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16화 (316/956)

지금 이 순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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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스R이 승승장구하며 스케줄을 늘려가고 있을 때, 전국의 초중고교는 겨울방학을 맞이하고 있었다.

단유네 교실에도 각양각색의 두꺼운 패딩을 걸친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 끼리끼리 뭉쳐서 방학식 이후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중이었다.

“오늘 승급전하는데 같이 하자.”

“오케이! 콜!”

“나는?”

“야, 넌 이제 겨우 골드잖아?”

“너는 임마, 저번에 정글 크립 먹지 말자고 약속해놓고는 시작하자마자 바로 들어가서 바론 처먹고 들어왔으면서?”

“새꺄, 언제까지 그걸로 우려먹을래? 딱 한 번 했다, 한 번.”

투덜대고 틱틱대고 옥신각신해도 결국 같이 가서 해가 질 때까지 엉덩이 붙이고 놀 친구들이었다. 또 한 편에서는 어제 새벽 펼쳐진 해외축구를 감상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후반기 프리미어리그의 결과를 예측해보는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방학이라도 그들은 여전히 학원을 다니면서 내년을 준비해야 했지만, 지금의 들뜬 분위기에서 그런 암울한 이야기는 하고 싶을 리 없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생각이 다르셨던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에게 각종 안전사고와 주의해야 할 것들을 고지하며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애를 쓰셨다. 빨리 방학식을 마치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그들이 맞이해야 했던 것은 대망의 성적표였다. 2학기를 마무리하고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매겨진 점수를 확인하는 시간.

“결국, 단유가 전교 1등을 탈환했다. 박수.”

자기가 1등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반에 뺏겼던(?) 1등을 되찾아왔다는 것에 의의를 둔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단유가 예의 덤덤한 표정으로 성적표를 받아들 때도 아이들은 박수를 쳐 주었다. 어쩌면 지난번 단유가 부상으로 학교를 쉬었다가 왔을 때와도 비슷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좋겠다.”

병수가 자리로 돌아온 단유에게 축하와 부러움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냥 그래.”

“역시! 여유가 넘쳐.”

단유는 병수에게 웃음을 보인 뒤, 성적표를 접어 가방에 집어넣고 다른 아이들이 성적표를 받고 보이는 표정들을 관찰했다. 사람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표정들을 연출해내는 아이들이었다. 성적이 올라서 좋아하는 친구들 중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아이도 있었고, 단유처럼 표정을 감춘 채 성적표를 받아드는 아이도 있었다. 성적이 떨어져서 우울한 아이들 중에도 과장되게 울상을 지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매년 겪은 일이었지만, 이번 방학식은 단유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방학식 자체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지난 1년간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단유에게 특별함을 선사했다.

어느 때보다 반 아이들과 많이 부딪쳤던 1년이었다. 개중에는 주먹이 오갔던 친구도 있었고, 생각보다 가깝게 지내며 친해진 친구도 있었다. 또 특별히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관찰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쓰이는 친구도 있었다.

일부는 2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되어 자주 보게 될 것이고, 또 일부는 일부러 자리를 만들지 않는 한, 대화 한 번 못하고 졸업하고 헤어지게 될 이도 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공부 잘하는 아이? 말 없는 아이? 사교성이 없는 아이?

평소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살던 단유였지만, 갑작스레 든 궁금증에 단유는 호기심이 생겼다. 어쩌면 댓글 사건이나 지난 결석 이후의 환대 때문에 생겨난 관심일 수 있었다.

“니가 생각하기에 말이야, 난 어떤 사람 같아?”

병수는 갑작스러운 단유의 질문에 멀뚱히 바라보다가,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벅벅 긁었다.

“뭐야? 갑자기?”

“왜?”

“오글거리잖아?”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질문은 하면 이상하구나.’

단유는 그동안 짝으로서 고생했다고 병수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냥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

“가자!”

“어딜?”

“노래방!”

미리 준비한 동전을 손에 쥐고 있다가 짤랑, 흔들어 보이며 웃음 짓는 지태 때문에 네 사람은 노래방으로 향했다.

“상미도 오라고 하면 안 돼?”

지태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내자, 명수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곧 전화를 끊고 통화내용을 알려 주었다.

“자기 친구들이랑 쇼핑하기로 했대.”

“여자애들은 이상해. 이런 날 무슨 쇼핑이야?”

지태의 투덜거림에 채윤이 지태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려주었다. 어차피 노래방도 좁은데 사람 많아서 좋을 것 없지 않냐는 단유의 말에 명수와 채윤이 동의하자, 지태는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다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 근데 단유 너? 계약 안 해?”

“계약? 아, 에이 바운스랑?”

지태와 채윤도 단유가 그 회사의 이사님이랑 식사하면서 계약 이야기를 했었다는 사실을 들었기에 그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참이었다. 명수의 질문에 단유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니 지태가 채근했다.

“너, 머리도 좋고 잘생겼으니까 연예인하면 성공할 거야.”

연예인의 성공 조건이 그렇게 단순한 걸까?

“노래도 잘하잖아? 나중에 가디스R이랑 같이 노래 부르면 사람들이 많이 좋아할걸?”

활동방향까지 잡아주는 채윤이었다.

“돈 벌면 니가 사고 싶은 책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까 좋지 않을까?”

버는 김에 내 옷도 사주고, 라는 명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단유가 말했다.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어. 그리고 방학하고 나서 재훈이형이랑 이야기하기로 했으니까, 이야기해보고 결정하지 뭐.”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센터 앞에 섰을 때, 네 사람은 기이한 풍경을 목도 하게 되었다.

오락실, 혹은 게임센터라고 부르는 이곳은 이 주변에서 유일하게 아케이드 게임들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최근 수많은 게임센터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혹은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폐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인터넷에는 영업 중인 게임센터의 위치를 명기한 지도가 있을 정도였다.

피시방에 손님을 뺏겨 이제는 장사하기 어렵다는 점주들의 말은 사실이겠지만, 아케이드 게임을 즐기는 매니아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매니아들은 인터넷 동호회에 가입하여 정보를 주고받거나 친목을 나누면서 점점 입지가 좁아져 가는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서 자신들의 취미활동을 효율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동네 형들이 게임 하고 있을 때, 맞은 편에 앉아 ‘Challenger’를 자처했을 테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도 찾기 힘든 마당이라 그들이 즐기는 방법 역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정모’였다.

“저기 왜 저렇게 사람이 많아?”

평소의 3배? 4배는 넘을 것 같은 인원들이 게임센터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싸움이라도 났나?”

다가가 보니 싸움이 나긴 났는데, 게임기 안에서 싸움이 났다. 치열한 대전 격투가 이루어지는 게임기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응원을 하고나 비평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비단 한 대의 게임기에서만 그런 모습이 연출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센터 안의 게임기들 대부분에서 그런 모습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게임 센터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경기를 치른 후, 잠시 쉴 겸 센터를 나와 수다를 떠는 이들이었다.

“아쉽네. 여기도 다음 달까지만 한다니.”

“그러게요. 한때는 최신 게임을 제일 빨리 수입하던 곳이었는데.”

“여기 사장님도 격투 게임 매니아라잖아요.”

“확실히 이제는 이런 게임 하는 사람이 줄긴 줄었어.”

“우리도 구식인 거죠.”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구식 타령이냐?”

“형님도 나이 많은 편은 아니시면서.”

“니 때는 HOT가 최고였지? 내 때는 소방차가 최고였다.”

“와, 그렇게 말하니까 완전히 옛날 사람 같아.”

지태가 선두에 서서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구석에 설치된 코인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센터 안에서 북적대고 있었지만, 다들 게임기만 붙잡고 있던 탓에 이쪽은 비교적 한산했다.

“저기 봐.”

노래방 밖에서는 서 있을 틈을 찾지 못할 정도로 붐벼서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노래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작은 틈으로 센터 안 풍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저 게임 하는 사람도 있네?”

몇 번 오지 않았지만, 올 때마다 화려하게 생긴 저 게임은 누가 할까,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어떤 남자가 게임기 앞에서 서서 현란한 손기술을 보이며 버튼들을 누르고 있었다.

“되게 어려워 보인다.”

리듬 게임이라는 게 저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들을 하며 네 사람은 바깥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다들 입은 옷들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어떤 사람은 진짜 동네 마실 나온 사람 마냥 허름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각자 놀면서도 함께였고, 함께 할 때는 더욱 신난 얼굴을 하고 스틱을 조종하거나 버튼을 눌렀다.

“계속 보고 있었더니,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드네.”

채윤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집에서 하는 거랑은 또 다른 맛이 있겠지?”

“여기 게임기가 크니까 더 좋지 않을까?”

“크기가 무슨 상관이야? 요즘 컴퓨터가 크기로 성능 따지는 시대도 아니고.”

지태의 면박에 채윤이 얼굴을 붉혔다.

“야, 그냥 노래나 부르고 가자. 무슨 사파리 구경 온 것처럼 이게 뭐냐?”

지태는 준비해온 동전을 가지런히 놓아둔 뒤, 책을 펼쳤다. 다른 사람들이 각자 부를 노래를 고르는 동안, 단유는 계속 바깥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추운 겨울임에도 좁은 실내 안에 뭉쳐 있다 보니, 절로 땀이 나고 온갖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는, 어찌 보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거기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는 없었고, 다들 표정만 보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누리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즐거움을 평소에 느껴볼 일이 없던 단유로서는 그 모습들이 꽤 신기하고 부러웠다. 부러움은 오늘 방학식 때 봤던 모습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밥 한 숟가락에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수 천만 원을 손에 쥐고도 불행할 수 있다. 단유는 책을 읽을 때 행복했고, 혼자서 사색을 즐기는 시간에 행복했다.

그러나 오늘 이러저러한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저런 즐거운 표정을 짓는 순간을 만끽하는 것도 행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식을 맞아, 성적표를 받는 아이들이나 방학 동안에 학원을 두 군데 더 다녀야 한다는 아이들이나 모두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방학식’이라는 순간을 즐겼기 때문이었고, 게임센터 안의 사람들이 추위와 냄새와 기다림이라는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은 같은 취미활동을 함께 하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유야, 노래 골라.”

단유는 채윤에게서 책을 건네받아,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딱히 부를 만한 노래는 없었다.

“너, 저거 불러봐.”

명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벽에 붙은 「1월 신곡」이라는 제목의 포스터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디스R이 부른 ‘리모트’란 곡이었다.

“저게 벌써 나왔네? 저 정도면 성공한 거 아냐?”

“야, 이미 예전에 성공했어. 지금 31위던가? 아마 다음 주 되면 20위권도 할 수 있을 것 같던데?”

채윤이 단유를 보며 물었다.

“너, 지난번에 30 몇 위 한다고 하지 않았어?”

“맞다! 너 지난번에 신곡 나오면 30등 정도 한다고 했었다. 맞지?”

단유는 헛숨을 뱉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건 잘도 기억하네?”

“야, 그럼 만약 순위가 여기까지면 단유 말이 맞는 거 아냐?”

“단유야, 가디스R이 20위 못 올라가면 니 탓인 거다.”

명수의 말에 단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어째서 내 탓, 이냐고 물었다.

“니가 저주를 한 거잖아? 30등 밖에 못 한다고.”

“맞네, 단유가 저주를 걸었네.”

단유를 제외한 아이들은 서로 쿵짝을 맞추며 단유 놀리기에 재미를 붙였다.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이크를 들고 일어섰다.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단유는 음정을 기억해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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