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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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 적자생존이란 말이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이고,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표현으로 쓸 때도 있다. 요지는 하나다. 강해져라.
“사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배웠고, 따로 책을 통해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많은 사람이 진화론에 동조하고 진화론적 세계관, 진화론적 가치관에 공감을 표하더군요.”
테이블 위에 올려진 투명한 유리잔, 그 안에 담긴 불그스름한 홍차에서 풍겨 나오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제 성격 때문인지, 진화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고요. 물론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론은 현대 과학 전반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패러다임이기도 하지요. 그걸 부정하는 건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사안에 대해 진화론적 설명을 가져다 붙이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것들에 대한 반감(反感)에 대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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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벌었어?”
명수가 단유에게 공을 넘기며 물었다. 단유는 오른발을 살짝 들어 날아오는 공의 힘을 줄여 발 앞에 떨어뜨렸다. 발바닥으로 공을 굴려 차기 좋은 위치에 놓은 뒤, 한쪽 발을 뒤로 뺐다가 공의 아랫부분을 가볍게 차올렸다.
“아직 정산 안 됐대. 그리고 정산해도 얼마 안 될 거라는데?”
“그래도 많이 들어오지 않을까? 연예인들 돈 잘 번다면서?”
“그런 식이라면 갤럭시즈 누나들은 벌써 부자였어야지.”
“그 누나들은 좀 다르지. 노래가 망했잖아. 니 노래는 좋다는 사람도 많고. 많이 팔리지 않았을까?”
명수가 찬 공은 정확하게 단유의 무릎을 향해 날아왔고, 단유는 가볍게 발을 들어 받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점점 킥의 정확도와 힘의 분배가 좋아져서, 이제는 확실히 일반인 수준은 뛰어넘었다. 조만간 명수가 대회에 나갔을 때 펼칠 활약이 기대되었다.
“석 달 뒤에 정산이 된다는데, 그때는 2학년 시작하고 나서야. 그러니까 느긋하게 기다려야지.”
“돈 들어오면 뭐 살 거야? 책?”
“사긴 뭘 사. 쓸데도 없는데 일단 모아놔야지. 왜, 선물이라도 사다 달라고?”
“사주면 좋지. 신발도 좋고. 이 신발도 좋긴 한데, 조금 조이는 느낌이랄까?”
하긴 명수도 계속 성장 중이고 그러다 보니 발도 커질 게 분명했다. ‘조금 조인다’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아마 무리해서 신고 다니는 걸지도 모른다. 단유 본인이 그렇게 신고 다니는 것처럼.
단유는 이번에는 살짝 힘을 줘서 높이 차올렸다. 명수는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더니 가슴으로 공을 받아 바로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해 볼까?”
“아르바이트?”
“우리 옛날에 그런 이야기 했었잖아. 웬만한 건 손 벌리지 말고 우리가 돈 벌어서 사자고.”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의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했었고,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생은 하지 못하는 ‘어른스러운’ 일들도 곧잘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다른 이들에게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여전히 어른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철부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뭐가 있을까?”
“전단지 알바, 식당 서빙, 연회 준비···.”
“벌써 알아봤구나?”
명수는 공을 발등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균형을 잡아나갔다. 원래 신발에 붙어있는 옵션인 것마냥 찰싹 붙어서 흔들릴 생각도 하지 않는 공이었다.
“알아보기는 했는데, 거의 대부분 고등학생부터더라. 중학생 받아주는 곳이 없어.”
신문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도 중학생은 받지 않는다는 명수의 말이었다. 고객 응대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성인에 비해 체력이 부족해서 효율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라도 댔다면 이해를 할 텐데, ‘중졸 이상이 아니면 안 돼’라는 말로 딱 잘라 거절하더라는 이야기에 단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음원인가 그거, 되게 좋은 거 같아.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를 떠나서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거잖아.”
축구는 암만 잘해봐야 돈이 안 된다. 향후 실업팀을 가거나, 프로팀으로 가게 되면 모를까, 지금은 그저 돈 먹는 하마처럼 우걱우걱 처먹기만 할 뿐이니 명수의 부담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아, 배고파. 집에 가자.”
명수는 공을 높게 띄었다가 두 손으로 낚아챈 뒤 옆구리에 공을 꼈다. 단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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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무슨 일 있니?”
점심을 같이하는 동안 아이들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다는 생각에 하은이 물었다.
“아뇨, 아무 일 없는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우울해 보여? 잘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선생님한테 물어보라고 했잖아? 뭐든 말해 봐. 선생님이 다 해줄 수 있다고 약속은 못 해도, 들어는 줄 테니까. 들어보고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좋지 않니?”
명수는 젓가락 끝을 입에 잠깐 물었다가, 김치 위로 가져갔다.
“김치가 너무 시어서 그래요.”
“명수 넌, 그래서 안 돼.”
하은의 눈썹이 살짝 튕기듯 올라간다 싶더니 명수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 거짓말 되게 못하는 거 알지? 얼굴에는 고민 있어요, 라는 표정인데 고작 김치 시어서 못 먹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으면 내가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것 같았어? 내가 널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설마 2년 동안 보지 못했다고 네 생각을 못 알아볼 것 같니? 아마 10년이 지나도 명수 니 속은 내가 훤히···.”
“다른 게 아니고요.”
단유가 하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운동장에서 둘이 나눴던 대화의 요점만을 골라 이야기했다.
“중학생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 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고민이네요.”
“뭐야. 고작 그런 거로? 그리고 니들이 아직 애지, 뭐니?”
“네. 그래서 빨리 크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런 거였어요.”
단유는 차마 하은에게 돈 때문에 고민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은은 단유를 흘깃 바라보다가, 명수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그래? 어른이 되고 싶어?”
“···네.”
하은은 씩 웃음을 지었다.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싶은데?”
“어른이 되면, 지금 못 하는 것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지금 못 하는 게 뭔데?”
단유는 하은의 속을 읽었다. 단유는 코를 찡그려 명수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다. 명수가 그 신호를 알아차리길 바라며. 그런데 그 신호는 하은에게 먼저 발각되었다.
“코 간지러워? 여기 휴지. 저기 가서 코 풀고 와.”
“···괜찮아요.”
“식탁에서 실수할 수 있으니까, 가서 풀고 오지 그래?”
“진짜, 괜찮아요.”
하은은 다시 명수에게로 고개를 돌려 답을 요구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어른이 되면 가고 싶은데도 갈 수 있고···.”
“선생님은 터키에 가고 싶지만 못 가고 있는데?”
“왜요?”
“돈이나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기도 하고, 나라에서 여행 금지를 해서이기도 하고. 뭐 여러 가지 이유지. 가고 싶은데 다 가는 건 아니라는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리고?”
“그리고, 사고 싶은 것도 살 수 있고.”
“사고 싶은 게 있어도 못 사는 것도 많아.”
명수는 하은을 째려보면서, 입을 삐죽였다.
“자기가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고.”
“그건 지금도 니가 원하면 그렇게 해 줄 수 있고, 또 솔직히 니가 원할 때 먹고 있잖아? 어젯밤에도 몰래 나와서 냉장고에 있던 빵 꺼내 먹었던 것 같던데?”
“···그래도 제가 진짜 먹고 싶은 건 못 먹잖아요?”
“진짜 먹고 싶은 게 뭔데?”
“치킨이나 족발이나 피자나···.”
“피자 시켜줘?”
“네!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그래요. 그냥 어른이 되면 다 할 수 있는데 지금은 못 하잖아요.”
“흠.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그런데 만약에 니가 돈이 많으면 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들 아냐?”
“그러니까요. 돈만 있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사고 싶은 신발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옷도 살 수 있고 그렇잖아요.”
“아하, 그러니까 요지는 지금 사고 싶은 신발이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 사고 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하은은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코가 많이 간지러우신 단유 씨?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 딱히···.”
“단유야. 이런 거로 눈치 보지 말자? 응?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니들이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그런 걸 왜 눈치 보면서 말을 하니? 괜히 사람 미안하게.”
하은은 숟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만약 지금 무언가를 받아서 쓰는 게 부담스럽다면, 나중에 어른이 돼서 갚으면 되잖니? 꼭 돈으로 갚지 않더라도, 니들이 성공해서 그 성공의 명예를 돌려주는 식으로 말이야. 대부분의 가족들이 그렇게 하듯이. 우리도 가족이야. 지금처럼 눈치 보고 어려워 하는 모습이 보이면 선생님은 물론이고, 주영이나 재훈이 오빠나 너희한테 미안해진단 말이야.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은 아르바이트 같은 거로 돈 벌어서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사잖아요?”
“명수야,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 아까 니들이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고 했었나? 그건 니들이 아직은 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야. 너무 조바심 내지 마.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방금 니가 말한 것들 다 할 수 있어.”
단유는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그동안 정리했던 생각을 펼쳐 보이기로 했다. 하은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으니, 한번은 꺼내놓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저나 명수나, 되도록 저희 힘으로 살아보자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초등학교 졸업식 때요.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축구 클럽이나 영재교육원 입학 같은 것도 하지 않았던 거고요. 재훈 형이나 주영 누나, 선생님께 미안한 생각 들게 하려는 게 아니고, 단지 저희들이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그때 우리끼리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하려 했던 거예요.”
“왜?”
“···운 좋은 고아, 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요.”
명수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하은이 명수를 빤히 바라볼 때, 단유가 설명을 덧붙였다.
“돈 많은 후원자 만나서 철부지처럼 막산다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였고요, 우리랑 다르게 여전히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을 사람들 때문에도 그랬어요. 비록 우리가 운이 좋아서 이렇게 생활하지만, 떳떳하게 살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었거든요.”
하은은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떳떳해지고 싶다’라는 마음 때문에 평소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해 왔던 것일까?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이유가, 해진 옷을 입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던 이유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더 열심히 뛰겠다고 웃던 모습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우린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한테 기대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야 몸과 마음이 모두 강해질 거로 생각했어요.”
명수는 숟가락으로 밥을 헤집으며 고백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든 아이들, 하지만 아직은 그 순수함이 가시지 않아 조금은 어리숙하기도 한 아이들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이들을 그렇게 바라봤던 건, 그저 자신의 편견으로 바라본 아이들의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하은은 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겠노라고 했다는 아이들의 말에는 강직함이 느껴지는데, 자신의 경우에는 그런 강직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타협과 이기적인 목적 추구.’
하은이 생각한 어른의 구성요건이었다.
하은은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대한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겠노라는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그와 동시에 ‘어른’으로서 하은은 두 아이에게 제안했다.
“일단 받아라. 물질적 풍요는 아니더라도, 기본은 지켜야 하지 않겠니?”
단유와 명수는 식사 후 하은의 손에 끌려가 ‘억지로’ 신발 두 켤레를 품에 안고, 새 옷가지 몇 벌을 손에 든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명수의 볼이 씰룩거렸던 것을 본 하은이 명수의 머리를 몇 번이고 헝클어뜨리며 놀렸던 것은 보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