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06화 (306/956)

주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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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물든 티셔츠 위를 손으로 누르고 있던 단유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상처로 인해 붉게 물든 손을 흘깃 내려다보다가 다시 한번 깊게 숨을 토해내는 단유였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가르쳐 주지는 않았겠지만, 디아트리의 호흡법은 이럴 때도 유용해서 통증을 완화하고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줄여주었다. 하지만 상처를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닌 이상 급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어깨에 난 상처가 보통은 아니었지만, 단유는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얼렁뚱땅 넘길 생각은 없었다. 단유는 도마뱀에게 찾아갔다.

“어? 너!”

도마뱀의 이야기는 더 들을 가치가 없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도마뱀을 둘러업은 뒤, 창고로 데려갔다. 갑자기 사라진 단유 때문에 정신이 없던 숙희는 정환마저 눈앞에서 사라진 이후, 창고를 빠져나가려다 뒤늦게 나타난 도마뱀에게 다시 일격을 맞고 창고에 쓰러져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단유가 창고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숙희는 이미 창고 한편에 조용히 기절해 있던 쭈꾸미, 꼬마놈과 함께 맨바닥에서 뒹굴던 중이었다.

도마뱀을 창고 바닥에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빠진 단유였다.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은 분명히 이곳으로 와서 조용히 자빠진 이들을 체포할 것이다. 어르고 달래든, 협박하고 공갈을 치든, 혐의를 드러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도 못할 경찰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두 가지 문제점이 단유의 선택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한 가지는 단유가 지나치게 많은 능력을 선보여서 경찰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또 한 가지는 경찰들에게 신고하는 것만이 최선인가 하는 단유의 마음이었다.

이제까지는 법과 경찰이라는 사회적 치안 시스템에 믿음이 있었지만, 번번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시스템이 믿을만한 것이냐는 점이었다. 애초부터 대낮에 중학생이 길에서 납치를 당했는데, 경찰들이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또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도로 위에서 폭주에 가까운 질주가 이어져 옆 차선 차량들에게 위협이 되었음에도, 그리고 이런 짓(?)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경찰과 사회 시스템에서 적절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바닥에 엎어진 이들을 보니, 참 구질구질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돈 때문에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을 납치하고, 협박하려 했다니.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예를 들어 명수였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단지 ‘구질구질’하다는 감상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겠지만, 어쩌겠는가. 솔직히 단유의 입장에서 이들은 겁 없이 달려드는 강아지보다 더 가련하고 연약한 이들인 것을.

생각난 김에 일단 다 모아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속 깊은 곳에 처박아 두었던 정환까지 다시 데리고 나왔더니, 그 황량했던 창고가 북적북적했다.

뒤죽박죽 뒤섞여서 널브러진 모습보다는 정렬시켜서 보기 좋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수고를 감수하고 한 사람씩 가지런히 눕도록 했다.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려서 바르게 눕혔더니 보기가 좋았다. 네 남자와 한 여자를 창고 바닥에 눕혀둔 뒤, 단유는 창고를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는 자작나무들이 참 많은 것 같았다. 단유가 많이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던 나무들이 소나무나 전나무였던 것을 떠올리면 이 산의 식생이 조금 독특한 것이리라. 단유는 정환이 짚어보던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에 손을 가져갔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큰 나무―이름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크다는 인상만 주었던 나무―의 껍질을 벗겨 땔감으로 쓰곤 했었는데.

정환은 이 나무를 짚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유는 뒤돌아 창고를 바라보았다. 다들 몸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지만, 그들의 진체(眞體)는 이세계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두면 거기서 죽든, 여기서 말라죽든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자기 손으로 직접 하느냐, 시간에 맡기느냐의 차이만 있지 결국 단유가 이들을 죽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냐고?’

단유는 스스로에게 묻고는 피식 웃었다. 이미 예전에도 살인(殺人)은 했다. 새삼스럽게 도덕감, 죄책감을 떠올릴 이유는 없었다. 명분과 핑계가 모두 단유에게 있으니, 꺼릴 이유가 없었다.

****

거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숙희는 달리고 또 달렸다. 뒤에서 달려오는 짐승의 구린내가 바로 뒤에 임박한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기가 두려웠다.

“살려줘!”

있는 힘을 다 짜내서 소리를 쳐 봤지만, 앞서 달리는 사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기 몸을 유린할 때도 거침이 없더니, 버리고 도망갈 때도 주저함이 없는 새끼들이었다.

“제발!”

숙희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은 도마뱀을 비롯한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눈을 떴던 유령마을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처음 유령마을에서 눈을 뜬 꼬마놈이 멍청하게 마을 공터에 앉아서 다리를 떨고 있을 때, 쭈꾸미가 찾아왔다. 쭈꾸미와 꼬마놈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봤지만, 도저히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벌거벗은 몸뚱어리를 가리기 위해 집집을 돌아다녀 봐도 다 헤진 넝마 외에는 입을만한 옷이 없었다. 결국, 넝마로 허리 아래만 간신히 가릴 수 있게 두르고는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만약 꼬마놈이 생긴 것 답지 않게―꼬마놈의 외형만 보면 장발에 락을 좋아하는 도시 불량배처럼 보였다―시골 생활이 익숙했던 것인지, 식용 구근류 식물을 구해와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마을 안팎을 오가며 지리를 익힐 때, 마치 마술처럼 마을 공터에 숙희가 나타났다. 숙희 역시 처음에는 어딘지 몰라 헤맸고, 당황하다, 두 남자를 만났다. 숙희는 남자 둘의 도움을 받아 천조각으로 위아래를 겨우 가릴 수 있었지만, 펑퍼짐한 엉덩이가 노출되는 것은 구할 수 있는 재료의 한계상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정환이 나타나고부터였다. 정환은 신경질적으로 마을을 부수고 다녔다. 좀처럼 폭력적인 모습을 보지 못했던 숙희는 두려운 마음에 다가가지 못했고, 두 남자는 정환이 매우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알고 가까이 가지 않았다.

정환이 화풀이를 끝내고 사람들을 모았다.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한국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다. 어쩌면 북한의 어느 구석진 시골 동네일 수도 있었다. 정환은 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이곳에 오게 된 날짜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날짜의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유가 분명 마지막에 ‘놀러 갈게요’라고 자신에게 건넸던 말을 떠올려보면,

‘그 빌어먹을 놈이 이곳에 올 때가 기회다.’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정환은 생각을 고쳐야만 했는데, 주변에 먹을 것이 없었던 탓이었다. 다 낡아 쓰러지기 직전인 집터는 물론이고, 밤이 되면 정체가 유추되지 않는 들짐승의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하루 뒤, 도마뱀이 나타나면서 네 사람은 더욱 곤궁해졌다. 꼬마놈이 구해오는 조그만 식물 뿌리만 가지고 끼니를 잇는 것도 한계였던지라, 결국 다른 마을을 찾아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나도 데려가!”

숙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짐덩어리에 불과해서 정환은 신경쓰고 싶지 않았지만, 꼬마놈과 쭈꾸미가 반대했다.

“어디든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

어지간하면 꼬마놈과 쭈꾸미도 버리고 따로 행동하고 싶다는 것이 정환이 속내였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두 남자의 힘은 쓰임이 많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걱정스러운 것은 두 사람의 멘탈이었는데, 정환이 오기 전부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정신적으로 불안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급기야는 다 늙어빠진 여자를 겁탈하기에 이르렀다. 고작 일주일 만에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두 남자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계륵이라 생각하며 정환은 마을을 떠날 채비를 했다.

꼬마놈과 쭈꾸미가 주변 정찰을 꾸준히 했던 덕분에 다섯 사람은 들판 쪽으로 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어두운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꺼려졌던 탓이었다. 널찍한 들판을 지나자 가파른 산길이 유난히 불길해 보이는 산이 가로막았다.

도마뱀이 허리를 두른 넝마 아래로 손을 넣고 그곳을 긁어대면서 말했다.

“저긴 좀 위험하지 않을까?”

도마뱀도 다른 두 놈처럼 불안증세를 보이는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마치 틱 장애라도 있는 사람처럼,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다리를 심하게 떤다거나 피부가 붉어져 피가 나기 직전에 이를 때까지 긁는 모습이 관찰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기에 있을 순 없잖아.”

정환이 가리킨 들판에는 정말 풀만 자랄 뿐, 먹을 수 있는 과실수 따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환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넘어지고 발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산길을 올랐다. 부디 산 너머에 인적이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다섯 사람은 사람 대신 산짐승을 만났다. 늑대도 아니고 개도 아닌, 하지만 그 어딘가 비슷해 보이는 외형에 덩치는 성인 남성 이상인 짐승이 침을 흘리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고 싶어 떠난 길이 짐승의 아가리에서 끝이 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다섯 사람은 짐승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다섯 사람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는 정환이었다. 곧 여자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정환은 여자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계속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짐승이 고작 여자 한 명에게 만족하여 걸음을 멈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한 마리뿐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정환은 흩어진 다른 남자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으나, 이를 위해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발길이 닿는 대로 산에서 내려가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고, 모자란 녀석들이지만 부디 그들도 자신처럼 생각해주길 바랐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쭈꾸미’의 비명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 누구라고 단정 짓기 어려웠다. 처절하고 고통에 가득 찬 비명소리가 아스라이 들리는 가운데 정환은 잠시 느려졌던 뜀박질에 힘을 더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공포? 우습다. 이제껏 공포의 대상으로 만약 상을 받는다면 대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우수주연상은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활약했던 정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해자에서 피해자가 되어 도망을 쳐야 하는 운명이라니.

정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살아남아서 그놈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말리라 다짐했다.

이틀 뒤, 그 산을 빠져나온 이는 정환 뿐이었다.

****

단유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기로 했다. 경찰을 믿을 수 없고, 자신의 능력이 노출되는 것과 더불어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기 선에서 해결 가능했던 문제이니 이대로 덮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다만 한 가지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실은 이 문제 때문에 더 고민하고 결정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이와 자신의 선에서 해결을 보기로 한 이상, 그 문제도 자기 손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컴컴한 거실에 홀로 앉아 있는 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안 돌아가셨네요?”

“어? 언제 왔어? 들어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선생님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단유에게 달려왔다.

“어머, 너 이거 왜 이래? 다쳤어?”

단유는 선생님의 호들갑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행동했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돼, 이건! 도대체 어떻게 다친 거길래, 아니 이제껏 뭐하다가 이렇게 된 거야?”

선생님은 서둘러 외투를 챙겨 들고 나와 단유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단유는 말없이 선생님을 따랐다.

병원에서는 깊은 자상이 난 이유를 물었다. 당직 의사는 깊은 상처기 때문에 당장 봉합수술과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영 누나 불러주실래요?”

단유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뭐?”

선생님이 되묻자, 단유는 다른 말 없이 주영을 불러달란 말만 했다. 그때까지도 왜 다쳤는지, 말을 하지 않던 단유였기에 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유가 핸드폰을 꺼내 들자, 자기가 하겠다며 선생님은 뒤돌아섰다.

잠시 후, 주영이 헐레벌떡 응급실로 찾아왔다.

“어떻게 된 거야!”

단유는 싱긋 웃으며, 조금 다쳤다고 말했다.

“조금 다친 게 아니잖아? 무슨 일이야? 깡패라도 만났던 거니? 아니면 누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한 거야?”

“죄송해요. 늦은 시간에 불러서.”

“죄송하면 다치지를 말았어야지, 이게 무슨 일이야. 선생님, 선생님은 뭘 하셨길래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연락 한 번 없으셨던 거예요?”

갑은 주영이었고, 을이었던 선생님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응급 처치를 받고 1인실로 이동된 단유는 걱정스런 얼굴을 한 주영과 선생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누나.”

“응?”

“저 목이 좀 마른 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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