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97화 (297/956)

Defuse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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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이 울리자, 선생님은 교탁 위에 펼쳐놨던 교과서를 덮었다.

“반장, 인사.”

반장은 다른 수업 때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차렷, 인사를 시켰고, 아이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은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으며 교과서를 챙겨 교실 앞문을 열었고, 그 문이 열리는 순간,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아이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사인 볼트 뺨치는 속도로 교실 뒷문을 향해 달려갔다. 병목 현상에 신경질 난 드라이버들이 경적 대신 범퍼 없이 앞차를 밀어대는 통에 뒷문에서 꾸역꾸역 튀어나온 아이들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넘어지지 않고 용케도 균형을 잡으며 복도로 뛰어나온 아이들은 급식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야야, 다쳐!”

“네!”

대답하라고 외친 말도 아닌데, 아이들은 선생님의 주의를 건성으로 넘기며 복도를 횡단했다. 두세 계단쯤은 한꺼번에 넘어주는 게 예의. 본관 건물 오른편에 있는 대강당 쪽 급식실을 향해 달리는 아이들에게 브레이크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뛰었음에도 급식실 앞에는 언제 이렇게 뛰어왔는지, 많은 학생들이 이미 긴 줄을 형성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단 한발이라도 먼저 앞서고자 달려간 이들이 그나마 큰 충돌 없이 줄을 섰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덕분에 추운 날씨에도 아이들의 이마에는 뜨거운 땀방울이 송글 맺혔다.

모두가 빨리 뛰어갈 때, 누군가는 천천히 걷기 마련이었다. 어차피 빨리 뛰어봐야 이미 앞에 선 이들이 많을 테니 괜한 힘 빼기 싫다고 걸어가는 무리가 있었고, 빨리 가나 천천히 가나 먹는 건 똑같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걷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이왕이면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혹은 줄 서는 게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남들보다 훨씬 늦게 교실을 빠져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야, 빨리 가자.”

“빨리 가나 천천히 가나 똑같아.”

“아우, 답답해.”

지태는 애써 달리려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단유가 어슬렁거리듯, 여유롭게 뒷문을 빠져나오는 중이었고 그 옆에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채윤이 단유와 보조를 맞춰 걷고 있었다.

“늦게 가면 반찬 적단 말이야.”

“내 거 줄게.”

“야, 누가 네 거 달래?”

채윤의 말에 지태가 버럭하며 발을 쿵쿵 굴렀다.

“오늘 점심 메뉴가 뭔데?”

“돼지 두루치기, 가지 볶음, 김치. 맞나?”

채윤이 핸드폰으로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돼지 두루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단유의 물음에 지태가 당연한 걸 묻는다며 투덜대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저기 명수 있다.”

바라보니 명수는 빨리 뛰는 무리였던지, 줄의 앞쪽에서 반 아이들과 농담을 나누는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단유네가 눈에 띄었던지 손을 들어 보였다. 지태 역시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하고는 단유에게 말했다.

“너 요새는 연구 안 해?”

한동안 ‘연구’라는 이름으로 이것저것 책을 읽는 모습을 보였던 단유가 오늘은 책을 읽지 않고 있기에 궁금해서 물었다.

“하고 있어.”

“하고 있다고?”

“응.”

“어떤 건데? 명수 말로는 어떤 노래가 좋은지 맞추는 거라며?”

“그건 그냥 일부분이고, 지금은 대중의 속성에 관해 공부하는 중이야.”

“대중의 속성?”

지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행동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를테면,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가, 혹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작용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같은 거야.”

“모르겠다. 도대체 그런 거 왜 하냐?”

“재미있어서 하는 거야.”

지태는 채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확실히 머리 좋은 애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단유야, 그럼 그런 게 어떨 때 필요한 거야?”

“딱히 어떨 때 필요하다기 보다는···. 예를 들면, 파블로프의 실험이라는 게 있대. 배고픈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들려줬더니, 나중에는 종소리만 듣고도 개가 침을 흘리며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이더란 실험인데.”

“우와, 신기하다. 진짜 그래?”

“진짜 있었던 실험이고, 유명한 실험이야. 아무튼, 그런 실험처럼, 사람도 어떤 조건에서 특정한 반응을 부르는지를 확인하는 게 지금 공부하는 내용이야. 그리고 이게 언제 필요하냐면, 예를 들어 어떤 노래가 나왔을 때, 이 노래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끌어낼지, 아니면 불편한 반응을 끌어낼지를 유추해볼 수 있게 하는 거야.”

“그런 게 가능해?”

“이건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서 실험되었고 검증된 사실이야.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음들을 연결하는 방식을 화음이라고 표현하고, 그 화음의 전개에 따라 장조니, 단조니 하면서 곡을 만들어 나가는 거지.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곡이 없는 이유는 그 곡이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불편하고 낯선 느낌을 주기 때문이거든.”

“그렇게 말하니까 너 되게 있어 보인다.”

단유는 흥미를 드러내는 지태와 채윤에게 계속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이런 반응을 기억해두었다가 써먹으면 좋은 일들이 있어.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말, 단어,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안다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교감을 나눌 때 도움이 되겠지?”

그쯤에서 단유네는 배식 순서가 되어, 식판에 음식을 받아들기 시작했다. 단유의 이야기는 음식이 가득한 배식판을 들고 자리를 잡은 뒤에 이어졌다.

“사람들이 대체로 좋아하는 말이나 어투, 억양, 행동 같은 게 있다면, 그런 걸 이용했을 때 상대방에게 호감을 끌어내기가 쉽겠지?”

“그렇겠지?”

다소 시큰둥한 지태의 대답은 곧 돼지고기 한 젓가락과 함께 우걱우걱 씹혀 들어갔다.

“만약 이성의 상대에게 이런 방식을 적용한다면, 좀 더 편하게 이성과 대화를 할 수도 있고, 호감을 끌어낼 수 있겠지.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이성?”

지태의 눈이 크게 떠진 이유가 돼지고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성’이란 단어와 화제로 이야기했을 때, 지태 너의 주의를 끌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채윤이 웃음을 터뜨리느라 입안에 든 밥알이 튈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반대의 의미로 군중을 제어하는 방식이 있어. 우리 주위에도 알게 모르게 이런 방식은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어. 학교에서 종이 울리는 것도 그렇지.”

“종? 그게 왜?”

“종이 울림으로서 학생들은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있겠지만, 종소리를 통해 학생들을 제어하는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마음껏 쉬어라, 하지만 종소리가 나면 수업준비를 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신호체계’는 가장 익숙한 형태의 제어방식이야. 녹색불이 켜지면 건너라, 이건 녹색불이 켜지지 않으면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함께 포함하지. 즉, 사람들의 행동을 녹색 신호로 제어하는 셈이야. 4교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교실을 뛰어나가는 아이들이 있어? 없잖아. 종소리는 학생들의 행동을 제어하는 신호체계이기 때문이야.”

“이해가 되는 것도 같은데 복잡하다. 그래서 그런 걸 연구하는 거란 거지?”

“‘연구’가 아니고 ‘공부’.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면 말이야.”

“야, 먹고 하자. 먹는 데 체하겠다.”

지태는 손가락 대신 숟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보인 뒤, 식판에 든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 먹기 시작했다.

“난 계속 듣고 싶은데?”

채윤은 오물거리면서 단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는 중이었다. 단유는 슬며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열심히 수업 듣는 걸 좋아하잖아?”

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어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는 걸 좋아하시지. 그런데 만약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반드시 수업시간 중에 한 번은 그 아이를 지목해서 질문을 던져. 국어 선생님이 평소 수업시간에 질문을 많이 던지시지만, 확률적으로 따지면 눈이 마주치지 않는 학생을 골라서 질문을 던지는 경향이 있어.”

“진짜?”

“응. 그러니까 만약 국어 시간에 지목당하기 싫다면 오히려 선생님의 눈을 계속 쳐다보며 수업을 듣는 게 좋지.”

숟가락을 멈춘 지태도 관심 있게 듣기 시작했다.

“수학 선생님은 보통 수업 중에 교과서를 교탁 위에 올려 둔 뒤, 거의 쳐다보지 않고 수업을 하시잖아? 그런데 가끔 교과서를 오른손으로 들 때가 있어. 그때는 기분이 안 좋으시다는 뜻이야.”

“응?”

“수학 선생님은 준비가 철저하신 분이어서 거의 수업과정을 머릿속에 다 집어넣으신 채로 자연스럽게 수업을 진행하시는 스타일이셔. 그런데 가끔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혹은 사적인 문제로 준비가 되지 않으셨을 때 교과서를 들어서 확인을 하시지. 그런데 그럴 때 수학 선생님은 기분이 안 좋으셔.”

단유가 보기에 수학 선생님은 완벽주의자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학생들 앞에서 완벽한 선생님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떤 개인적 사유로 그런 준비가 덜 되었을 때, 그래서 교과서를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때, 학생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와 상관없이 본인이 매우 불쾌함을 느끼는 듯했다. 게다가 그런 경우도 그냥 교과서를 확인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들어서 얼굴을 가리듯 높이 들어 확인하는 것은, 마치 재채기를 할 때 입을 가리고 하는 것과 같은 무의식적 행동으로 보였다. 즉,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다는 무의식적 표현이랄까? 그럴 때 수학 선생님은 꽤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고, 그러면 가끔 히스테리적인 분노가 학생들에게 투영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단유는 이런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진 않았다. 마치 수학 선생님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지태와 채윤은 놀라운 발견물, 마치 해변 모래사장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을 발견한 얼굴을 하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또, 또?”

“국사 선생님은···.”

단유는 지난 며칠간 관찰하고 파악한 몇 가지들을 지태네에게 알려주었다. 이야기는 식사가 끝나고 급식실을 나오는 순간에도 계속되었다. 채윤이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나 단유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 게 다 네가 하던 ‘공부’ 때문에 알게 된 거야?”

“그런 셈이야. 대중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관찰할 필요가 있었고, 대중의 관찰은 개인의 관찰로도 이어지니까. 대중과 개인은 다른 개체이지만, 그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런 속성이 대중과 개인을 잘 이해하게 하더라고.”

단유는 지태를 가리켰다.

“신호등의 이야기를 꺼낸 참에 하는 말이지만, 우리 반에서 가장 신호를 잘 지키는 사람은 지태야.”

“나? 내가 신호를 잘 지키긴 하지.”

“대부분 사람들은 지키라는 신호를 잘 따르는 편이긴 해.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이 신호는 일종의 약속이고 명령이야.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명령을 지키고 완수하는 데 익숙하긴 해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가, 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어. 노란불에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건널목을 빠르게 질주하는 차라든가, 녹색불이 들어오기 전에 건널목을 건너려고 발을 떼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빨간불임에도 지나는 차가 없으면 그대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도 있지.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움직이지 말고 수업을 들으라고 하지만,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이미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준비하는 애들이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런 약속을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바로 지태야. 지태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종소리가 언제 울릴까를 고민하거나, 종이 울리면 바로 뛰어나가야지 같은 고민이 없더라고. 그렇지?”

“그런가?”

“넌 종이 울리기 전까지는 생각이 없거든.”

“뭐!”

채윤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좋은 말이야. 신호 잘 지킨다는데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너의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집에서 할아버지한테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아. 예절 교육을 잘 받은 탓에 사회적 약속과 질서를 따르는 데도 거부감 없이 잘 따라가는 셈이지.”

“어, 그런가?”

지태가 고개를 갸웃거려 보이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채윤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단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네가 하는 거, 나도 같이할 수 있을까?”

“재미있어 보여?”

“응.”

“내가 책 하나 알려줄 테니까 한 번 읽어봐. 거기에 잘 나오니까.”

책을 보란 말에 살짝 거리감을 느끼는 채윤이었지만, 그래도 단유가 던진 이야기의 흥미가 컸던 탓에 거부하진 않았다. 단유가 알려준 책 제목을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한 후, 나중을 기약했다.

“이야기하면서 먹느라고 너무 시간을 끌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추운데, 빨리 들어가자.”

지태가 과장되게 두 손으로 양팔을 비비며 동동 구르기 시작했고, 단유와 채윤이 그 뒤를 역시 느긋하게, 마치 옛 선비의 고고함이 이러한 것이다, 라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움이 한껏 깃든 가을 오후의 시작을 알리는 햇살이 교정에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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