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02화 (302/956)

Defuser(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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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도마뱀’과 함께 공터 쪽으로 향했다. ‘도마뱀’이 손전등으로 땅을 비추자 거친 흙바닥과 깊지 않은 구덩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땅을 파던 흔적은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삽만 빈 땅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자가 ‘도마뱀’에게 손을 내밀자, ‘도마뱀’은 그의 손에 손전등을 올려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가 말없이 주위를 향해 빛을 뿌려보지만, 눈여겨 볼만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스스로 풀고 나왔다고?”

“응.”

“어설프게 묶었던 것은 아니겠지?”

“당연하지.”

남자는 혀를 차며 다시 한번 빈 땅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발자국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너무 어두웠던 탓인지 아니면 눈썰미가 없는 것인지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내려가는 길은 저 길밖에 없잖아?”

손전등으로 이 집으로 올라오는 유일한 산길을 가리켜 보인 남자의 말에 도마뱀이 동의하며 대꾸했다.

“그렇긴 한데 길 아닌 쪽으로 갔을 수도 있지. 아니면 위로 올라갔을 수도 있고.”

산 위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드문드문 하얀 별이 빛을 내고 있었다.

“어쨌든, 저 길로는 내려가지 않은 게 분명하겠지.”

“갔다면, 니가 올라오면서 봤겠지.”

남자는 말없이 손전등을 도마뱀에게 건넨 후, 집으로 들어갔다.

“정환아.”

도마뱀이 뒤를 쫓아와 남자를 불렀다. ‘정환’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돌려 도마뱀을 쳐다보자, 도마뱀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

정환의 눈을 딱히 특정할만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가 정환이 가장 무서워지는 순간임을 도마뱀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호스트바에서 같이 일할 때도 그랬으니까.

****

정환은 호스트바에서 꽤 유명했다. 손님들은 순진하고 선한 웃음을 짓는 정환을 좋아했다. 왜 여기서 일하냐고, 그 마스크라면 오히려 연예계로 진출해도 되겠다고 말하면 정환은 예의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누님 만나려고 기다린 거죠.”

이런 오글거리는 멘트를 스스럼없이 내뱉는 정환이었지만, 진지해질 때는 순식간에 눈에서 감정의 찌꺼기가 사라지고 마치 새까만 구슬을 박아넣은 듯한 눈으로 사람을 압박했다. 당시 호스트바에서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도마뱀은 그런 정환을 자주 봤었다.

한번은 대기실에서 정환이 직장 동료(?)와 대치한 적이 있었다. 룸에서 있었던 일로 마찰이 생겼던 것 같은데, 룸에서는 손님 때문에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대기실로 돌아온 뒤, 두 사람이 붙은 것이다. 그때 정환이 그런 눈으로 동료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가? 눈깔 안 치워?”

정환은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그때는 사람들이 모두 ‘정환이 쫄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 그 상대가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만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연락도 닿지 않았다. 만약 무슨 돈을 챙겼다거나, 물주를 꼬셔서 도망을 간 것이라면 어떻게든 소식을 들었을 테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기에 다들 의문을 품었다. 그러다가 소문이 나기를 ‘정환이가 손을 썼다’는 것이었다. 정환도 그 소문을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소문은 잠시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는 계란 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정환과 충돌이 생기는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그다음에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일이 생기자, 사람들은 정환을 의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는 일을 가지고 추궁할 수는 없었고, 추궁할 용기를 가진 이도 나오지 않았다.

도마뱀 역시 정환이 손을 썼다고 믿는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정환을 추궁하진 않았다. 오히려 정환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감으로 볼 때, 정환은 반드시 가게의 ‘베스트’가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고, 또 정확히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정환과 각을 세우기보다는 그를 따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환은 그렇게 다가오는 도마뱀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몰래 용돈을 챙겨주는 등, 자기 사람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야, 이거 뭐야?”

“뭐긴, 담뱃값이야. 챙겨둬.”

“담배? 아, 어제? 그건 어제 줬잖아?”

“고마워서 그러니까 그냥 넣어두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정환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도마뱀의 어깨를 툭 쳤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라인이 생기면서, 도마뱀은 이것저것 뒷일을 봐주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도마뱀, 나중에 연락하면 삼거리 가는 길 쪽 시장 입구로 나와.”

새벽에 걸려온 전화에 도마뱀은 잠도 자지 않고 전화를 기다리다가 정환의 연락을 받고 나갔다. 시장 입구에는 파란 와이셔츠를 걸친 정환이 담배를 피우며 도마뱀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갔더니, 그의 밑에 축 늘어진 한 사람이 있었다.

“뭐야?”

정환이 말없이 남자를 들쳐메려 하자, 도마뱀이 얼른 반대쪽으로 서서 정환을 도와 남자를 들었다. 그때 도마뱀은 남자가 죽은 게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있어 술에 취한 것인가 싶기도 했는데,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둘러보니 재래시장 입구 근처에 CCTV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정환은 남자를 업고 옆에 주차해둔 차로 데려가 남자를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 차를 몰아 데리고 온 곳이 바로 서울 외곽의 이름도 모를 산 중턱의 허름한 집이었다. 공터까지 정신을 잃은 남자를 데리고 온 뒤, 도마뱀에게 삽을 건넸다.

도마뱀은 2시간에 걸쳐 땅을 팠고, 하늘이 살짝 푸르스름하게 변할 무렵, 작업이 끝났다. 도마뱀은 무엇이라도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차가운 눈을 한 정환을 보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정환은 구덩이 속에 남자를 집어넣은 뒤, 삽날을 세워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목을 찍었다. 정신을 잃은 남자가 눈을 번쩍 뜨는데, 그 순간의 모습이 너무 섬뜩해서 지금도 가끔 잠을 자다가 그 광경이 떠올라 잠을 깨는 도마뱀이었다. 반면, 여전히 감정 없이 삽날로 정확하게 목을 찔러대는 정환은 남자가 죽었음을 확인한 뒤, 삽을 도마뱀에게 던졌다.

“덮어.”

정환은 담배를 입에 물고 공터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루터기로 가 연기를 내뿜었다.

도마뱀은 입술을 깨물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삽 위에 흙더미를 얹어 구덩이 속으로 뿌렸다. 땅을 팔 때보다 더 빨리 끝나야 할 작업이 더디기만 했다. 겨우 땅을 메운 뒤, 정환이 다가왔다.

“수고했어.”

도마뱀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가슴께에서 돈뭉치를 꺼내 도마뱀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줬다.

“이제 우리 계속 함께 하는 거다.”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그 이후 정환은 호스트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웬 노티 나는 여자랑 살림을 차렸다. 그 여자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예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기···무슨 일이든 다 처리한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도마뱀은 무슨 소리냐고 말하고 싶은데, 때마침 문자가 같이 들어왔다.

―무조건 맞다고 하고, 일 맡는다고 해.

정환의 문자였다. 도마뱀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여자가 어렵게 꺼낸 말은 ‘납치’를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

단유는 바닥에 널브러져서 침을 게우고 있는 숙희를 바라보았다. 숙희는 복부를 가격당한 통증과 정환의 돌변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옆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눈물을 흘리며 짐승 같은 신음 소리만 내는 중이었다.

“괜찮으세요?”

흠칫 놀란 숙희가 고개를 들어보니, 창고 위의 조그만 환기창을 통해 들어온 불빛에 의지해 어슴푸레 보이는 실루엣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 누구세요?”

단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쉰 뒤, 쪼그려 앉았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납치하려고 했어요?”

숙희는 놀란 눈으로 비명을 지르려다 단유의 손짓에 입을 막았다.

“소리 크게 지르지 마세요. 안 좋아요.”

단유는 숙희의 머리를 짚었다. 숙희는 그 손을 피하려 했지만, 자세가 바닥에 누워있어 피할 수 없었다.

“선생님 친구분이신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아주머니라고 부를까요?”

그 말에 숙희는 아이의 정체를 확신했다.

“너, 도망갔다고 들었는데?”

“···물어볼 게 있어서요.”

숙희는 소리를 질러서 정환과 ‘미친 도마뱀’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와 이 아이를 본다면, 조금 전의 해프닝은 말 그대로 해프닝으로 넘어가리라. 정환은 다시 자신에게 웃음을 지어줄 것이고, 따뜻한 손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리라. 도마뱀은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며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리라. 그리고 작전대로 정환이 연재훈에게 전화를 걸어서 돈을 받아낼 테고, 그럼 그 돈으로 정환과 둘이서 해외로 가, 따뜻한 해변 근처에서 둘만의 로맨스를 매일 매일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저기요.”

아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숙희가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가 미미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이미 저 쪽에게 버림받으신 거예요. 현실을 부정하려 하지 마세요.”

숙희는 조금 늦게 그 말을 이해했다. 아니라고 부정하려는데, 아이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저쪽에서는 아주머니를 먼저 처리해야겠다고 이야기하는 중이던데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그리고 설령 그 말을 믿지 않더라도, 방금 ‘도마뱀’ 아저씨랑 그···남자의 태도만 봐도 아주머니가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아주머니 정도 나이시면 그 정도는 아실 수 있지 않아요?”

그 정도 나이가 되도록 사람을 많이 만났다면, 상대의 말과 행동을 통해 상대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알지 않느냐는 말이었지만, 숙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단유는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닥쳤을 때, ‘현실 부정’을 한다던 심리학책의 구절을 떠올렸다.

‘우울 다음이 부정이고, 그다음이 분노던가?’

“그 남자는 누구예요? 같이 오신 분이요.”

“···정환이?”

“그분이 남편이세요?”

숙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

숙희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어린이집 등에서 보육교사로 근무할 때, 너무 버겁고 지쳐서 결혼만 하면 당장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만 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던 결혼을 했건만,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해야 할 판이었다. 결혼 전에 꿈꿨던 낭만과 로맨스는 어디로 가고, 치열한 삶의 투전판이 신혼집에 펼쳐졌다.

“뭐? 주식?”

“······.”

“언제부터 주식을 한 건데? 아니, 지금 그래서 주식으로 돈을 다 날렸다고?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는 거야?”

“앞으로 벌면 되잖아!”

“앞으로? 당신이 벌이가 되면 얼마나 된다고 그걸 번다는 거야?”

“나만 버나? 당신도 돈 벌잖아? 호봉도 많이 돼서 돈 많이 번다며?”

“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닥친 현실 앞에서 숙희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결국, 오랜 꿈을 접고,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가끔 집에 들어가면 밥 차려라, 청소는 안 하냐 같은 남편의 잔소리에 맞상대하다가 다투는 것이 일상이었다.

신혼에 터진 일 때문에 아이도 빨리 갖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이 주식으로 날린 돈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랄까, 아니면 결혼 전에 남편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 많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랄까. 두 사람 사이의 갈등도 3년 뒤, 잃었던 재산을 복구하면서 멈췄고 그 시기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생기면서 가정에 변화가 생겼다. 남편은 가정적인 남편의 역할에 충실했고, 숙희는 맞벌이 부부의 운명에 순응하며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기 위한 계획에 집중했다.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집으로 출근했고, 아이와 함께 퇴근했다. 남편은 전보다 신경질을 덜 냈고, 돈은 착실하게 모였다. 돌아보면 이 시기가 숙희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닐까, 싶었다.

둘째도 생겼다. 둘째가 생기면서 부부 사이는 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전셋값이 올랐다고?”

남편의 말에 숙희는 신경질을 내며 통장을 뒤적거렸다.

“이 동네 전셋값이 다 올랐다고, 이번에 계약 끝나면 나가라잖아!”

물가는 말도 못하게 오르고, 아이들 키우는데 드는 돈도 두 배로 드는데, 들어오는 돈은 늘어나질 않으니 빠듯한 생활이 이어졌다. 게다가 맞벌이 부부다 보니 아무래도 가정에 조금씩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고, 얼마 전까지 서로를 이해해주던 푸근했던 자비심도 바닥이 났는지 다시 서로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거 통장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안 보여. 어디에다 뒀지?”

숙희가 서랍장을 뒤질 때, 그녀는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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