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00화 (300/956)

Defuser(7)

-------------- 300/952 --------------

단유는 손과 발이 묶인 채 창고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텅 빈 시멘트 포댓자루가 굴러다니고 있고, 부서진 벽돌이 조각나 흩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천 조각들과 둘둘 말린 포장지 같은 게 눈에 들어왔지만, 무엇하나 ‘무기’로 쓸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에 자욱이 깔린 먼지들이었다. 깔끔한 단유에게, 호빵이 거실에 날리는 털 하나도 보는 즉시 치워야 하는 단유에게 다른 무엇보다 이 먼지들이 가장 큰 고문이었고,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급선무였다. 그래서 단유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 탈출을 선택했다.

“퉤.”

창고를 나온 단유는 손발을 묶고 있던 줄들도 가볍게 벗겨낸 뒤, 창고 안으로 ‘이동’ 시켰다. 자유로워진 손과 발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었다. 창고를 탈출하는 시간보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겨우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몸단장(?)을 마친 단유는 사내들이 들어간 집 근처로 갔다. 누군가는 전화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긴장을 털어내는 중이었다.

‘무슨 이름들이 저래?’

별명도 참 이상한 별명으로 부른다, 고 생각하며 단유는 잠시 후 집을 나와 창고 주위의 공터에서 땅을 파기 시작하는 ‘쭈꾸미’ 뒤를 쫓아 다가갔다.

“어?”

‘쭈꾸미’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놀란 눈이 한 번 깜빡거리기도 전에 단유는 그를 기절시켰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깊은 숲속으로 옮겨진 뒤였다.

“정신 차렸어요?”

“뭐, 뭐야?”

‘쭈꾸미’는 정신이 없었다. 땅을 파다가 누군가 뒤에서 다가온다는 사실에 놀람을 표현하려는 차에,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더니 낯설고 황량한―처음에는 꿈이라 생각했고 나중에도 꿈이었던가 헷갈릴 정도로 이상했던―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곳이 어딘지 알아볼 새도 없이 다시 정신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더니 어느새 손과 발이 두꺼운 밧줄로 단단히 동여진 채, 숲속에 널브러진 상태로 놓여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거 풀어!”

‘쭈꾸미’는 앞에서 지켜보는 단유를 보고 소리를 쳤다. 어떻게 묶었는지 손을 비틀 공간조차 주지 않고 꼼꼼하게 매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단유는 물끄러미 쳐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쭈꾸미’는 더 크게, 마치 단유를 위협하려는 듯했지만 실상은 목소리를 듣고 동료들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죽여버리기 전에 얼른 풀어, 새끼야!”

단유는 천천히 다가가 허리를 굽혀 ‘쭈꾸미’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과 마주치자 ‘쭈꾸미’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저씨.”

“뭐! 왜!”

도대체 이렇게 소리를 치는데도 주위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수상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아니 무서워서 오금이 저리는 중이었다.

“겁먹지 말아요. 전 아저씨 해칠 마음이 없으니까요. 아직은요.”

애새끼가 말을 하려면 곱게 하든가, ‘아직’이란 말을 굳이 저렇게 섬뜩한 눈빛을 보내면서 말을 하면 어떻게 겁을 먹지 말란 말인가.

“새, 새끼야. 겁 안 먹어, 새끼야!”

나름 목에 힘을 주고 소리를 쳐보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목소리가 약해지는 바람에 창피함을 느끼는 쭈꾸미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봐요. 혼자 있어도 되죠?”

“뭐?”

단유가 허리를 펴더니 터벅터벅 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이곳이 산 중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야, 야!”

그런데, 산속이 어두워진 탓인지 아이가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뒤늦게 아이를 불러보지만, 아이는커녕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들리는 거라곤, 차가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뿐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어릴 때 TV에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났다.

“야! 야! 새끼야! 안 들려 새끼들아!”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보지만,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가 외치는 소리에 에코가 덧씌워진 것처럼 울리는 소리에 더 겁이 났다. 불과 5분 전까지,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마치 귀신에 씐 것 같았다. ‘귀신’을 떠올리자 등줄기로 소름이 확 끼치면서, 눈물이 찔끔 나는 기분이었다.

한편, ‘쭈꾸미’를 찾아 공터로 나섰던 ‘꼬마놈’은 후두부를 강타하는 일격에 살짝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왔다.

“뭐야!”

뒤를 돌아보니, 아까 잡아 왔던 꼬마가 오른손을 매만지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 어떻게 나온 거야?”

라고 외치며 두 손을 번쩍 들려는데, ‘꼬마놈’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놀란 ‘꼬마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다시 후두부를, 아까보다 더 강하게 타격하는 충격에 뒷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단유는 이번엔 왼손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명수 말대로 기술이라도 배워둘 걸 그랬나.”

나중에라도 다시 고민해봐야겠다, 고 생각하며 일어서고 있는 ‘꼬마놈’을 바라보았다. ‘꼬마놈’은 씩씩거리면서 단유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단유는 얼른 고개를 뒤로 빼며 주먹을 피했다.

“이런 쥐새끼가!”

하지만 굳이 이런 곳에서 주먹질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단유는 ‘꼬마놈’의 주먹을 피하며 말했다.

“저기요.”

“왜 새끼야!”

“진정 좀 하시고, 옆 좀 보세요.”

“뭐 새끼야!”

확실히 ‘꼬마놈’은 단순하고 성질이 급하며, 시야가 좁은 사람인 데다가 어휘력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추정컨대, 학교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거나, 혹은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힘은 좋은데, 그 힘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모르고 무조건 휘두르는 걸 보면, 제대로 싸움판을 전전한 이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은 지금껏 만난 이들 중 가장 세다고 할 정도로 보통을 넘는지라 기술도 없이 맞싸움을 벌일 상대는 아니어서 계속 피하기만 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좀 보고 말씀하시죠?”

“뭐?”

씩씩대면서 어떻게 잡을까만 궁리하던 ‘꼬마놈’은 불현듯 주위를 둘러보다,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어디야?”

공터에서 단유와 마주쳤다고 생각하고 있던 ‘꼬마놈’은 주위에 울창한 나무들을 보며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주위를 보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보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새끼가 사람을 갖고 놀아!”

‘꼬마놈’은 다시 멧돼지처럼 밀고 들어와 단유의 허리춤을 껴안으려 했고, 그의 재빠른 행동에 단유는 허리를 붙잡히고 말았다.

‘됐다!’

고 생각하던 찰나, 양팔 사이가 허전해지며 순간적으로 중심이 흐트러진 ‘꼬마놈’은 꼴사납게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어이쿠, 하며 놀람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야, 꼬마새끼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언제 와 있었는지 뒤에 ‘쭈꾸미’가 팔다리가 묶인 채 자신을 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 너 왜 거기 있어?”

“야, 이 새끼야, 한참을 불렀어, 이 새끼야?”

“···못 들었는데?”

“정신 차려 이 새끼야.”

‘꼬마놈’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런데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

알고 보니, 그의 몸은 낡은 장판에 둘둘 싸여 줄까지 단단하게 동여매진 상태였다.

“이거 왜 이래?”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새끼야?”

‘쭈꾸미’로서도 황당한 것이 단유가 사라진 산 아래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중에 갑자기 위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힘겹게 몸을 돌렸더니, ‘꼬마놈’이 저 꼴을 하고 버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 언제 여기 온 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새꺄. 넌 언제 여기로 온 건데?”

“나? 난 조금 전까지 꼬마애 잡으려고···.”

말이 이어질수록 ‘꼬마놈’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변해버렸다. 자기는 그저 도망친 꼬마를 잡으려고 주먹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이 꼴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여기 어디냐?”

‘쭈꾸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서움은 덜했다.

****

“이 새끼들 어디 간 거야!”

‘도마뱀’이 신경질을 내며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저기요’라는 미성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린 ‘도마뱀’은 급히 몸을 뒤로 물리면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너, 뭐야?”

‘도마뱀’은 ‘쭈꾸미’처럼 덤벙대지 않았고, ‘꼬마놈’처럼 성급하지 않았다. 신중한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조심성이 많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물어볼 게 있어요.”

“다른 녀석들, 니가···한 짓이냐?”

아무래도 신중하고 머리도 쓸 줄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주변을 훑다가 말했다.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죠. 조금 쌀쌀하긴 해도, 여기가 이야기하기가 더 편하긴 하겠네요.”

‘도마뱀’은 어리다고 섣불리 다가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심’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저한테 원한이 있으세요?”

“···없어.”

“그럼 왜 절 납치하신 거죠?”

‘도마뱀’은 단유가 너무 태평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놈들이 풀어줬을 리가 없으니, 스스로 풀려나왔거나 외부의 조력이 있었음이리라. 스스로 묶인 줄을 풀었을 리 없다고 단정할 수 없고, 외부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 더욱 조심해야 할 때였다.

“그럴 사정이 있는 거야.”

“무슨 사정이요? 무슨 사정이길래, 납치만 하지 않고 붙잡아서 죽이려고까지 하셨던 거죠?”

“뭐?”

“저기 땅 파라고 지시하셨잖아요. ‘오래 데리고 있으면 안 된다’든가 인질을 놔두면 안 된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꼬마놈’과 대화하는 걸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마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니가 들어서 좋을 내용 아니니까 신경 끄고, 다른 놈들 어디 있는지나 말해.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정말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다.”

“또 아까 들어보니까, 저 말고 다른 사람도 납치하려고 했던 거 같던데.”

통화하는 걸 들었구나. ‘도마뱀’은 이 녀석을 놓쳤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빨리 저 녀석을 붙잡아야 할 거 같다는 생각에 손에 땀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조금의 빈틈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마찬가지로 상대를 관찰하고 있던 단유는 ‘도마뱀’의 행동에서 긴장을 느꼈다. ‘죽이라’는 말보다 ‘통화내용’을 언급한 부분에서 더 큰 긴장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통화가 중요했단 의미일 것이고, 통화내용만큼이나 통화한 상대가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 사람의 행동과 사고에 대한 관찰은 그만 끝내기로 했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반응이긴 했지만, 특별히 오랜 시간에 걸쳐 관찰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또 다른 호기심의 대상이 된 ‘통화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이런 대치 상황이 의미가 없었다.

“아, 마지막으로요.”

‘도마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대답을 들었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리다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단유에 대해 경계심이 들었다. 처음부터 수상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던 아이였지만, 지금은 수상함을 넘어 1급 경계 경보를 울리고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격상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중이었다.

“왜 이름이 ‘도마뱀’이에요?”

“뭐?”

“다들 이상한 이름이잖아요. ‘꼬마놈’, ‘도마뱀’, ‘쭈꾸미’.”

‘도마뱀’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에 잠시 집중력이 흩어졌다. 사실 세 사람의 별명이 만들어진 계기는 사우나를 함께 가게 되면서였다. 사우나에 함께 간 세 사람은 서로의 진면목(?)을 관찰하게 되었고,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그렇게 ‘별명’이 만들어졌다. 그 일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재현된 그 날의 기억이 집중력을 흩어 놓았고, 그때 단유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도마뱀’ 역시 다른 이들처럼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