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user(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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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숙희 부부네에서는 싸움이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게는 되었지만, 전에 살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한 곳이 되었다. 숙희는 점점 쌓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화’가 아니라 ‘우울증’이라고 해야 옳겠다.
우울하고 짜증 나고 화가 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아이 우는 소리만 들으면 손이 먼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숙희의 속도 모르고 동료 교사들과 원장 선생님은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숙희쌤, 이번에 애들 장기 자랑하는 거 잘 준비해 주세요. 작년처럼 준비하시면, 학부모들한테 또 클레임 들어올지도 모르잖아요. 아시겠죠?”
내가 지금 애들 장기자랑 준비물이나 챙길 정신이 있을 거 같아?
“쌤. 애들 점심식사 지도 좀 잘해 주세요. 어제 잔반이 제일 많이 나왔다고 주방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던데.”
애들이 먹기 싫다고 숟가락을 내던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먹여?
“쌤, 취침시간에 애들이 장난치지 않게 해주세요. 다른 반 아이들까지 잠을 잘 자지 못하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아이가 밥을 먹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라고 했으면 좋겠지만, 애가 밥을 안 먹으면 학부모에게 항의가 들어온다. 어떻게든 밥을 먹여야 했다.
“먹어.”
싫다고 떼를 쓰는 애를 앞에 앉혀 놓고 숟가락을 들게 시켰다. 아이는 핑크빛 볼을 부풀리며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가만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니가 어쩔 건데?’
라고 놀리는 표정 같았다. 숙희는 큰 소리로 숟가락을 들라고 명령했다. 너무 큰 소리에 놀랐는지, 애가 겁을 먹었지만, 숙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숙희의 눈에는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떼를 쓰는 아이만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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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가 정환을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환을 만나기 전, 숙희는 작은 식당에서 식당보조로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신세였다. 식당보조지만 혼자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식당보조라서 다행인 점도 있었다. 뉴스에 자신의 얼굴이 나온 적도 없는데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폭력 교사’, ‘무정한 교사’, ‘인면수심’ 따위의 수식어로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힘들었던 숙희는 사람들과 많이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주방 보조로서 식재료를 다듬거나 설거지를 하는 일이 편했다. 일이 끝나면 손가락 끝이 퉁퉁 부어있을 뿐만 아니라, 손등에 공기라도 집어넣은 듯 부풀어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먹고 살려면 이 정도 고통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을 마치면 자정이 다 되어갔다. 어둠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면 어둡고 차가운 임대 아파트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이혼했을 당시에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이 차가운 공기가 점점 익숙해지고 또 편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지겨운 아이들을 보지 않아서 또 잘 된 것 같기도 했다.
‘원래 어린이집 같은 건 그만두려고 했었잖아.’
예전에는 가끔 집에 돌아와 빈 소파 위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으면, 자신의 두 아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두 해 연락이 닿지 않고, 어쩌다 연락이 닿아도 전 남편에게 모진 소리를 들으며 통화가 끊어지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이제는 전화도 하지 않게 되었다.
신기한 점은 그토록 심하게 앓던 ‘우울증’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우울하지는 않았다. 가끔 기분이 다운되긴 해도, 우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자신의 삶이 비참하다고 느끼긴 해도, 그저 스쳐 가는 생각일 뿐이었다.
‘난 원래 자유롭게 살아야 할 운명이었던 거야.’
숙희는 정신승리로 극복했다.
그렇지만, 숙희는 가끔씩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외로움을 해소하고 싶은 생각에 친한 이들에게 연락했다. 대부분은 숙희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더러 숙희의 사정을 모르는 이가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연락해서 허세를 떨며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음을 지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중 한 명이 ‘희정’이었다.
“그래, 언제 한 번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
―난 시간 많으니까, 언제든지 전화해.
‘희정’과 전화를 하면 기분이 참 좋았다. 얼마나 기분이 좋으냐면, ‘희정’을 상대로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욕을 퍼부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다.
“씨발년. 옛날에는 애들 옷 하나 입히지 못해서 덤벙대던 게, 맨날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던 년이 운 좋게 좋은 직장 잡았다고 쪼개기는.”
숙희는 설거지하면서도 중얼거렸고, 그렇게 중얼거릴 때마다 조금씩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끔 숙희는 주방일을 보는 아주머니들과 식당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런데 자기가 요즘 맨날 말하는 걔 있잖아?”
“누구요?”
“왜 맨날 욕하는 애 있잖아?”
“아.”
“도대체 걔가 뭘 잘못했길래 그렇게 욕을 해?”
“다 들었어요?”
“어머, 자기가 중얼대는 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보다 더 큰 거 몰라?”
“창피하게, 그러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자기가 너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아무튼, 무슨 일이길래 그래?”
자고로 뒷담화란 여러 사람을 두고 해야 재밌는 법이라. 숙희는 ‘희정’이 얼마나 재수 없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이었는지를 설명했고, 그런 애가 재수 좋게도 ‘연성 그룹’의 핏줄을 돌보는 일을 맡으면서, 팔자가 폈다고 이야기했다.
“어머, 진짜?”
“진짜. 걔가 거기서 뭐 하는지 알아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아침에 가서 애들 등교하는 거 도와주고, 하루종일 놀다가 애들 돌아오면 그거 확인하고 애들 자는 거까지만 보고 퇴근하는 게 일이래요.”
“선생이라며? 그럼 뭐 가르치는 게 있을 거 아냐?”
숙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술잔을 꺾었다.
“크,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가르쳐요. 그냥 앉아있다가 나온다니깐요. 그런데 그런 일 하면서 얼마 받는지 알아요? 무려 500만 원을 받는다니까.”
“어매, 그렇게나 많이?”
“진짜 줄 잘 잡아야 한다는 게 걔를 보면서 느낀다니깐요. 걔가 일한 지가 이제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저기 강남 논현동에 집을 샀대요.”
하루 12시간 이상을 꼬박 일하고도 월 200만 원을 받기 힘든 주방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500만 원을 받고, 집을 샀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욕하기 딱 좋은 대상이랄까?
“진짜 세상 불공평하다는 게 이런 거야. 이런 세상 확 뒤집혀야 하는 거 아냐?”
“윗대가리들이 다 한통속인데 바뀌긴 뭐가 바뀌어? 백날을 촛불 들고, 태극기 흔들어봐라. 세상이 바뀌나. 바뀌어도 지네들만 바뀌지, 우리 같은 서민들은 그냥 죽어 나가는 거야. 지들이 우리한테 눈곱만큼의 관심이라도 있어 봐. 우리가 이렇게 살겠냐고.”
“거, 선거 때만 TV에 나와 가지고 다 같이 살기 좋은 세상, 막 이러는데 내가 막 화가 나서 뭐라도 집어던질 뻔했다니까.”
“이러니까,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옛날에 우리 얼마나 먹고살기 힘들었어? 그런데 대통령이 손가락질 한 번 하니까 나라가 뒤집히고 세상이 뒤집혔잖아? 그 덕에 다 잘 먹고 잘사는 거 아냐? 요즘 젊은것들은 그런 고마운 걸 모르고 말이야.”
갑자기 어디서부터 정치 이야기로 변질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편하게 욕할 대상만 있다면야. 아줌마들의 수다가 이어질수록 뒷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맞은 편 사람이 말리는 일이 있었지만, 아줌마들은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눈곱만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수다에 집중했다.
그리고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파란 와이셔츠의 잘생긴 남자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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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이 그 소문을 들은 것은 사실 포장마차가 처음은 아니었다.
“언니, 그 이야기 들었어?”
“뭐?”
“연성 그룹의 막내 손자 있잖아?”
“의사한다는 애?”
“걔한테 숨겨진 애가 있다네?”
“걔가? 그런데 개한테 숨겨진 애가 있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걔는 어차피 상속 서열에서 밀리지 않나?”
“그게 모르는 일이라는 게, 지금 연성의 연회장이 제일 아끼는 손자가 그 애라잖아.”
“그거 나도 들었는데, 그거 다 의미 없어. 이미 실권은 연병호한테 넘어갔다며. 연병호는 지 아들 중에서 막내아들을 제일 싫어해서 거의 연을 끊고 산다며?”
“그래도 아직은 연회장이 살아 있는데, 연병호 사장 마음대로 내칠 수야 있겠어? 그런 데다가 숨겨진 애가 있다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딱 그림이 안 그려져?”
“무슨 그림?”
“연회장이 아끼지만, 연병호 사장과는 거의 절연하다시피 한 막내 아들이 돌보는 아이가 있다. 이게 팩트잖아?”
“그러니까, 그게 뭐? 막내아들이 사고 쳐서 낳은 애가 연회장 눈에 들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이참. 막내가 사고를 쳤다 해도 숨길 필요까지는 없잖아. 결혼도 안 했다는데.”
“그냥 결론만 말해.”
“···사실은 그 애가 막내가 사고 쳐서 낳은 애가 아니라, 연회장의 애라는 소문이야.”
“···미친년아. 그게 말이 되니?”
“안 될 건 또 뭐래? 남자는 나이가 80을 넘어도 애를 보겠다고 떡을 친다는 데, 연회장은 아직 80은 안 됐잖아.”
“그게 말이냐, 방귀냐? 야, 니 생각은 어때?”
그때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정환은 양주를 들어 빈 잔에 따라주며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쪽 사람들 이야긴 저한테는 먼 나라 이야기라서 들어도 모르겠네요.”
정환은 자기 잔을 들고 말했다.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 전 이 한잔에 비워버리렵니다. 전 이 술처럼 화끈하게 살고 싶지, 이것저것 따지면서 사는 인생 골 아파서 못 삽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과 달리, 정환은 이런 정보들을 어느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기억해두었다가 기회만 닿는다면 곧바로 쓸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뜻밖의 장소에서 정환은 준비된 지식을 이용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계획을 세운 며칠 뒤, 호스트 바를 그만둔 정환은 천천히 숙희에게 접근했다.
‘주방 보조? 어림없다.’
상대가 여자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 발아래 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처럼, 얼마 후 정환은 자기 배 아래 숙희를 깔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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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도 아니지만, 남편보다 더한 정신적 유대감과 정서적 기둥의 역할을 하는 남자라.”
단유의 중얼거림에 숙희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걸 설명할 시간이 없고, 설명할 의무도 없네요. 아무튼, 그런 남자라는 거네요?”
숙희가 차에서 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 남자 곁에서 보인 행동과 동작, 눈짓과 말 등에서 추정해 본 것뿐이지만, 방금 숙희의 반응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숙희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단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저희, 그러니까 저랑 명수한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으신가요?”
숙희는 그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를 악 깨물었다.
“내가 고작 너희 따위한테 원한 같은 게 있어서 이러는 줄 알아?”
단유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단유의 행동에 숙희가 움찔거렸다. 단유가 창고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창고 바깥의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을 들고 나타난 사람은 정환이었다.
“자, 자기야.”
숙희가 정환을 불렀지만, 정환은 숙희에게 관심이 없었다.
“방금 누구랑 대화한 거야?”
숙희가 얼른 턱으로 단유가 숨은 구석 쪽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꼬마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전등 불빛이 구석을 향했다.
“꼬마?”
“어?”
손전등 불빛이 비친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 방금 같이 있었는데?”
숙희가 무릎걸음으로 앞을 짚고 나가 구석으로 가보았지만, 가서 벽을 더듬어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빠져나갈 구멍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 있었는데?”
갑자기 땡그랑 소리가 나며 불빛이 크게 흔들렸다. 숙희가 놀라서 돌아보니 정환이 보이지 않았고, 정환이 들고 있던 손전등만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정환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은 채 고개만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세 걸음 앞에 서 있는 남자애, 단유를 보며 물었다.
“너냐?”
정환의 눈은 새까맣게 물든 것처럼 짙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