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04화 (304/956)

주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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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나무줄기가 달빛에 어스레하게 보이는 자작나무들을 바라보는 정환은 태연하게만 보였다. 갑작스러운 ‘이동’으로 정신을 살짝 잃었을 테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정신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인 정환이었다.

“우습군.”

정환의 태도, 눈빛, 표정, 말에 담긴 감정 등을 종합하여 살피던 단유는 순수하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대단하시네요?”

“뭐가?”

마주 선 단유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정환은, 마치 계속 이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턱을 살짝 치들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다리라도 떨면서 엎어져야 당연했던 건가?”

그 말은 지금 정환이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임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마뱀처럼 경계하는 눈길을 보내지도 않았고, 꼬마놈처럼 단유에게 미쳐서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쭈꾸미처럼 두려움에 덜덜 떠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단유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조금은 놀라실 줄 알았는데 전혀 놀라는 모습이 아니라서요.”

단유가 뱉은 말의 어디가 웃겼는지, 정환은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로?”

단유가 눈에 의아함을 품자 정환은 천천히 몸을 돌려 자작나무들을 향해 다가가 손으로 하얀 껍질들을 쓰다듬었다. 정환의 걸음마다 부스럭거리며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파문(波紋)이 번지듯 울려 퍼졌다. 말없이 여유를 부리는 태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단유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왜 절 납치하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저 사람의 본 모습 혹은 성격이 관찰되리라. 정환은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잠시 단유를 흘깃 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하얀 자작나무들을 하나씩 훑어보고 만져보는 여유를 부리다 단유가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하나, 고민할 때 입을 열었다.

“니가 연성그룹 연회장의 숨겨진 핏줄이라는 소문이 있었지.”

이미 쭈꾸미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역시 돈이 목적이었던 거구나. 돈만 되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도 납치할 수 있고, 죽일 수도 있구나, 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려는데 정환의 말이 이어졌다.

“난 그 말을 안 믿었어.”

정환은 나무 중간쯤에 난 작은 잔가지 하나를 꺾어 집어 들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야. 무려 연회장의 숨겨진 자식을 고작 막내 손자의 손에 맡겨서 숨긴다? 말이 안 되거든. 어디 외국에 숨겨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지방에 숨겨놓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정환이 가지를 살랑 흔들며 웃었다. 묘한 의미가 담긴 미소, 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내가 아는 어떤 부잣집에서는 말이야, 며느리와 사통(私通)해서 낳은 아이를 제주도로 보냈대. 제주도에 좋은 국제학교가 있는데, 거기가 사람들 시선이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하더라고. 비록 불륜이라도 핏줄인데 그냥 버릴 수가 없으니 잘 먹고 잘살게 해주자는 의미에서 그랬다더라. 일개 부잣집도 그렇게 하는데, 무려 연성 그룹의 연 회장이 이렇게 허술하게 둔다? 말이 안 되지.”

“그런가요?”

그런 쪽으로는 들은 바도 없고, 아는 바도 없었기에 단유로서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에 두고 관리를 하는 아이, 라고는 생각했지. 어떤 이유에선지 더 가까이 둘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게 두고 후원이라는 방식으로 가까이 두어야 하는 아이. 과연 그 이유가 뭘까 궁금했었지.”

정환이 손에 든 가지의 끝이 단유를 향했다.

“이 정도 능력이 있으니까, 연회장이 너를 키우려 했던 거겠지.”

단유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과대포장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과소평가할 수도 없었다. 과연 이 세상에 자신과 같은, 혹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마법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인데. 그렇지만 정환은 ‘능력’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너무 억지 아닌가요? 게다가 전 연 회장님이란 분이랑 전혀 관련이 없는데요.”

“그건 네 이야기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야기하는 법이니까. 수많은 증거를 제시해도 나 모른다, 난 죄 없다 말하는 거 못 봤어? 니가 부정한다 해도 드러난 정황만 살피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저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 건가요?”

물어보는 단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두려움? 아니, 그것은 긴장이라기보다는 기대감이라고 해야 옳겠다. 정환은 단유의 의도를 읽었는지 또 한 번 코웃음을 쳤다.

“설마. 이런 능력을 쓰는 사람이 많았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갈 리가 있겠어? 그리고 난 음모론자가 아니야.”

“그럼, 왜 아저씬 놀라지 않으셨던 거죠? 마치 예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아까도 말했지만, 니가 보통의 평범한 아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고, 분명히 재벌가에서 탐낼만한 재능이나 능력은 있을 거로 추정하고 있었으니까.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냥 똑똑한 정도로는 재벌가에서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의 천재라도 된다면 모를까. 그런데 이런 능력을 가진 이라면 재벌에서 탐을 내고 소중히 할 만하다고 생각되는데?”

정환이 천천히 단유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 놀라지 않은 건 아니야. 이런 일을 벌이는데 놀라지 않을 리가 있겠어? 다만 크게 놀랄 정도의 일은 아니란 거지.”

“그럼 아저씨의 기준에서 놀랄 일이란 건 어느 정도인 거죠?”

어느새 단유와 두 걸음 정도로 가까워진 정환이 단유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굽혔다.

“놀랄 일이라. 예전에 말이야, 어렸을 때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사람은 정말 쉽게 죽지 않는구나. 총을 맞아도 유언을 남길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고, 배에 칼을 맞아도 잘 누르고만 있으면 또 얼마든지 살아나는구나. 그런데 그건 영화니까, 과연 실제로도 그럴까, 궁금했지.”

눈앞에서 바라보는 정환의 눈빛은 이제껏 봐왔던 이들의 그것과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새까만 눈동자. 짙은 검은색으로 꽉 채워진 눈동자에 다른 어떤 의미도 읽을 수 없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는 ‘악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총을 구할 수만 있었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총을 구하는 건 쉽지 않더라고. 그래서 칼로 실험을 했었지. 뱃속에다 깊숙이 찔러넣었더니, 어떤 줄 알아? 핏줄이 선 눈으로 나를 보며 부들부들 떨다가 죽어. 유언? 말할 힘도 없어 보이더라. 물론 내가 좀 힘이 과하게 썼는지 배를 좀 많이 헤집어 엎긴 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배에 칼이 들어오고도 말할 힘을 내는 사람은 별로 없더란 사실이지. 비명도 크게 못 지르더라고. 몇 번 더 해봐도 결과는 같았어.”

정환은 즐겁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웃지 않았고, 오로지 단유의 눈동자만을 직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사람이 15층 높이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걸 봤어. 보통 사람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즉사한다고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그 사람, 안 죽더라고. 시멘트로 포장된 길 위에 떨어져서 머리가 깨지고 뇌수가 흘러나오는데, 바로 안 죽더라고? 10초? 그 정도를 숨을 쉬더라고? 나를 보면서 살려달라고 손까지 들어 올리더라니까? 생각해보니 그 순간이 아마 내가 가장 놀랐던 순간이 아닌가 싶어.”

단유는 어쩐지 정환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확률적으로 사람이 아파트 15층 높이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진다면 즉사할 가능성이 거의 99%일 것이다. 단 1%, 아니 그보다 더 작은 확률로 정환이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지는 몰라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1% 미만의 확률을 가진 사건을 접할 때, 사람은 놀라게 된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다음 놀랐던 순간이 아마, 10년 전 만났던 여자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정환이 허리를 펴며 처음과 같은 자세로, 단유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는 손에서 불을 만들어내는 여자였어.”

단유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 반응이 정환을 즐겁게 했던 모양인지, 정환이 이를 드러내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해. 일이 끝나고 집에 가던 무렵,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불이 없는 거야. 주머니를 뒤져도 라이터가 나오지 않아서 담배를 버려야 하나, 하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한 여자가 나와 나를 보며 싱긋 웃더니 그러더라고. 불, 필요하세요, 라고.”

단유는 몸이 움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환이 여자를 언급하는 순간, 그가 처음으로 드러낸 감정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맨손에서 갑자기 불을 피어 올리는 거야. 난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지. 그랬더니 그 여자가 웃으면서 내 입에 물렸던 담배를 빼더니 자기 입에 대고 불을 붙이더라고. 그리고 한 모금을 빨아서 연기를 뱉고는 다시 내 입에 담배를 물려주더군.”

“그래서요?”

“고맙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졌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 여자 뒤를 쫓았지만, 더는 그 여자를 볼 수 없었다.”

여전히 정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판가름하기에는 정환이 드러내는 정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방금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정환이 만난 여자는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그다음부터는 이 세상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혹은 나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인간들이 존재할 거라고 믿게 되었지. 손에서 불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봤는데,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지 않겠어?”

정환이 다시 한 걸음 더 다가와 다시 허리를 숙이니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너처럼 말이야.”

단유는 얼른 한 발을 뒤로 빼며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살짝 스친 것인지 목에 가느다란 줄이 생겼고, 그 줄에서 붉은 피가 몽글 솟아났다.

“어떻게 알았어?”

단유는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을 보니 붉은 피가 묻어나 있었다. 다시 앞으로 보니 정환의 손에는 잔가지 대신 날카로운 접이식 칼이 하나 들려 있었다. 정환은 선한 웃음을 지으며 야구공 저글링을 하듯, 칼을 위로 던졌다 받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여자 이야기를 하실 때, 아저씨가 적개심을 보이셨잖아요?”

“적개심? 내가? 이런 실수 했구만.”

정환은 칼을 든 손을 들어 머리를 긁었다. 어지간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정환이었건만, 여자를 언급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단유가 움찔할 만큼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냈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다 해도 단유는 그 적개심을 알아채고 경계심을 높였던 것이다.

“내가 그 여자를 만나고 느낀 게 있는데 말이야.”

정환이 왼쪽 다리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거리를 좁혀왔다.

“하나는 방심하지 말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선제공격이 답이라는 거야. 너희 같은 녀석들은 틈을 주면 안 되더라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정환의 손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곧게 날아온 칼은 살짝 궤도가 비틀리며 마치 종이를 그어 내리듯 비스듬히 단유의 볼 아래를 스쳤다. 하지만 단유 역시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뒤, 정환의 뒤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마치 자기 뒤에 설 것을 알았던 것이지, 단유가 사라짐과 동시에 뒤쪽으로 시선을 재빨리 던진 정환은 단유가 다른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칼을 집어 던졌다. 칼을 집어 던질 거라는 옵션을 예상하지 못했기도 하거니와 너무나도 빨랐던 탓에 단유는 칼을 제대로 피할 수 없었다. 칼을 인식하는 즉시 자리를 옮겼음에 불구, 오른쪽 어깨에 깊게 틀어박힌 칼날이 화끈거리는 통증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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