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09화 (309/956)

주목(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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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가 지태와 채윤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지태와 채윤은 유난을 떨며 다가왔고, 옆에 앉아 있던 상미가 손을 뻗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단유 아직 아프니까, 손대지 마.”

지태와 채윤이 얼굴을 붉혔고, 명수가 어리둥절해 하고 상미는 그저 날 선 눈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너 왜 그래?”

단유가 묻자, 상미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아까 아프다면서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테.”

“너는 조심성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쟤들이 너랑 같아?”

“내가 왜 조심성이 없어? 나 조심성 많아.”

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단유는 괜한 거로 다투고 싶지 않아 상미를 억지로 앉히며 손에 패드를 쥐여줬다.

지태는 단유가 빠진 이틀간 아이들이 걱정을 많이 하더라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전했고, 채윤은 이틀간 공부한 내용을 필기한 노트를 빌려주겠노라 말했다.

“야, 얘가 그런 게 필요하겠냐?”

“왜 필요 없어? 그래도 수업 때 무슨 내용으로 공부했는지는 알아야 하잖아?”

“넌 여태 단유를 보면서도 모르냐? 단유는 이런 거 없이도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아인데, 어쩌면 선생님보다 더 교과서를 많이 읽었을걸?”

그건 너무 과장이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채윤이 니 글씨는 너도 못 알아보지 않냐?”

“그 정도는 아니거든? 다 알아볼 수 있거든? 내가 이것도 못 알아보면 시험공부는 어떻게 하겠어?”

채윤은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글씨도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악필 중의 악필이었다. 단유는 마침 말 나온 김에 이야기를 꺼낸다는 식으로 시험공부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부터 같이 공부하자는 이야기에 지태와 채윤은 좋아했고, 한발 물러섰던 명수는 인상을 썼다.

“좀 더 천천히 해도 되지 않아?”

명수의 불만은 가볍게 묵살 되었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 함께 모여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다.

다음 날, 단유가 교실에 등장했을 때, 일단의 아이들이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개중에는 별로 말을 나눠본 적 없던 아이들도 있었는데, 단유가 생각하는 거리감과 아이들이 느끼는 거리감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인지, 스스럼없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봐 주었다.

담담하게 괜찮다고,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대꾸하며 자리로 향한 단유는 솔직히 꽤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평소 자신이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러 거리를 뒀다기보다는 그냥 거리가 멀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다른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모여 잡담을 나누거나 장난을 치는 건 성격에도 맞지 않았고, 그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보고 지식을 채워나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특별한 주제를 두고 나누는 대화―과제에 대한 이야기, 틀린 문제 풀어주기, 수업시간에 제시된 주제로 토론하기―를 제외하고는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고, 대화가 없는 만큼 심리적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아이들에게서는 그런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아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깝게 다가오는 아이들이었다.

단유는 그 아이들에게서 ‘순수함’을 보았다. 그리고 ‘순수함’을 발견한 순간,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걸까?’

그러고 보니 상미도 어쩌면 이 아이들과 비슷한 ‘순수함’을 지녔던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떤 모진 말을 해도, 때로는 상처를 받지만 또 금방 털어내고 다가와서 살갑게 굴기도 하는 상미의 모습이, 반 친구들에게서도 보였다.

“단유는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그래도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네.”

담임 선생님은 장난 심하게 치지 말고, 다치지 말고 수업 열심히 듣자는 평범한 훈계로 조회를 마무리했다. 단유는 담임 선생님과의 거리감이 자신이 느끼는 거리감과 일치한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었다. 1학기 때의 일 이후, 담임과 단유 사이에 생긴 미묘한 거리감이 이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반 친구들, 동급생들에 대한 단유의 판단이 더 복잡해졌다.

****

“어? 너 다쳤어?”

태호는 단유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단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어쩐 일이세요?”

“많이 다친 거니? 낫는 데 오래 걸려?”

“글쎄요, 아직 통원 치료 중이긴 한데, 금방 낫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깊은 자상을 입은 터라, 금방 상처가 낫지는 않을 것이다. 단유가 조금 욕심을 부려서 통원치료를 받게 된 것이기에, 어쩌면 낫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어쩐 일이신데요?”

“아, 사실은 뮤직비디오 때문에.”

일전에 단유는 수련과 나윤 듀엣의 싱글 ‘리모트(remote)’의 뮤직비디오 출연을 허락했었다. 태호는 뮤직비디오의 일정이 나온 탓에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는데, 단유의 부상이 걸리게 된 것이었다.

“설마 제가 맨몸으로 벗고 다니는 걸 찍으시려는 건 아닐 거 아니잖아요? 상관없을 거 같은데.”

“그래도 부상이 심하면 좀 무리하지 말고 그래야 하지 않겠니? 시키는 내 입장도 조금 꺼림칙하고 말이야.”

“크게 힘을 써야 하는 일만 없다면 별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 전에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는 단유에게 태호가 스케줄표를 보여주었다.

“2주 뒤네요?”

“그래, 시간이 조금 애매하지?”

태호는 부상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물었던 말이었지만, 단유는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인정했다.

“애매하네요. 3주 뒤 월요일부터 저희 학교 시험인데.”

“어? 그래?”

더 골치 아프게 됐다면서 머리를 긁는 태호였다.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니가 학생이라는 걸 깜빡했다.”

그런 걸 깜빡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냐고 묻는 대신, 나윤도 학생이지 않냐고 물었다. 듣기로는 고2라고 들었는데.

“걔는···뭐 그런 게 있어.”

태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무리 가까운 단유라고 하지만, 그래도 외부자인데 소속 가수의 치부를 밝힐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단유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 아니던가. 춤과 노래 연습하느라고 공부도 잘 안 하고 시험 성적에도 관심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서 나쁜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는 없으리라.

“뭐, 바쁘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어? 아는 건가? 태호는 단유의 대답에 헷갈린다는 표정을 짓다가 금세 추스르고 본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아무튼, 니 생각은 어떤데?”

“저 하나 때문에 미룰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사실 12월에 발표할 타이틀이라서 일정이 좀 빡빡하게 정해진 면이 없잖아 있어.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촬영은 스케줄대로 갈 공산이 커. ···만약 니가 촬영을 못 한다고 해도 괜찮아. 대신 롤(role)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는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말이야.”

단유는 태호가 기대하는 대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제가 할게요.”

“진짜?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괜찮아요, 진짜.”

“너 그러다 또 전교 1등 놓치는 거 아냐? 지난 번에는 몰라도, 이번에 또 전교 1등 못하면 전부 내 탓이 돼버리는 거잖아?”

단유는 왜 이렇게 자기 탓을 하는 사람이 많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그런 거 아니고요, 1등에 별로 집착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오고 갔지만, 결론은 단유가 촬영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봤고, 그 날짜에 맞춰 태호가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며 이야기는 마무리가 지어졌다.

“그런데 선생님은?”

혹시 대화에 방해가 될까 봐 안방에서 나오시지 않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던 태호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선생님을 찾았다. 들어올 때는 단유가 다쳤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와 미처 챙기지 못했어도, 나갈 때는 제대로 인사를 하고 나가야 보호자에게 면이라도 세울 것이 아닌가.

“아, 저희 선생님 그만두셨어요.”

“그만두셨다고? 왜?”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그럼, 너희는 어떡하고?”

“그래서 주영 누나가 다른 선생님을 찾으신다고 하셨어요.”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3주 뒤에 찾아오마. 그 전에도 내가 틈틈이 전화할게.”

“네.”

“잘 쉬고, 아, 이제 아침에 운동 못 하겠네?”

“천천히 뛰는 정도만 하고 있어요.”

“그래. 그래도 웬만하면 다 나을 때까지 무리하지 마라.”

“알겠어요.”

태호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할 때,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어, 누구?”

명수는 축구부 연습이 있어서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라고 중얼거리며 단유가 태호를 앞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라고 물으려고 하는데,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걸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단유가 놀람을 표시하기도 전에 상대의 입이 벌어졌다.

“어? 단유야! 오랜만이다. 주영이한테 듣긴 했는데, 혹시나 하고 번호를 눌러보니까 문이 열리네.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었니? 들어보니까 요즘 공부도 잘 안 한다고 들었는데, 농땡이 부리고 있는 거였어? 사춘기라 이건가? 어머? 매니저님 맞으시죠?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매니저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으셨네요? 조금 살이 찌신 건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패스하고, 혹시 단유랑 이야기하러 오셨던 거예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아니요.”

태호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요. 단유 너는 키 많이 컸다? 몸도 훨씬 좋아진 것 같고. 애들이 쑥쑥 자란다고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넌 너무 변했다야. 이제는 남자네, 남자. 그래도 공부는 계속해야 되는데, 벌써부터 놀면 나중에 고등학교 들어가서 고생할지도 몰라. 혹시 전교 1등 놓쳤다고 쇼크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 그런 거면 더 힘내서 다음 기말고사 때 전교 1등 하겠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지, 안 그래? 어머, 너랑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집을 못 봤네? 우와, 집 너무 좋다? 거실 좀 봐. 이거 예전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집 아니니? 바깥 풍경도 너무 잘 보이네? 대박이다. 이런 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했었는데 여기 너무 좋다.”

단유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약간 소리를 높여서 말을 끊었다.

“선생님.”

“여기 소파도 바뀐 거지? 예전 거···응?”

“안녕하세요.”

단유는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탓에 상대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정말 선생님은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어머, 얘 좀 봐. 야,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거 아니다? 그런 말도 있잖니?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라고. 난 아직 죽을 때가 아니거든?”

“선생님, 제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한 가지는 알겠네요.”

“뭔데?”

“선생님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

단유의 말에 선생님, 하은이 싱긋 웃었다.

“나도.”

****

태호가 떠난 뒤, 하은과 단유는 소파에 앉아서 지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은의 말이 길어질 때마다 단유는 적당히 틈을 봐서 잘랐고, 그 덕분에 두 사람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최근에 주영이랑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긴 했어.”

“그래요?”

“이래 보여도 나, 석사다?”

약 2년의 시간을 들여 공부했다는 하은은 자기가 원하는 석사 학위를 땄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슬슬 복귀 여부를 점치고 있었지.”

하은의 말에 단유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취업 못 하셔서 그냥 돌아오신 거네요?”

하은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단유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그저 미소를 지은 채 하은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종종 느낀 거지만, 넌 너무 직설적이야.”

“사람은 쉽게 변하는 건 아니라면서요?”

“그런 건 좀 변해도 돼.”

이후 명수가 집에 들어와 하은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하은의 품으로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

“그렇게 보고 싶었어?”

명수는 정말 좋았던지, 눈물을 찔끔 보일 정도였다.

“너도 명수 좀 보고 배워라.”

단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 방에 들어갈게요.”

“왜?”

“공부해야죠.”

“야, 선생님 첫 복귀일인데 그러기냐?”

“아까는 공부 좀 하라면서요?”

결국 단유는 하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셋이서 외식을 했다.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지는, 즐거운 외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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