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10화 (310/956)

Make-up(1)

-------------- 310/952 --------------

본래 교과서란 학년별 혹은 학기별로 설정된 교과과정을 가장 효율적으로 교육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교재이지만, 때로는 한 학기, 학 학년을 넘어 한 인생을 좌우하는 가르침이 담긴 교재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교과서가 낙서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각양각색의 형광펜으로 정성스럽게 꾸며 넣기도 한다. 그렇지만 교과서의 본질은 교육을 위해 사용되는 지도서이며 지침서이다. ‘교육’이 강조될수록 ‘교과서’의 중요성은 커지기 마련이다.

“이번 시험 범위 너무 많은 거 아냐?”

“새삼스럽게 왜 그래? 시험 한두 번 치는 것도 아니고.”

“야, 다른 사람들이 전부 너 같은 줄 알아?”

“나 같은 게 뭔데?”

“교과서는 줄줄 외우고 다니는 거.”

“아니거든?”

지태는 자신의 말에 동조해달란 의미로 시선을 돌려보지만, 다들 단유가 내준 문제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유는 이번에도 자기 나름의 기준에서 시험에 나올법한 부분들을 문제로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제공했다. 가끔 명수가 시험 두 번 치는 것 같다고 투덜거렸지만, 효과가 입증된 단유식 예상문제집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너네는 교과서가 달라서 어떨지 모르겠다.”

상미는 볼펜 위 버튼노브(knob)를 반복적으로 누르며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을 거야.”

“그래? 난 니가 문제를 안 풀고 있길래, 혹시 교과서가 달라서 그런 건가 생각했어?”

“···안 푸는 게 아니고 생각 중이잖아? 보면 몰라?”

“지나치게 오래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지. 뭐가 문젠데?”

“···여기가 헷갈려.”

단유는 상미가 짚은 보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상미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과외를 해 주고 있을 때, 음료수를 마시고 돌아온 하은이 단유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단유 옆에 자리했다.

“우리 단유, 이제 다 컸네? 이렇게 애들 가르쳐주기도 하고?”

“이 정도 가지고 공치사하긴 싫은데요?”

“어유, 그래요?”

우쭈쭈, 라며 턱을 간지럽히려는 하은의 손길을 피한 단유는 시선을 책에 고정하고 하던 공부를 이어나갔다.

“자, 선생님도 쉬었으니까 어디 좀 볼까?”

그러자 명수가 먼저 달려와 못 풀고 있던 문제들을 가리켰다. 뒤이어 지태와 채윤도 하은에게 문제집을 내밀며 도움을 부탁했다. 하은은 싱긋 웃으며 한 사람씩 문제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

새로운 하숙생(?)이 온 것에 대한 환영식이 끝나고, 잠깐의 혼잡함―하은이 가지고 온 옷과 책과 가구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지만 금세 예전의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가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정도가 아니라 좀 더 활기가 넘친다고나 할까?

“솔직히 말하면, 그 전의 선생님은 좀···그렇잖아?”

싫은 말 못하는 명수마저도 이전 선생님의 느슨했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으나, 그것이 진짜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하은에 대한 상대적 비교로 인해 그런 것인지는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하은이 등장이 명수의 활기를 북돋을 뿐만 아니라, 단유에게도 정서적 안정을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어리광을 부리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투정을 부린 적도 없지만, 그래도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특히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단유의 경우가 더 그랬다.

“어머, 예뻐라? 이렇게 인형같이 생긴 너의 정체가 뭐니? 언제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사겼대? 우리 단유 능력도 좋다? 이그, 그렇게 보지 마. 솔직히 거울 좀 봐라. 너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애를 누가 좋다고 쫓아다니겠니? 호호호, 농담인 거 알지? 그래도 선생님은 우리 명수가 남자다워서 더 좋다? 진짜야?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이렇게 현관에 세워두고 있으면 안 되는 건데. 어서 들어와. 뭐 먹을래? 먹을 게 있나? 이모! 먹을 거 있어요?”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들어온 상미를 거실에 앉힌 후, 선생님을 소개한 단유는 적절하고도 익숙한 ‘말 자르기’ 스킬을 이용하여 대화를 해 나갔다. 상미는 금방 하은에게 익숙해졌고, 같은 여자라서인지, 아니면 유쾌한 성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마치 친자매였던 것처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단유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리에서 쫓겨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너희들 친구라고? 너희 둘 다 너무 잘생겼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다들 잘 생겼대? 먹을 걸 잘 챙겨 먹어서 그런가? 우리 명수도 잘 챙겨 먹는데 왜 그러지? 이그, 명수야. 농담인 거 알지? 누누이 말하지만, 선생님은 명수가 남자다워서 좋다니까. 어서 들어와. 그래도 단유나 명수 친구들이 이렇게 집에까지 온다니, 예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인데, 진짜 우리 애들 많이 컸구나. 얘들이 어렸을 때 어땠는지 알아? 난 우리 애들이 정말 왕따인 줄 알았다니까? 친구를 안 사귀는 건지, 안 만드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게다가 명수 얘는 지금도 시커멓지만, 예전에는 잘 씻지도 않아서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데, 정말 보는 사람이 힘들 정도였다니까. 이그, 그래도 지금을 잘 씻고 다니는 거 선생님도 잘 안다니까 그러네? 선생님은 명수가 정말 좋아. 선생님 마음 잘 알지?”

지태와 채윤도 선생님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단유네 집에 입성했다. 단유가 아이들과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더니, 하은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탁'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선생님도 도와줄게.”

하은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첫인상에 질려, 살짝 겁을 먹은 인상이 엿보였다. 하지만 하은의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은 단유가 그랬고, 명수가 그랬듯, 곧 하은의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적어도 공부라는 과목에 한하여 하은은 누구보다 쉽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지태나 채윤은 물론이고, 명수와 맞먹을 만큼 공부에 거리감을 느끼던 상미도 하은의 교습방식과 가르침에 흥미를 느끼고 폭풍 질문을 해댔다. 덕분에 상미는 벌써 네 번 이상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물을 마시며 마른 목에 수분을 보충해야 했고, 두 번 이상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단유는 아이들의 선생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져 편했고, 자기 공부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좋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은은 고마운 존재였다.

그리고 어느새 시험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고, 단유네 뿐만 아니라 전 학교가 시험공부 대비 모드로 전환하여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단유는 태호와 함께 집을 나서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아요.”

태호가 왔을 때도 거실에는 한창 시험공부에 매진하는 아이들로 인해 공부방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태호가 단유를 부를 때, 다른 아이들이 부럽네, 재미있겠네, 같이 가고 싶네, 라며 떠들어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특히나 공부를 좋아하는 모범생, 전교 1등 단유 아니던가.

“오늘 하루 쉰다고 해서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그 전부터 시험 준비는 완벽하게 해 놨으니까, 별로 걱정도 안 되고요.”

단유는 조금 과장되게 자신감이 넘친다는 표현으로 태호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태호는 씩 웃으며 차 문을 열어 단유가 타기 쉽게 도왔다.

“자, 그럼 가는 동안 간단하게 컨셉 이야기해줄게.”

듀엣의 명칭은 ‘The Goddess rule’을 줄여 ‘가디스R’이라고 부르기로 했으며, 지구로 내려온 여신이 남자를 ‘조종’하여 자신의 뜻대로 맞추려고 하지만, ‘사랑’은 ‘조종’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사랑의 의미’를 반추하는 컨셉이라는 태호의 설명이었다.

“괜찮을 거 같지?”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말로는 뭐든 못할까. 결국 결과물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린 것인데.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단유는 그 설명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신이 왜 지구로 와요?”

“음, 사랑을 찾기 위해?”

“왜 굳이 사랑을 지구에서 찾아요? 여신들이 사는 곳에는 사랑을 찾을 수 없는 건가요?”

“그게, 내가 만든 게 아니라서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신화에서 보면 신들이 인간을 꾀어서 사랑하는 장면도 나오고 그러잖아. 그리스 신화는 알지? 뭐 그런 내용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은데.”

단유는 가만히 있다가 되물었다.

“그거, 위에서 결정한 건가요?”

“뭐, 그렇지.”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뽑아낸 최선의 선택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 맞댄 머리에 두 가수의 의견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 적어도 아직까지는 밑에서 신뢰를 주지 못한 면이 있고. 게다가 나윤이는 아직 고등학생이니까.”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 음악적 감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아이디어 회의에 빠져야 할 핑계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단유는 이번에도 결국 갤럭시즈와 비슷한 결과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는 뜻을 전했다.

“나도 그런 고민을 많이 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를지도 몰라.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곡이 잘 나왔잖아? 그리고 지난번에 니가 아이디어를 준 것도 있고 해서, 내가 이번에 기획안을 낸 게 있는데, 그게 또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기획안이요?”

“아, 말 안 했나? 저번에 니가 그랬잖아? 홍보 마케팅에 좀 더 신경을 쓴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그래서 그와 관련된 기획안을 제출했거든.”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태호가 낸 새로운 기획안에는 다변화된 미디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기획 아래 공중파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올리고 노래를 알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위에서도 이미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이 말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태호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에 따라 인터넷과 소수 미디어 매체 출연에 힘써보기로 했다는 태호의 말에 단유는 잘됐다며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그런 출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무기력하게 활동을 접어야 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고, ‘가디스R’에게도 나름 의욕을 북돋는 일이 될 것이니까.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비슷한 시간에 로드 매니저의 차를 타고 온 수련과 나윤을 만날 수 있었다. 주차장 가운데에서 단유를 발견한 수련이 단유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글···쎄요. 그다지 오랜만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그래? 한동안 자주 보다가 안 봐서 그런가? 난 되게 반가운데, 넌 아닌가 보네?”

단유가 대답에 곤란함을 느끼는 표정을 짓자, 수련이 웃음을 터뜨리며 단유의 어깨를 감싸고 세트장으로 끌고 갔다. 그 뒤를 따르는 나윤에게 단유가 간단하게 인사를 하자, 나윤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쟤가 너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가 봐.”

“언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데 나윤이 달려와 수련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아니야? 너 그랬잖아? 보고 싶다고?”

“언니! 그렇게 말하면 쟤가 진짜인 줄 알잖아요? 농담 좀 그만 해요.”

수련은 나윤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진짠데? 진짠데?’라며 놀려댔다. 나윤은 붉어진 얼굴로 수련의 손가락을 피하려는 몸짓을 하며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련이, 많이 변했지?”

뒤따라오던 태호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네요.”

변하긴 변했다. 처음의 수련은 그저 직진만 하던 코뿔소처럼 뿔을 드러내고 각을 세우기 일쑤였는데, 점점 시간이 가면서 그 뿔이 닳고 닳더니 어느새 자기 속의 말을 잘 하지 않게 변해갔었다. 그것이 갤럭시즈의 운명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아, 주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고.

그런데 최근 밝은 모습을 자주 보이고, 저렇게 장난을 치면서 긴장한 후배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를 쓰는 모습도 보이니 지켜보는 매니저로서는 참으로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유 역시 그런 변화가 보여서 태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들어가자.”

“네.”

장난치며 세트장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따라 단유와 태호도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