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user(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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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화창한 햇살과 함께 오전 내 낮았던 기온이 풀리기 시작했다. 물론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던지고 있던 아이들은 그런 날씨가 무색하게 붉어진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교문 밖에서 걸어가던 사람들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하고 학교를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움츠린 채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추워 뒤지겠어.”
―엄살 부리지 마.
“그럼 네가 와서 있든가.”
―시끄럽고. 이제 마칠 시간 다 됐으니까 잘 살펴.
“알았어.”
야구모자 아래로 짧은 머리가 살짝 드러난 20대 중반의 남자는 두꺼운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이다가 통화를 마쳤다. 엄살이 아니라 실제로 교문 밖에서 두 시간 정도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수능이 치러지는 11월 중순경이 되면 유난히 날씨가 추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생각을 떠올린 본인 역시 과거 수능을 치러 갈 때, 두터운 점퍼와 목도리로 온몸을 꽁꽁 싸맸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능을 치러 온 것도 아니고, 수능 날짜도 아니었다.
야구모자는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상기한 후, 핸드폰을 꺼내서 자신이 찾아야 할 아이의 사진을 확인했다. 이 아이는 SNS 같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서, 직접 찍은 혹은 간접적으로 찍은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동료가 요 며칠간 뒤를 쫓으면서 직접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유한 사진을 꺼내 얼굴을 확인한 야구모자는 가래침을 모아 바닥에 뱉었다.
“사고 치기 전에 사고 나겠네.”
야구모자는 두 손을 힘껏 비벼 열을 낸 후, 가죽 재킷 호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교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간은 어느새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인적 드문 골목에 작은 승용차를 두고 대기 중인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춥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오랜 시간 대기해야 돼서 자동차 시동을 걸 수도 없었던 탓에 차가운 시트의 냉기를 참으며 버텨야만 했다.
“야, 시간 다 됐는데, 이제 히터 좀 틀자.”
“임마, 아직 안 돼. 좀만 기다려.”
“기름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어차피 돈 들어오면 그거 다 푼돈인 거 알면서 지랄이야.”
“뭐 같은 소리하지 말고 참어, 새끼야. 니가 돈 낼 것도 아니면서.”
“야, 그냥 내가 돈 낼게. 좀 틀자. 추워서 몸이 제대로 움직일지도 모르겠다.”
“새끼야, 전화 오면 그때 틀어도 안 늦어 이놈아. 그때는 땀띠 나게 틀어줄 테니까.”
두 남자는 아웅다웅, 말로 열을 내며 버티는 중이었다.
“혹시 말이야.”
“씨발 놈이. 적당히 좀 해라.”
“개새끼가. 내가 뭐 말할 줄 알고?”
“몰라, 새끼야. 알기도 싫다. 그냥 재수 없는 말일 것 같으니까 그냥 하지 마라.”
입을 열었던 장발의 갈색으로 염색한 남자는 코가 뾰족해서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남자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뾰족이의 말처럼, 장발이 생각하고 있던 말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보수는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거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새끼야. 작업 뜨기 전에 그런 소리 하면 재수 없는 거 몰라? 돈 다 받을 수 있으니까,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집중 좀 하자, 응?”
뾰족이가 날카롭게 받아치자, 장발은 ‘씨발, 씨발’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간간이 지나가던 행인들이 검게 선팅된 차 안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기는 했지만, 누구도 다가와서 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기 갈 길 가기 바쁜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문득 장발은 그 바쁜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일이 있는 사람들일 테니까. 자기 일이 없는 사람들은 저렇게 바쁘게 걸을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늘 흐느적대는 걸음으로, 슬리퍼나 끌면서 동네 슈퍼에 가서 소주 한 병 사 오는 게 일과의 다였던 장발은 창틀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로 행인들을 구경했다.
낙관적인 이라면, 작업이 성공하고 큰 보수를 손에 쥔 뒤,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를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태생이 비관적인 장발은 뾰족이 말처럼 ‘재수 없는’ 생각들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럴 때 ‘괜찮아, 꼭 성공할 수 있어.’ 라든가, ‘떼돈 벌어서 인도네시아 가자, 가서 비키니 입은 백마들 구경하며 놀자!’ 같은 이야기로 의욕을 고취 시켜줬으면 좋겠지만, 툴툴대는 뾰족이도 사실은 자기만큼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 이야기는 입에 올릴 여유가 없을 것이다. 학교 앞에서 망을 보다가 자기들에게 연락을 줄, ‘꼬마놈’도 별로 기댈만한 인물은 아닌지라 그저 이렇게 자기 속만 까맣게 타들어 갈 뿐이었다.
“꼬마 새끼, 놓치는 거 아니겠지?”
“아오, 진짜. 이 새끼!”
뾰족이가 눈을 치켜뜨며 주먹을 번쩍 들어 때리려고 시늉했다.
“알았다고, 새끼야. 안 하면 될 거 아냐!”
장발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기며 짐짓 여유롭게 행동하며, 전혀 쫄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애들 나온다.
****
“오늘은 명수랑 같이 안 가?”
“응. 명수는 5시까지 훈련이래.”
단유의 대답에 지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리 나은 뒤부터는 계속 훈련이구나. 안 힘들데?”
“오히려 놀 때가 더 힘들었지.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다 좋대.”
“하긴 명수니까.”
지태의 대답에 단유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까 사람들이 명수한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명수니까’ 더라고.”
“그런가? 그렇네. 어쩐지 명수는 명수니까 명수인 거 같다.”
“무슨 말이 그래?”
채윤의 핀잔에 지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세 친구는 사이좋게 나란히 서서 교문을 빠져나왔다.
“아, 학원 가기 싫다.”
지태의 말에 채윤이 공감하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 정도만 되면 학원 안 가도 될 텐데.”
“아니. 단유정도 되도 우리 집에서는 학원 보내려고 할걸? 우리 엄마는 할아버지랑 있는 것보다, 학원에서 선생님과 있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시거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할아버지랑 함께 있어 봐야, 이제는 서예도 안 하고, 그냥 TV나 보고 있을 뿐이고, 아니면 라디오나 들으면서 책이나 읽어야 하는데, 재미가 없으니까.”
채윤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지태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 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셔?”
“우리 할아버지? 이제 73인가? 그 정도 되실걸?”
“우와. 연세 많으시네?”
지태는 가방 끝을 잡아당기며 딴짓을 하는 시늉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꽤 정정하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할아버지도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집에서 거의 누워 계시는 편이야.”
“걱정 많으시겠다, 너희 부모님.”
“그렇지 뭐.”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지태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단유야, 아까 점심때 이야기한 거 있잖아? 선생님들 말고 또 다른 거 없어?”
“다른 거?”
“너 요새 갤럭시즈 누나들 보러 자주 갔었다며?”
“···연예인 뒷담화가 듣고 싶은 거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 있으면 듣고 싶다는 거지.”
단유는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갤럭시즈 누나들을 보긴 했어도, 오래 대화를 나눈 게 아니라 결론을 낼 만큼의 정보가 모이지 않아서 뭐라고 하기 힘드네. 수련 누나랑은 대화를 좀 많이 했지만.”
“그럼 수련 누나만이라도.”
가만히 듣고만 있는 채윤도 구미가 당기는지 단유를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수련 누나는 일단 가장 노래를 잘하지.”
“그건 나도 알아.”
“미성이야.”
“안다고.”
“그리고 굉장히 성실한 편이야. 주위의 평가가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하는 게 대부분인데도, 스스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더 많이 연습하지.”
“그건 좋은 거잖아?”
“그럼 뭐 싫은 거라도 이야기해달라는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그렇게 예쁘고 노래 잘하는 연예인한테 단점 하나 없을까?”
“단점이 없진 않지.”
“뭔데?”
단유는 말을 고르다가 지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수련 누나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잖아?”
“응.”
“그래서 연습을 많이 한다고.”
“그래, 그래.”
지태는 빨리 이야기해보라고 재촉하듯 대답했다.
“수련 누나는 자신감? 혹은 자존감이 조금 낮은 편이라고 해야 하나? 남들에게 칭찬을 받아도 그걸 100%라고 믿지 않는 편이야. 굳이 표현하면 자기가 그렇게 잘할 리가 없어, 라고 생각한달까? 그래서 자기 노래에 대한 만족이 없는 거지.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가 가수로서 정상에 섰다는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계속 지금과 같은 연습을 계속할 거 같아.”
“그것도 좋은 말이네. 결국, 수련 누나가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한다는 뜻이잖아?”
“그건 겉으로 보는 것의 문제지. 진짜 문제는 자존감이 낮은 편인데, 최근의 일 때문에 더 의기소침해 있다는 게 문제야.”
“최근의 일이 뭔데?”
아직 지태와 채윤은 갤럭시즈가 해체 직전에까지 몰렸던 사정을 몰랐다. 그리고 단유는 그 사정을 친절히 설명할 이유가 없었고, 할 마음도 없었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그래서 수련 누나가 보이는 건 되게 세게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방어기제 같은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그런 식으로 마무리 지으면 어떻게 알아먹냐?”
“알아먹으라고 한 소리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연예인도 고생 많이 하는 직업이란 소릴 해주고 싶어서 그래. 겉만 보지 말고, 그 속을 들여다보란 말이야. 투정부리지 말고 학원이나 가.”
“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장난스럽게 대꾸한 지태는 채윤과 함께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단유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
“한 명 안 보인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친구 둘은 자기 집으로 가고, 키 큰 애 혼자 집에 가는 중이라는데?”
“에이 씨.”
뾰족코는 자동차 핸들을 크게 두드렸다. 그래 봐야 자기 손만 아플 뿐인데, 라고 생각하던 장발은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곧 이쪽을 지나겠는데?”
“···나가자.”
뾰족코는 대답과 동시에 기어를 넣고, 천천히 악셀을 밟아 차를 앞으로 몰기 시작했다. 여전히 골목 한편에 있지만, 곧 아이를 붙잡아 차에 태우는 즉시 큰길 쪽으로 튀어나갈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실수하지 마라.”
“안 해, 새끼야.”
장발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는 차문을 열고 나갔다.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장발은 곧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건 발견했어.”
약 100m 앞에 목표로 삼았던 아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야!”
목소리를 죽인 채로 상대방을 부른 장발의 귀에 야구모자 ‘꼬마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저렇게 키가 크다고는 안 했잖아?”
저게 중학교 1학년이라고? 사진으로 볼 때는 얼굴이 워낙 어려 보여, 짧은 머리에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초등학생은커녕,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키를 가진 아이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새꺄, 지금 상황에 키가 무슨 소용이야!
“이 새끼야, 저렇게 큰놈을 어떻게 한 번에 제압해?”
―미친놈아. 그럼 ‘도마뱀’ 새끼랑 같이 잡든가!
장발은 고개를 돌려 핸들을 잡고 있는 뾰족코 ‘도마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입으로 ‘뭐’라고 모양을 만들어내는 ‘도마뱀’에게 턱짓으로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용케 그걸 알아들었는지, 서둘러 차문을 열고 나서는 ‘도마뱀’이었다.
“이 새끼야, 왜 불러!”
“새끼야, 눈 있으면 봐라. 저게 나 혼자 될 일인가.”
장발의 타박에 ‘도마뱀’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척, 시선을 돌려 목표물을 확인하더니 다시 장발에게로 고개를 돌려, 진짜 신경질을 냈다.
“저 새끼, 뭔데? 중학교 1학년이라며?”
“내 말이.”
아이는 이제 고작 50걸음 안쪽으로 들어왔다.
“씨발, 모르겠다. 잡자마자 끌고 와.”
“어떻게?”
“몰라, 새꺄. 운전 할 사람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작전의 생명은 기동성. 운전수 역할을 맡은 ‘도마뱀’의 역할도 중요했다. 다시 뛰어가는 도마뱀을 흘깃 본 뒤, 장발은 여전히 들고 있던 핸드폰에 대고 말을 했다.
“시끄러워 새꺄.”
도마뱀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뭐라고 계속 떠들어대던 ‘꼬마놈’에게 한소리 한 후, 비장하게 한 마디를 날렸다.
“시작한다.”
목표물이 4걸음 앞으로 왔을 때, 장발은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 자연스럽게 한 발을 내디디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2걸음이 되었고, 이내 나란히 선 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