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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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마르다고?”
“네.”
단유의 여상스러운 대답에 주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뒤에 선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 어딘가 불안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직장에서 잘릴 것을 걱정하는 것일까, 책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해서일까.
주영이 병실을 나간 뒤, 단유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으응?”
“선생님이 소문내신 거죠?”
선생님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입에서 우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어떻게 지켜온 직장인데.
“숙희가···그렇게 이야기해? 내가 소문냈다고? 아니야. 아까 말했잖아? 숙희가 그런 오해를 하긴 했는데 내가 정정해줬다고.”
“저 오늘 납치당했었어요.”
“뭐?”
“숙희라는 분과 그분의 지인이 주도하신 것 같아요. 세 사람을 고용해서 하굣길에 저를 납치했었고, 저를 빌미로 재훈이 형에게 협박하려 했던 것 같아요.”
“그, 그럼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되지 않아?”
“경찰에 신고하세요.”
“응?”
“직접 하세요.”
선생님의 두 눈이 잘게 흔들리더니,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숙희라는 분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문이 그렇게 났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연 회장님의 증손자라고.”
“아니야.”
“제가 아까 낮에 숙희라는 분의 이름을 여쭤봤을 때, 선생님은 단순히 놀라기만 하셨던 게 아니었어요. 감춘 것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표정을 지으시더라고요. 마치 지금 그 표정처럼.”
선생님은 단유의 말이 이어질수록 어쩔 줄 몰라 했다.
“예전에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선생님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좋은 친구를 만나고 사귀는 것 또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이죠. 선생님의 기준에서 친구란 어떤 의미였던 거죠?”
선생님의 표정을 읽고 있자니 조금은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단유는 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타입은 아니었다. 선생님의 조언 역시 잘 듣겠다고 대답했지만, ‘따르겠다’고 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난···몰랐어. 숙희가, 숙희가······.”
“그건 거짓말이네요.”
흠칫 놀라는 선생님을 바라보는 단유의 눈은 담담하게 선생님의 표정을 머릿속에 기록하고 분석했다.
“선생님은 숙희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물론 그분이 납치라는 범죄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겠죠. 하지만 추정컨대 선생님은 숙희라는 분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 저나 명수의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군요. 그런 이야기가 선생님에게 어떤 도움을 주길래 그랬을까요?”
선생님은 무릎에 힘이 빠져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단유가 지적하는 내용들이 모두 자신의 가슴 깊은 곳의 어느 지점을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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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은 아이들을 돌보는 게 천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천직이라는 게 반드시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과를 나온 동기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희정 역시 처음에는 보수가 많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희정이 남들보다 우수했던 것도 아니고 내세울 것도 없었던바, 매번 입사에 실패하기 일쑤였다. 결국, 희정은 역시 다른 동기들이 선택했던 것처럼 유치원 교사직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치원 교사 역시 마음처럼 쉽게 갈 수 있는 직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렵게나마 유치원 교사로 취업이 되면서 희정은 반강제로 마음 수련을 쌓게 되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쉽지 않을 거란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고는 공부하는 동안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자신이 어렸을 때는 선생님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면 그대로 따랐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 말씀을 개 풀 뜯는 소리로 착각이라도 하는지, 전혀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울화가 치미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런 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사 같은 아이’, ‘해맑은 웃음’, ‘귀여운 표정’ 등의 이미지로만 아이를 바라보는지 유치원 교사의 어려움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는 이는 동료 교사들밖에 없었다.
특히 동갑내기인 숙희가 희정을 많이 위로해주고 도움을 많이 주어서 친해진 면도 있다. 하지만 다른 동료 교사들 역시도 희정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들이 되어주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의 유치원 교사에 대한 이미지가 무너졌다. 이미지가 무너지니, 신념도 무너졌다. 직업적 만족도가 떨어지고 자긍심이 바닥을 향하지만, 자신이 배운 게 이것뿐이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했고, 점차 적응이 되니 이 일도 할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결국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니까.’
다른 직업들이 으레 그렇듯이,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직업일 뿐이었다. 그런 일에 이것저것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자긍심이니 뭐니 하는 건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무역회사에 들어간 신입사원이 ‘대한민국 수출역군의 동량(棟梁)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대신 희정은 다른 것으로 자신의 공허함을 달랬다.
“이번에 학부모가 너무 고맙다면서 이런 선물을 준 거 있지?”
“애 생일인데 학부모가 지금까지 잘 돌봐줘서 고맙다면서 이런 걸 주잖아. 계속 거절했는데도 꼭 가져가 달라고 사정을 하더라.”
‘친구’들이 부러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만족감이 들었고 뿌듯한 마음이 느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의 일을 가장 잘 이해하고, 알아주는 이들이 바로 ‘친구’들인데 그 친구들이 부러워하고 인정해주는 ‘성과’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지 않을까?
희정이 결혼을 할 때, 그 만족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어머, 신랑 너무 멋지다?”
“너희 남편이 그 회사의 부장이라며?”
“유치원 교사라서 좋다고 했다며?”
희정은 ‘친구’가 소중했고, ‘친구’가 많을수록 자신의 마음속 공터가 가득히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구한 직장이 있는데 말이야···.”
“어머, 정말? 그렇게만 일하면서 돈을 그렇게 많이 줘?”
“신랑이 좋아하겠다.”
“난 어디 그런 직장 안 구해지나?”
“우리 나이가 솔직히 애들 돌보기가 쉬운 나이는 아니잖아? 그런데 희정이 너처럼만 되면 10년은 더 일할 수도 있겠다.”
“10년이 뭐니, 20년은 더 하겠네.”
대화가 풍성(?)해질수록 희정의 만족감도 커졌다.
“이건 비밀인데···.”
“진짜? 와, 어쩐지. 그냥 돈을 주는 게 아니구나.”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안 하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해. 아무튼, 희정이 너 그쪽에 제대로 눈도장 받았구나? 나중에 애들 큰 뒤에도 계속 이 일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연씨 집안 애들만 전문적으로 돌보는 유모 같은 건가?”
“얘, 재벌가 유모라도 희정이처럼 외부에서 애들 보는 거면 정말 꿀이지. 어르신들 눈치 안 봐도 되고, 밥, 청소해주는 사람도 따로 구해주니까 이보다 좋은 직장이 어디 있겠어?”
“희정이 말년이 아주 폈다, 폈어.”
숙희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숙희의 사정을 모른 척해주는 건 기본이었다. 그런 걸 일부러 집어서 말하는 건 친구로서의 자세가 아니었으니까. 숙희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대부분 얼버무리면서 진심을 보이지 않지만, 희정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진심 어린 반응을 보여주었다. 친구가 부러워할 정도의 직장과 높은 대우를 받는 희정의 모습이 대화에 투영되면, 어쩐지 본인의 위신도 덩달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연씨 집안 증손자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떨까?”
“나중에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얘들 인성이 얼마나 착한데. 내가 또 그렇게 교육하고 있기도 하고. 애들이 똑똑하고 착해서, 마음 같아서는 평생 돌보고 싶다니까.”
“부러운 소리다, 정말.”
그런 대화의 말미에 터지던 웃음소리가 귓가에 잔향처럼 울렸다.
“선생님.”
단유의 부름에 희정이 정신을 차렸다.
“그만 하세요. 그런 식으로 현실을 피하는 건 선생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거예요.”
희정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감히 선생님한테 이따위로 말을 해? 내가 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단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지금 선생님이 느끼시는 감정, 하고 싶은 말, 하려는 행동 모두 참으세요. 어른이시잖아요. 선생님이시고.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선생님은 지금 저를 이용해서, 아니 재훈이 형을 이용해서 허세를 부렸던 거예요.”
“허, 허세라고? 허, 허세라니!”
떨림이 짙어지는 목소리에 물기가 섞인 기분이었다. 자기 귀로 들리는 자기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생님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소문을 퍼뜨리신 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물어본들 선생님이 제대로 대답을 해주실 리는 없겠죠. 예전에도 그랬듯이 선생님은 또 다른 핑계로 합리화하시려 하겠죠. 그런 건 시간 낭비니까 묻지 않을래요.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 드리죠.”
단유는 다리를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링거줄이 길게 늘어졌지만, 불편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저랑 명수는 선생님의 트로피가 아니에요.”
선생님이 아래턱을 내리고 단유를 바라볼 때, 단유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들어오세요.”
곧 병실 문이 열리고 주영이 들어왔다. 주영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누나.”
“응.”
“잘 마실게요.”
단유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주영이 어색하게 손을 뻗어 음료수를 건넸다. 달칵, 거리며 캔 입구를 딴 단유가 한 모금을 마신 후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그때까지도 선생님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지 못했고, 주영은 말없이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좀 쉬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그래.”
주영은 또각거리는 걸음으로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세요.”
선생님은 일어서지 못했다.
“누나.”
주영이 단유에게 시선을 돌리자, 침대에 엎드린 단유가 고개만 돌려 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요.”
죄를 짓지 않았다, 라는 단유의 말에 희정은 뭔가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죄’라고 명시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말 속에 숨은 칼날이 희정의 양심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주영 또한 단유의 말에서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아직은 ‘선생님’이었고, ‘죄를 짓진 않았으니’ 부디 모질게 내치지는 말라는 뜻이겠지. 조용히 보내드려 달라, 는 게 아마도 단유의 뜻일 것이다. 또한, 최근의 소문이 더 부풀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는 단유의 배려일 것이다.
“알았어.”
단유의 웃음을 보며 주영은 희정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일어나세요.”
나직하지만 단호한 주영의 명령에 희정은 엉거주춤 일어나야 했다. 주영은 희정을 부축하는 모양새로, 하지만 실은 연행에 가깝게 희정을 끌고 병실을 나갔다.
간신히 조용해진 병실에 단유는 눈을 깜빡이다 혀를 찼다.
“명수 생각을 못 했네.”
****
“어? 단유야? 선생님도 안 계시네?”
새벽에 일어난 명수가 단유의 방과 거실을 둘러보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 새벽시장에 들러 찬거리를 사서 온 이모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오늘 선생님이 안 나오신 거 같아요.”
“아, 저기 주영 아가씨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오늘 선생님 안 나오신대.”
“그래요?”
“아, 그리고 단유는 밤에 좀 아파서 병원엘 갔다네?”
“병원에요? 많이 아프대요?”
“글쎄, 그것까지는···. 전화해보면 되지 않겠니?”
그제야 휴대폰을 떠올린 명수가 자기 머리를 '탁' 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야! 괜찮아?”
로 시작된 명수의 통화는 점점 목소리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가끔 대답하는 목소리만 남았다.
“알았어. 그럴게. 그럼 학교 끝나고 갈까? 아, 그래? 알았어.”
잠시 후 통화를 끝낸 명수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주방에 나타났다.
“이모, 오늘 저녁에는 집에 아무도 없을 거니까 오지 않으셔도 된대요.”
“그래? 그럼 오늘은 아침만 해 주고 청소 좀하고 가야겠네.”
“단유가 내일까지 휴가라 생각하시고 푹 쉬시래요.”
“내일까지?”
“나중에 주영 누나가 따로 연락할 거래요.”
이모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채소를 꺼내 싱크대에 넣고 씻기 시작하셨다. 그러다가 돌아보니 명수가 식탁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운동 안 가니?”
“아, 맞다. 깜빡했어요.”
명수가 허둥지둥하며 일어나 곧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이모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시곤, 다시 채소들을 다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