화를 체험했다.

“···왔구나.”

태호의 뒤에, 이제는 태호의 어깨 위로 정수리가 솟을 만큼 키가 커진 단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

가디스R의 노래 ‘리모트’의 순위가 미친 듯이 상승했다. 더이상 방송 스케줄을 진행할 여력도 없고, 회사의 경비 제한과 아이들의 체력 저하가 눈에 보일 정도가 되니, 더 이상은 방송이 어렵다고 생각해 공식 활동 마감을 선언해야 했다. 이후에는 행사들만 따로 스케줄을 빼서 활동을 이어나가겠지만 말이다.

“진짜 우리 성공한 거 맞죠?”

“아니면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겠어? 무려 2주를 더 했다.”

“조금 전까지는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막상 끝난다니까 너무 아쉽네요.”

수련의 엄살에 나윤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역시 그렇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제 몸이 이렇게 약한 줄 처음 알았어요.”

평소 연습실에서 12시간, 혹은 15시간까지도 붙박이처럼 붙어서 지내기도 했던 나윤은 체력만큼은 다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데뷔 이후 첫 활동은―물론 신이 나서 카메라 앞에 서면 헤죽거리며 웃었지만―하루 2시간도 채 잠들기 힘들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을 진행하다 보니 강철 체력은커녕, 수수깡 같은 체력으로 픽픽 쓰러지는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아냐, 잘했어. 데뷔라 긴장도 많이 했을 텐데도 너무 의연하게 잘 버텨서 오히려 고마울 정돈데?”

“에이, 언니는. 전 오히려 언니 덕분에 버텼다고요. 진짜 언니 체력이 강철이네요. 어떻게 한 번도 피곤한 내색을 안 보인대요?”

“넌 눈 밑의 이 시커먼 게 안 보이니? 나도 아주 죽을 맛이다.”

말이 나온 김에 피로 좀 풀어야겠다며, 옆자리에 두었던 찜질용 가리개를 눈 위에 덮는 수련이었다.

“둘 다 아주 수고했다. 일단 다음 행사 스케줄까지는 레슨도 빼줄 테니까 좀 쉬도록 해.”

“행사가 언제 또 있어요?”

“내일.”

“에이, 그럼 쉬는 게 아니잖아요?”

“레슨만 빼도 니들 10시간 이상은 잘 수 있다. 지금부터 숙소 들어가서 잠만 자. 푹 자고 내일 오전 10시에 데리러 갈 테니까, 그때까지 쉬면 되겠네. 아니면 그냥 행사 캔슬할까?”

“아뇨, 괜찮아요. 당연히 행사 가야죠.”

나윤의 말에 수련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입꼬리가 슬슬 내려오는 것이, 졸음이 밀려오는 탓이리라. 태호는 살짝 목소리를 낮춰서 나윤에게도 말했다.

“일단 너도 좀 쉬고 있어. 렌즈는 집에 가서 빼. 지금 여기서 빼면 눈 다칠 수 있으니까. 수련이처럼 찜질이라도 하든가.”

알겠다며 나윤 역시 찜질용 가리개로 눈을 덮은 뒤, 입술을 다물었다. 태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차들도 많이 막히지 않아 숙소까지는 30분 내로 도착할 것 같았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회사에서 온 전화에 태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박 이사가 ‘행차’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뭐 때문인지 감이 왔다. 시계를 보니 이제 오후 7시. 조금 서두르면 늦지 않게 회사에 도착하리라.

‘그 전에.’

태호는 한숨을 내쉬고 연락처에서 ‘김단유’를 검색했다.

****

식사를 끝내고 방에 들어와 책을 보려 했던 단유는 익숙한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지?

“저희 본 지 한 달도 안 된 거 아닌가요?”

―이틀을 못 봐도 잘 지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런 이유라면, 잘 지냈어요. 스케줄 끝나신 건가요?”

―어. 이제 공식 활동 마감이다.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아, 수련 누나는 어때요? 지난번에 전화 통화할 때는 힘들다고 우는소리를 하시던데?”

―걔가 우는소리를 해? 하여튼 걔도 별나다.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왜 니 앞에서 그런데?

단유는 핸드폰 너머에서 ‘내가 뭘요!’라고 외치는 수련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대꾸한 태호는 다시 단유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지금 시간 되니?

“예, 괜찮아요.”

―그럼, 집 앞에서 잠깐 볼까?

“안에 들어오지 않으시고요?”

―음, 뭐, 그럴까?

비밀리에 진행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듣는 자리에서 편하게 할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태호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보호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니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도착해서 다시 전화할게.

“네. 아, 수련 누나랑 나윤 누나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단유는 핸드폰을 끄고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 핸드폰을 검색해서 음원 사이트의 창을 열었다. 그리고 검지를 위로 밀어 올리며 화면을 살펴보았다.

「21위 ? 가디스R 『리모트』」

누군가에게는 어중간한 순위일지 모르지만, 당사자나 관계자들에게는 어느 때보다 높은 순위였고, 성공의 샴페인을 터뜨려도 무방할 성적이었다.

단유는 곰곰이 생각하다 검색창에 ‘갤럭시즈’를 쳐 보았다. 화면을 훑어보던 단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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