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20화 (320/956)

지금 이 순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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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응?”

태호는 수첩을 든 채로 있다가 수련의 부름에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뭐예요? 잤어요?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났어요?”

“아니, 왜?”

“계속 불러도 대답은 없고, 계속 딴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요.”

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 바로 뒤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던 태호가 수상했다. 하루 이틀 지낸 것도 아니니, 태호의 이상 행동은 곧바로 수련의 레이다에 걸렸다.

태호는 그런 수련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대답을 회피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현철아, 얼마나 남았냐?”

“10분이면 도착할 거 같은데요.”

태호는 수련의 옆자리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정신을 잃기를 반복하는 나윤을 깨웠다.

“나윤아, 이제 졸면 안 돼. 눈 떠. 도경아, 애들 의상 좀 체크해 봐.”

“아까 다 했거든요?”

“그래도 한 번 더 해.”

오빠나 정신 차려요, 라는 말을 도로 삼키며 태호의 굳은 얼굴을 보던 수련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물어봐야 대답은 해주지 않을 것으로 보였기에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수련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차량 전방을 주시하던 태호는 여전히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괴로웠다.

“찢어주세요.”

“희망이 없어요.”

결국, 위로도, 사과도, 아무것도 못 하고 연습실을 나왔던 그 날, 그 순간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태호를 괴롭혔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나올걸.’

후회해 봐야 시간을 되돌린 순 없었다. 태호는 머리를 흔들고 가디스R의 스케줄에 집중하기 위해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가디스R과 함께 움직이는 중이고, 자신은 프로이니까.

****

“가만 보면 있잖아? 명수보다 니가 더 많은 사고를 치는 것 같아.”

명수가 손뼉을 치며 드디어 세상 억울함을 다 풀었다는 얼굴로 하은의 말에 맞장구쳤다.

“와, 선생님! 그걸 이제 아셨어요? 전 별로 사고를 안 친다니까요?”

“니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지금 당장 니 방에 가봐. 도대체 잠만 자는 매트리스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찢어질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에이, 그건 매트리스가 저절로 그렇게 된 거라니까요?”

“의자는?”

“팔걸이가 불량인 거죠.”

“네 옷들 중에 성한 게 거의 없다는 것도 다 그런 이유야?”

“네. ···그리고 솔직히 큰 사고는 친 적 없잖아요?”

마치 바닥에 떨어진 떡을 집어 들고, 여기는 흙이 안 묻었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한 명수였다. 하은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이번에도 SNS 스타로 등극하신 기분이 어떠신가?”

“아무렇지 않은데요?”

말만 그런 게 아니라 표정도 담담하니 애써 말을 꺼낸 보람이 없었다.

“단유 너도 참 별나긴 별나.”

하은이 슬쩍 명수를 보자, 명수는 찔끔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전 그때 가자고 안 했어요. 지태가 가자고 꼬셔서 그렇지.”

명수는 자기도 노래방에서 등이 흠뻑 젖을 정도로 신나게 뛰면서 탬버린을 흔들어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됐다. 그리고 아까 주영이한테 전화 왔었는데, 너랑도 통화했니?”

“네.”

“뭐라든?”

“···노래 잘 들었다고.”

“칭찬 들었네?”

‘칭찬 들으니까 기분 좋아?’라고 비꼬는 말임을 모를 수 없었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조심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니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니까 하는 말이야. 다들 니 노래 좋다고 칭찬하는 글들인데 뭘 조심해. 다만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는 거지. 주영이는 또 다시 니 이름이 인터넷에 거론되니까 가슴이 두근거려서 힘들었다더라. 걔 심장 안 좋은 거 알지? 몰라? 걔가 예전에 말이야···.”

촬영한다는 것도 알았고,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알았지만, 그 영상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 특히 성근이 그렇게 영업(?)을 열심히 할 줄은 몰랐다.

하은이 화제를 넘나들면서 수다의 신기원을 기록하려 할 때, 명수가 슬쩍 말을 걸었다.

“밥 사준대.”

명수의 말에 하은이 눈을 찌그러뜨리며 명수를 보았다.

“그 아저씨, 아니 그 형이 그랬어요. 단유 노래방 영상으로 부가수입인가가 있다고. 되게 신기하지 않아요? 그런 거로 돈도 벌 수 있고.”

하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맑은 명수와 관심 없는 단유를 앞에 두고 혼자 열을 올려 봐야 무슨 소용일까. 차라리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는 호빵이랑 대화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단유의 노래방 영상은 처음에 성근의 SNS 페이지에 업로드되었다. 그리고 아케이드 게임 동호회 카페에도 동영상이 소개되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후 성근은 해당 영상을 대형 커뮤니티에도 올렸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점차 여러 커뮤니티로 동영상이 전파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고, 특히 노래방에서 핸드폰으로 찍은 조악한 화질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명하게 녹음된 단유의 목소리와 노래가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거 무슨 노래임?

―가디스R 신곡 ‘리모트’입니다.

―요즘 대세 노래인데 모르는 사람이 있네.

―대세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듯.

―두 개 다 들어본 입장에서 이 남자가 부른 노래가 훨씬 귀에 잘 들어박히는 느낌.

―에코가 많아서 그런 듯.

―전문가 나셨네.

―뮤직비디오는 애들 얼굴 보는 맛으로 보고, 노래는 이걸로 들어야겠다.

―취향 존중해드립니다.

이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가디스R의 뮤직비디오가 더 많은 조회수를 올릴 수 있게 되었고, 음원 성적도 소폭 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하여 어느새 20위권에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을 바로 캐치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알게 된 에이 바운스는 급히 회의를 열었다. 박 이사가 주도한 이 회의는 박 이사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곧 단유에게도 이 회의의 결과가 통보되었다.

“녹음이요?”

“회사 공식 계정으로 니 녹음본 영상을 올리자는 의견이 나왔어. 회사에서 제공하는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노래를 불러, 깨끗하게 녹음된 노래를 영상과 함께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면, 일거양득이라는 거지.”

태호는 하은이 준 음료수를 받아들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바쁜 와중에도 단유의 일로 회사가 좋은 의미에서 뒤집혔다는 소리를 듣고 자청해서 단유에게로 달려온 태호는 이번 기회에 계약까지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꺼냈다.

“계약은 좀.”

여전히 단유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은과도 잠시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었는데, 역시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을 쉽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매니저님.”

단유가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하은이 끼어들었다.

“단유는 아직 중학교 1학년이에요. 게다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살았던 아이도 아니고요. 매니저님도 아시다시피 단유는 노래나 춤을 부르는 것보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지식을 쌓는 즐거움을 더 크게 느끼는 친구죠. 단순히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덜컥 계약하게 되면, 이 아이의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네요, 개인적으로. 아직 어린 친구니까 좀 더 길게 두고 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하은의 생각은 명확했다. 단순히 재능만으로 학교를 선택하고, 과를 선택하고, 회사를 선택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 단유가 아무리 수학에 재능이 있다 해도, 스스로가 원하지 않기에 영재원에도 보내지 않았던 것처럼,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말해도 그 재능 하나만을 보고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연예인으로서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재능이 보통의 재능이 아니라면요? 인생의 방향은 누구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연예인이 꿈이 아닐 수 있고, 단지 취미로 노래를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만약 가수로 데뷔를 하게 된다면요?”

“그건 그때 가서 선택하면 될 일이죠.”

“이 업계가, 아니 이 직종이 빠를수록 좋다는 이야기는 아시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준비해야 더 완벽한, 완성된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누구보다 한발 앞서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단유가 조기에 계약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설령 연예인이 되지 않겠다 하더라도 그 부분은 계약서상에서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현실적으로 말입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직 어리고 사회 경험이 적은 단유로서는 알 수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만, 선생님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재능이요? 그건 가장 큰 요소입니다. 재능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태호도 이번에는 나름대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다. 이전처럼 어리바리하게, 무조건 계약하자는 식으로 나서는 것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단유가 듣는 앞에서 하기는 어려운 말도 있었다.

“아무튼, 녹음본만 뜨는 건 어떠니? 그건 계약과 상관없이 진행할 거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지급할 예정이라니까, ‘아르바이트’라 생각하고. 그리고 잘 되면 가디스R이랑 ···갤럭시즈에게도 좋은 일이 될 수 있으니까.”

태호의 머뭇거림이 단유에게 보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지만 단유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대신 검지를 들어 볼을 슥슥 긁다가 하은을 바라보았다. 하은이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아르바이트라잖아.”

아르바이트 삼아 저 정도 하는 건 경험으로 삼아도 별문제는 없으리라.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단유 본인의 의지였고 결정이었으니, 하은은 단유의 뜻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크게 엇나가는 일만 아니라면 자신이 막을 일도 없었고.

날짜를 정하고 인사를 한 뒤, 태호는 하은을 따로 불렀다. 태호를 배웅한다는 명목으로 오피스텔을 나선 두 사람은 가까운 커피숍으로 갔다.

“일단 단유의 보호자 중 한 사람이시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보통 이런 결정을 내릴 때, 부모님이 함께 하시는 거 아시죠? 그런데 그 부모님들이 괜히 법 때문에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아이들은 아직 이 사회를 모릅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추악한지, 얼마나 성공하기 어려운 곳인지를 모른다고요. 대학교를 나와서도 취업하기가 어려워 하는 청년 백수가 늘고 있다고 하죠? 석박사 학위를 따고도 공무원이나 하는 요즘입니다. 좋아하는 거 하는 게 좋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좋아하는 것만으로 직업을 선택한다는 건 더 어려운 일입니다.”

태호의 말을 모를 리 없는 하은이었다. 하은이 바로 그 경험을 몸으로 겪은, 그리고 겪고 있는 당사자였으니까.

“이럴 때 부모님이 계시는 겁니다. 자기 아이에게 좋은 미래를 선사하고 싶은 부모님은 아이를 대신해 현명한 선택을 해주실 수 있으니까요. 예전이라면 불평등계약, 노예계약 등으로 말이 많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가수들에게 더 유리한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어쩌면 다른 어떤 직업보다 더 각광받는 직업일 수 있어요. 게다가 단유의 재능 정도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거,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어쩌면 단유에게 연예인, 가수라는 이 직종이 천직일 수 있어요.”

평소 말하기 좋아하는 하은이라도 이 순간에는 말없이 커피만 홀짝이며 태호의 말을 경청했다.

“가진 재능 다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즐거움을 못 느끼고 있다지만, 이쪽 일을 하면서 재미도 붙여나가면 또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부디 신중하게 고려해보시고 단유에게도 좋은 조언 부탁드릴게요.”

꼭 단유가 이쪽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끔 도와달라, 는 말로 끝을 맺은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마디를 남겼다.

“부모님이 없는 단유에게 선생님이 부모님 역할을 하셔야 합니다. ···이쪽 업계의 종사자로서가 아니라 친한 형으로서 단유의 미래를 걱정하는 제 마음 아시죠?”

태호가 떠난 뒤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 하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사람의 보호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은 지난번에도 느꼈던 일이고,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에 ‘도망’이라고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잠시 자리를 떠났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나름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마음의 준비도 다 끝내고 다시 돌아왔건만, 또다시 골치 아픈 숙제에 맞닥뜨려 하은은 쓴 커피잔의 바닥만 몇 번이고 훑어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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