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05화 (305/956)

주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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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은 다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린 단유에게 다가갔다.

“넌 2가지 실수를 했어. 한 가지는 니 능력을 나한테 보여준 것. 솔직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능력이 있는 걸 아는데 멍청하게 당할 리 없잖아?”

단유는 정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정환은 별다른 악의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칼을 집어 던져 상해를 입히고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니. 예전 감옥에서 고문을 받을 때도 이런 사람은 없었다.

“또 한 가지는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는 거지. 멍청하게도 말이야. 이왕 도망쳤다면 아주 멀리 도망이나 갈 것이지, 왜 다시 돌아왔을까?”

놀리는 듯한 말투에 담긴 순수한 즐거움이 너무 아이러니라 느꼈다. 달빛에 비친 하얀 얼굴과 그 얼굴에 떠오른 선한 미소만큼이나 역설적이었다.

“호기심. 그게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파멸에 이르게도 하지. 그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넌 모를 거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정환은 몰라서 묻냐는 식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돈 때문에 납치극을 벌였던 것 아닌가요?”

“맞아.”

싱긋 웃는 정환에게 단유가 통증을 참으며 되물었다.

“지금 아저씨가 보이는 모습은 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그게 중요해? 돈이라도 줄 테니까 살려달라고 빌 셈이야?”

단유가 답을 하지 않자, 정환은 그게 답이라고 생각했던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단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단유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사실 이렇게 잡담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데 말이야.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하지? 난 별로 꿈꾸며 사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정환은 단유의 어깨에 꽂힌 칼을 거칠게 뽑아냈다. 단유가 신음을 내며 얼굴을 찡그릴 때, 정환은 사정없이 칼을 내리그었다.

****

비록 단유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하지만, ‘사람’에 대해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예전의 단유는 ‘사람’을 경계의 대상으로만 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나이부터 혼자가 되었고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했던 단유로서는 주위의 모든 것이 두렵고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었을 터였다.

게다가 보육원 뒷산에서 동인과 마주했던 경험부터 시작해서, 학교에서 맞닥뜨렸던 다양한 종류의 악동들과 악의를 품은 어른들의 저열함, 저 세계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 위기들을 통해 단유로 하여금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보다 멀리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사람’을 관찰하면서 ‘관심’을 두게 되었다.

단순히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으니, 과거 만났던 인물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그들의 행동, 행적들을 돌이켜보는 작업도 수행했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금 눈앞의 정환은 지금껏 만난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동인’과 ‘제윅’이 보여주었던 잔인함이 정환에게도 있었지만, ‘동인’처럼 악의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제윅’처럼 계산적이지도 않았다.

표정은 선하지만, 마음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하지만 상대를 향해 악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하는 행동과 말은 악의(惡意) 그 이상의 악(惡)을 드러낸다.

만약 시간이 넉넉하고, 단유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다면 좀 더 긴 시간을 대화에 할애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환은 대화보다 더 효율적인 행위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고, 불행히도 그 행위는 단유의 상해로 이어졌다.

정환이 지금 자신의 어깨에서 뽑은 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훤히 눈에 보이는 판국에도 단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습게도 아주 오래전 들었던 조언이었다.

“대화로 해결해.”

인간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조정하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던 기웅의 말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말을 잘 지켰던가, 떠올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말이 어떤 주문(呪文)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해결책이 ‘대화’라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또 매번 느끼는 것은 ‘대화’가 늘 최선의 방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단유에겐 그랬다. 대화의 끝에서는 대부분, 정환의 경우처럼, 제윅의 경우처럼, 또 여러 경우에서 겪었던 것처럼, 무력이 행사되고 자신은 그 무력이 투사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었다.

“넌 감히 그 가벼운 혀를 놀려 우리를 장난감처럼 다루려 하였구나.”

근위대 대장이 자신을 향해 칼날을 드리우며 했던 말이었다.

결론적으로 대화는 자신이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상대 역시 자신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바탕이 되어야만 진실한 ‘대화’가 될 뿐, 그렇지 않고서는 오히려 갈등만 더 조장될 뿐이었다.

단유는 조금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거나, 혹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놓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단유가 대화 테이블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서 떠들어봐야 상대가 맞은편에 앉지 않으면 대화는 없었다.

****

정환이 내려그은 칼은 그대로 땅바닥에 꽂혔다. 즉시 정환이 시선을 빠르게 돌려 주변을 훑었다. 어리석은 꼬마 아이는 자신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호기심이 강한 녀석은 늘 그런 식으로 자기 명을 재촉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 명을 끊어주는 수고를 여러 번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능력이 궁금하지 않냐, 고 누가 묻는다면 정환은 당당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궁금하다. 하지만 내 능력이 아닌 것을 탐내지 않는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다 추락한 사람들 역시 수두룩하게 보았다. 이 세상에서 탐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돈이었다. 오직 돈만이 자유롭게 손과 손을 오가며 돌아다닐 수 있는 재화였고, 능력이었다. 그깟 순간 이동 쯤이야, 과거 과학이 발전되지 않은 시대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런 순간 이동은 하나도 부럽지 않은 시대였다. 그것보다는 값비싼 롤스로이스 세단을 타고 운전수를 부리며 이동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 일등석에 올라타서 승무원의 접대를 받으며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편하고 좋다.

그러니 꼬마의 능력은 부럽지도 않았고, 탐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아이의 능력을 알게 되었으니 좋은 점은 하나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정환은 그걸로 충분했다.

“어디 갔니? 도망갔니? 도망가면 안 될 텐데?”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너 친구 있다며? 명수라던가? 걔는 어쩌려고 그러나?”

정환은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가 길게 찢어져 광대뼈를 찌를 정도로 올라갔다. 정환은 맞은편에 나타난 단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친구 걱정은 조금 되나 봐?”

“아저씨.”

단유는 담담하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어깨에 당한 상처에서 오는 통증은 쉽게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

“아저씨, 혹시 친구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없는데?”

능글대는 정환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렇구나.”

“뭐가?”

“아저씨가 왜 다른 사람과 다른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아요.”

정환의 눈이 호기심을 띠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달라?”

“많이 다르네요.”

“어떻게 다른데?”

정환은 말을 잇는 순간에도 칼을 천천히 고쳐잡았다. 멍청한 꼬마는 또 같은 패턴에 당할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거리를 좁히자.

“말을 듣는 척만 하시지, 실제로는 들을 생각을 하지 않으시잖아요?”

정환이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을 때, 단유가 말을 이었다.

“친구나 다른 사람과 대화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경청을 하게 되는데, 아저씨는 그런 게 없잖아요? 듣는 척만 하죠. 그래서야 상대방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아마 아저씨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가식이고 꾸며진 표정과 말로 이루어진 거죠.”

정환의 눈이 꿈틀거렸다. 정환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단유는 느꼈다.

“아저씨는 줄곧 혼자였을 거예요. 사람을 죽였다고요? 호기심 때문에? 아마 아저씨는 상대를 이해할 방법이 그것뿐이었던 거겠죠? 상대의 뱃속을 헤집고, 칼로 상처를 주면서 비명을 듣고, 그 비명을 통해 상대가 가진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는 방식이요.”

정환이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그 비슷한 경우를 어릴 때 봤어요. 주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 달리는 것, 앞의 놓인 것을 부수는 것, 그리고 벽 뒤에 숨은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행동하던 놈을요. 우리는 그놈을 몬스터라고 불렀어요.”

“이 새끼가.”

“몬스터는 몬스터로 대우했어야 하는데.”

정환은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들어 단유에게로 향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지만, 이미 단유는 그 거리에 없었다. 정환이 몸을 틀고 다시 다른 방향에 나타난 단유에게로 달려드려 할 때, 정환의 몸은 위로 떠올랐다. 아니, 위로 떠올랐다기보다는 위로 ‘이동’했다.

정환은 당황하지 않았다. 몸이 아래로 떨어질 때도 시선은 단유에게로 향했고, 단유의 몸에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칼침 한 방만 놓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단유는 그런 기회를 선사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단유와 싸움이 되지 않는 상대였다. 솔직히 단유 본인도 자신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그 힘을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에 대해 억누르고 있었던 점이 있었기에 비등한, 아니 단유 본인이 상해를 입는 순간에까지 이르렀던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그런 억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정환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단유는 주변을 훑으며 적당한 물건을 찾았다. 그러다 다시 정환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 정환과 눈이 마주쳤다.

“새끼.”

바닥에 떨어질 때, 용케도 몸을 굴러 부상을 최소화시킨 정환이 구르는 동작에 연계해서 몸을 일으킨 뒤 단유를 향해 달리며 손에 쥔 칼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 했는데, 손안이 허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의 원인을 알아차리려 하는 찰나, 맞은 편에 선 단유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유가 칼을 집어 던지자, 정환은 옆으로 몸을 틀면서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 덕에 세차게 날아가던 칼은 허무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다시 정환이 일어나 단유에게로 달려갈 때, 그리고 정확히 세 걸음 앞에 두었을 때, 정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동시에 단유는 빗나갔던 칼을 다시 손에 쥐고 정환에게 집어 던졌다.

노리고 던졌을까? 정환이 황급히 피하려 했지만 날아온 칼이 생각보다 빠르고 강했다. 칼은 정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한 통증이 이어졌고, 공중에 핏방울이 튀었다. 꽤 깊이 스친 까닭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벌어졌다. 붙잡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뭉클 솟아났다.

“이 새끼···.”

정환의 붉어진 얼굴이 단유를 향할 때, 단유의 손에는 다시 칼이 들려 있었다.

“니가··· 그걸로 뭘 할 건데?”

“예전에 야생동물 가죽 벗기는 걸 배우긴 했는데, 그렇다고 아저씨 가죽을 벗길 수는 없잖아요?”

“웃기시네.”

“아저씨.”

“······.”

“앞으로는 착하게 사세요.”

“뭐?”

“가끔 생각나면 놀러갈게요.”

단유는 뒤로 돌았다. 그리고 곧 모습을 감췄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하늘 높이 뜬 달빛이 내려와 바닥에 점점이 찍힌 핏방울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핏방울만 보일 뿐, 그 어디에도 정환의 모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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