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u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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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과 나윤의 뷰티컷이 마무리된 후, 단유의 차례가 왔다.
“나오세요.”
연출팀 막내가 대기실 문을 두드려 알려주었다.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스타일리스트가 마지막으로 헤어 스타일링을 점검한 후, 눈을 찡끗거려 보였다.
“수고해.”
대기실을 나오니 분주한 세트장의 열기가 확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세트장에 처음 들어올 때와 다른 점은, 분주함 속에 긴장으로 가득한 차분함도 함께 서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을 카메라 한 대가 노려보고 있었다. 단유는 그곳에 자신이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단 조명 좀 맞추고 시작하자.”
단유가 카메라 테스팅을 위해 앞에 선 후, 조명팀이 조명의 거리와 밝기 등을 조절했고, 감독은 연신 모니터를 바라보며 색감을 조정해 나갔다.
감독의 신호가 떨어진 후, 조연출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슛 들어갑니다!”
촬영장에 ‘가디스R’의 싱글곡이 계속 반복되며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단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사람의 실수가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현장이었다.
단유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독이 설명했던 컨셉에 맞춰 연기를 보여야 했다. 감독은 단유가 전문적인 배우가 아님을 알았기에 복잡한 주문 대신 간단한 표정만 요구했다.
“저기서 이렇게 서서, 저거 보이지? 저쪽을 바라보면서 서 있다가 사인을 주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거야. 표정은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웃지만 않으면 돼. 되도록 무표정하게. 오케이?”
검은색과 흰색의 광목천이 천장에서 길게 늘어뜨려진 가운데 하얀 셔츠와 하얀 바지, 맨발의 단유가 감독이 지시한 방향을 향해 서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괜찮죠?”
태호가 슬쩍 물음을 던졌다. 보통은 감독이 촬영하는 중에 말을 걸지 않아야 하지만, 이번 촬영을 맡은 감독은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련과 나윤의 뷰티컷을 찍을 때도 먼저 태호에게 감상을 물어보던 감독이었다.
“네. 마스크가 좋기도 한데, 화면으로 보니까 분위기가 좀 있는 친구네요. 그쪽 연기자 아니죠?”
“네. 그냥 일반인이에요. 아직은요.”
“아직?”
“예전에 갤럭시즈 뮤비 촬영 때도 출연한 적이 있던 친군데, 아직 계약은 안 했거든요.”
감독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기는 조금 어설프지만, 배운 적이 없는 친구라니까 그걸 감안하면 확실히 싹이 보이는 아이긴 하네요. 당장 마스크만 따서 모델을 시켜도 될 것 같은데요?”
단유에 대한 칭찬에 태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몇 번의 테이크 이후, 감독이 오케이 컷을 외쳤다.
“컷! 잠깐 카메라 좀 돌려서 찍어봅시다.”
촬영팀 막내들이 우르르 달려와 카메라를 들고 감독이 지시한 방향으로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감독은 카메라 감독과 새로운 방향에서 찍을 컷을 상의한 후, 단유에게 다가갔다.
“힘드냐?”
“아뇨, 괜찮아요.”
“이번에는 이쪽에서 찍을 건데, 방금처럼 똑같이 연기하면 돼. 대신 보는 방향은 이쪽, 그러니까 저기쯤을 보면서 하면 되고, 아까랑 비슷한 속도로 팔을 들어 올리면 돼. 그리고 팔을 올릴 때, 너무 힘없이 올리지 말고 끌려간다는 느낌이 들게, 그래서 저항하려는 느낌이 들게 연기할 수 있겠어? 한 번 해봐.”
단유가 몇 번 시연을 보이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자. 타이밍 맞춰서 천천히 올리기만 해라. 그리고 표정은 좋았어. 계속 무표정으로 가는 거야.”
카메라와 조명이 다시 세팅된 후, 단유가 다시 촬영에 들어갈 때 수련과 나윤은 대기실로 돌아갔다. 촬영이 더 길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니 태호가 잠시라도 눈 좀 붙이라며 대기실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오빠, 뭐 먹을 거 없어요? 당이 떨어지는 기분이야.”
수련의 말에 태호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초코바 2개를 꺼냈다.
“전 괜찮아요.”
“먹어 둬. 나중에 도시락을 먹긴 하겠지만, 그래도 먹어 둬. 힘이 있어야 촬영도 잘 끝낼 수 있으니까 주는 거야. 그리고 내일부터는 이런 거 없어. 오늘이 마지막일걸?”
태호가 나간 뒤, 나윤은 손에 쥐어진 초코바를 조심스럽게 뜯어 입안에 넣었다. 애써 필요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입에 들어오는 달콤한 초콜릿의 풍미가 긴장을 조금 녹여주는 느낌이었다.
“얼른 먹고 눈 좀 붙여. 하루동안 촬영을 마쳐야 해서 꽤 피곤할 거야. 틈틈이 자두지 않으면 피곤해서 못 버틸 거야.”
뮤비 촬영 경험이 있던 수련이 관록을 드러내니 나윤이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언니. 저 괜찮았어요? 아까는 너무 긴장해서 표정을 어떻게 지었는지도 생각이 안 나요.”
“잘했어. 그리고 그런 걱정도 할 필요 없어.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감독님이나 태호 오빠가 다시 찍자고 했을 테니까.”
실제로도 나윤의 촬영 때 감독의 뒤에서 모니터했던 수련은 나윤이 잘했었노라고 덧붙였다. 나윤은 수련의 손에 들린 초코바 비닐까지 집어서 쓰레기통에 버린 후 소파에 몸을 묻었다. 썩 안락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앉아 있다 보니 절로 눈이 감겼다. 아까는 너무 긴장해서 눈도 안 감길 거 같더니.
눈을 감고 있노라니, 귀에 신경이 몰리는지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물려서 더 듣고 싶지 않다고 하겠지만, 나윤에게는 자신의 생애 첫 데뷔곡이었으니 몇 번을 들어도 질린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언니.”
“응?”
수련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있었다. 나윤은 계속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물었다.
“우리 노래, 좋죠?”
“응.”
다시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노래는 어느새 2절을 다 부르고, 다시 1절 도입부가 연주되고 있었다. 나윤은 자신이 잠을 자는 건지, 음악을 듣느라 잠을 못 자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몽롱한 기분으로만 따지면, 잠을 자는 것도 같은데, 귓가에 들리는 노래는 끝없이 시작되고 또 시작되었다.
나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섰다. 환한 조명에 눈이 부셔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실눈을 뜨고 간신히 앞을 바라보니 천장에서 수십 개의 조명이 비추는 무대가 바로 앞에 있었다. 화려한 레이스가 목과 소매를 꾸미고 있는 하얀색 블라우스와 플리츠 주름 디자인의 핑크색 치마를 입은 모습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모습 그대로인데, 어느새 촬영장만 무대로 바뀌어서 나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명 너머는 어둠으로 가득 차 그곳에 사람이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나윤은 자석에 끌리듯 무대 가운데로 향했다. 조명 가운데 하이라이트를 주는 핀 조명이 나윤의 머리 위에서 작열하고 주위에 화사한 꽃들이 무대를 꾸미고 있었다. 나윤은 손에 든 마이크를 바라보다가 전주가 흘러나오자 홀린 듯 마이크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 아무래도 좋아, 사랑이 아니어도 좋아. 내게 필요한 건 그저 너였던 거야.”
나윤은 잔뜩 감정을 끌어모아 자신의 파트를 불렀다. 그리고 노래가 끝났다. 여전히 무대 바깥은 어둡고 조용했다. 나윤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가 끝난 뒤의 무대가 무섭고 두려웠다. 왜 조용한 걸까? 노래가 듣기 싫었던 걸까? 내 노래가 이상했을까?
“나윤아.”
나윤이 정신을 차리자, 태호가 소파에 엎드린 나윤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아주 깊게도 잠들었던 모양이네. 너 진짜 침 흘렸어.”
얼른 몸을 바로 세우고, 입가를 훔쳤다.
“가서 화장 고치고 나와.”
“저희 차례에요?”
수련이 기지개를 켜며 묻자 태호는 물병을 건네며 답했다.
“그래. 단유가 NG를 많이 안 내서 금방 끝냈다. 이제 같이 스토리컷 찍고 단유 먼저 집에 보내야 하니까 서두르자.”
대기실을 나와 잠시 촬영장을 밖을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어둑해져 있었다. 화장을 고친 나윤이 서둘러 빠져나오니 촬영장은 이미 세팅이 끝나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이 끝난 것은 그 뒤로 3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편집하게 되면 1분이 채 안 될 컷이지만 디테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감독과 첫 촬영에 연기가 어색했던 나윤의 NG컷이 나오면서 조금 늦게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단유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했고, 태호는 로드에게 데려다주라고 일렀다.
“수고했어, 단유야.”
단유는 수련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화답했다.
“누나도 수고하셨어요. 끝나려면 아직 멀었죠?”
“그렇지. 나윤이랑 남은 스토리 컷도 찍어야 하고, 안무 컷도 남았지. 새벽에나 끝날 수 있으려나.”
단유는 힘내라고 말한 뒤 나윤에게도 응원의 말을 남겼다.
“우리 때문에 고생 많았어.”
“뭘요.”
“회사에 또 올 거지?”
“오더라도 누나들 볼 시간이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왜? 무슨 일 있어?”
“저한테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누나들한테 일이 있는 거죠. 데뷔를 앞두고 있는데 시간이 있겠어요? 전에도 보니까, 거의 안무 연습실에서 나오지들 못하던데.”
갤럭시즈가 두 번째 싱글을 발표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며 말했다. 나윤도 그 말에 아, 하고 탄식을 뱉으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와서 응원도 해주고 그래.”
“그럴게요. 누나도 열심히 하시고요.”
“고마워.”
단유는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던 나윤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있었다.
“왜?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그래?”
“언니!”
두 사람은 까르르 웃음을 지으며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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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다음 날 해가 뜰 때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두 사람이 찍든, 다섯 사람이 찍든, 끝나는 시간은 똑같다며 투덜거리는 수련이 먼저 차에 오르고 그 뒤를 말할 기운도 없어 반쯤 눈을 감은 지친 얼굴의 나윤이 차에 올랐다. 두 사람은 차에 탄 뒤 바로 곯아떨어졌다.
태호 역시 조수석에 탄 뒤, 로드에게 회사로 갈 것을 주문한 후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바로 잠이 들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뮤직비디오 촬영스케줄을 마쳤을 뿐이었다. 앞으로 데뷔일까지 빼곡하게 채워놓은 스케줄을 상기하며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태호는 숨을 토해냈다.
“답답하세요? 창문 좀 열까요?”
핸들을 돌려 촬영장을 빠져나가던 로드매니저가 물었다.
“아냐. 날씨도 추운데 그냥 가자.”
분명 스케줄대로 가고 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지금껏 성공의 맛을 보지 못했던 불운한 매니저의 자격지심 때문일 것이다. 기회가 날 때마다 생각나는 신들에게 기도드리는 매니저의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사고 안 나게 조심해. 나 좀 잔다.”
“예, 그러세요.”
혹시나 싶지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시기일수록 더욱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니, 태호는 로드매니저에게 주의를 시킨 후 비로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지끈거리던 두통도 피곤은 이기지 못했던지, 금방 잠이 든 태호였다.
태호의 걱정과 달리 스케줄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각종 레슨과 표지 촬영, 그리고 데뷔를 위한 방송 촬영 스케줄 등이 진행되는 것과 달리 데뷔일이 가까워질수록 태호는 긴장감에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만성 속 쓰림 정도는 가벼운 병치레에 불과했고, 푸석해진 피부와 눈 밑의 다크 서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차게 만들 정도였다.
반대로 방송일이 잡히고, 방송화면에 잘 나올 수 있게 매일 피부과를 들락거리며 피부관리와 마사지를 받는 수련과 나윤은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반들거렸다.
그리고 방송일 하루 전, 마지막으로 점검하자는 차원에서 노래와 안무를 맞춘 후, 수련과 나윤, 태호와 스타일리스트가 안무 연습실 가운데 둘러앉아서 내일의 일정을 점검했다.
“내일 4시에 일어나서 샵에 들렀다가, 방송국가서 대기. 그리고 사전녹화로 촬영이야. 사전녹화라고 긴장 풀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수련의 대답에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열심히 했잖아? 그치? 이번에 노래도 좋고, 안무도 잘 나왔고, 나윤이도 연습 열심히 했잖아? 자신감 가지고 내일 방송국 가면 인사 열심히 하고, 수련이 너도 새로 데뷔한다는 기분으로 기운 넣어서 큰 소리로 인사하고.”
“알았어요.”
“나윤이 너도.”
“네.”
태호가 손을 내밀었다.
“화이팅하자.”
“뭐야, 촌스럽게.”
뒤에 앉아서 구경하던 스타일리스트가 비웃음을 터뜨리자, 태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게 우리 전통이야! 안 그래, 수련아?”
“전통이랄 거까지야.”
그래도 수련은 빼지 않고 두터운 태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위로 나윤이 손을 얹자, 태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파이팅!”
수련과 나윤도 지지 않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파이팅!”
태호는 씩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목 아껴야 하니까, 말들 많이 하지 말고, 물 마시고 자도록 해. 알았지?”
“네.”
“대답도 하지 마.”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 숙소 앞에서 두 사람을 실은 밴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