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use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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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진 날씨 탓에 사람들은 모두 앞섶을 꼼꼼하게 싸매고 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느라 고개를 숙인 채 거리를 걸었다. 더러 가볍게 옷을 입었던 이들은 얇은 재킷으로 막을 수 없는 추위 탓에 볼이 빨갛게 부풀기도 했다.
“안 춥니?”
카페 안에서 따뜻한 모카향을 맡으며 커피로 입을 적시던 갈색 머리의 중년 여자가 손을 들어, 방금 들어온 이를 맞이했다.
“당연히 춥지.”
“그런데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나왔어.”
“내 말이. 애들 옷은 그렇게 챙겨 입혔으면서 정작 나는 이러고 나왔다.”
보통의 가을 계절이라면 적당히 어울릴 법한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단유네 보육 선생님인 ‘김희정’ 이었다.
“일은 할 만하고?”
“할 만하지.”
어느새 애들과 2년여를 함께 지냈다. 유치원교사로 시작해서, 어린이집과 공립 보육원에서 경력을 쌓은 희정은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너 처음에는 할까 말까 고민 되게 많이 하더니, 그래도 꽤 오래 일한다?”
희정은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나도 이렇게 오래 일할 줄은 몰랐어. 그런데 생각보다 편하고 좋더라고. 애들도 말 잘 듣고.”
화장을 고치던 희정은 잠시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두 아이를 맡아서 하루 20시간 이상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점이 굉장히 불편하다고 여겼었다. 그래도 당시로서는 꽤 큰 보수를 제시한 주영의 제안을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기에 며칠 정도 일 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해서 시작된 일이었는데, 결국 2년을 넘게 일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큰 애를 돌본 적이 없었던 희정은 솔직히 걱정이 많았지만, 걱정보다 아이들이 얌전하고 착해서 별문제는 없었다. 가끔 단유가 대답하기 난감한 문제들을 들고 올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일도 줄어서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여름인가, 봄인가 그때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카운터에 가서 주문하고 돌아온 친구의 물음에 희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난리도 아니었다. 애들은 아무 일 아니란 듯이 지내는데, 그 후원자 쪽에서 매일 전화하고 애들 어떻냐고 묻고 하는데, 나도 진이 다 빠지더라고. 학교 찾아가서 담임 선생님도 만나고, 변호사 찾아와서 이야기도 해야 하고, 정말 그때가 제일 정신이 없었지. 뭐, 그래도 돈의 힘이 크긴 크더라. 비싼 변호사 쓰니까, 금방 일이 해결되더라고.”
아무렴, 역시 우리나라는 돈만 있으면 안 될 일이 없지, 라며 대꾸하던 친구가 ‘주문 나왔습니다’라는 소리에 일어나서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 사이, 잠깐 실내를 둘러보니 아직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다.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거친 질감의 회색 벽과 주황색 LED 핀 조명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자, 여기.”
“고마워, 잘 마실게.”
희정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남았던 추위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왜 보자는 거야?”
희정은 친구를 보며 물었다.
“갑자기는 무슨. 나도 간만에 시간이 나서 얼굴 좀 보자고 부른 거지. 솔직히 너야 시간이 널널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든? 다른 사람들을 네 기준에서 보지 말라고.”
“알았어. 그냥 이유 한 번 물어본 건데, 뭘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치고 그래? 아무튼, 전화로만 이야기 나누다가 이렇게 얼굴 보니까 반갑네. 넌 하나도 안 늙은 것 같다?”
“안 늙긴. 내 나이도 이제 내후년이면 50이야. 시간 가는 게 빠르다고 느꼈지만, 점점 빨라지는 거 같아. 엊그제 결혼한 거 같은데, 벌써 애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더라니까?”
“아, 애가 벌써 초등학교를 들어갔어? 시간 정말 빠르다? 그때, 어린이집 있을 때 결혼하지 않았었나?”
“그게 벌써 15년 전이다.”
희정의 친구인 숙희는 희정이 어린이집에서 근무할 때 만난 동갑내기 친구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동갑이라서 쉽게 친해진 것도 있었고, 숙희가 결혼을 준비할 때, 희정이 많이 도와주면서 더욱 친해진 것도 있었다. 결혼을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한 숙희는 일 때문에 아이를 늦게 갖길 원했고, 그래서 첫 아이는 결혼 3년 차에 태어났다. 그 시기에 희정은 이미 다른 어린이집으로 옮겼었는데, 숙희의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를 축하하려고 일부러 시간을 빼서 숙희를 만나러 올 정도였다.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빠르긴 하다. 그럼 지금 몇 살이지? 12살인가?”
“나이는 그런데, 생일이 빨라서 지금 초등학교 6학년. 내년에 중학교 들어가.”
“동우 많이 컸겠네? 건강하지?”
“그럼.”
숙희는 모카커피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을 마신 뒤,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어떠니? 어린이집에 있을 때보다 수입이 배로 늘었다며?”
“일하는 시간이 두 배니까, 당연히 수입이 두 배로 느는 건 당연하지.”
“야, 그래도 거기서는 일지 쓰는 일은 없잖아? 장기자랑 준비한다고 옷 만들고, 노래 편집하고 하는 일 안 하지?”
“그런 건 없지.”
“그러니까, 완전히 놀면서 돈 버는 중이란 거잖아?”
부러움이 가득 담긴 숙희의 말에 희정은 부정하지 않고 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러우면 너도 얼른 일 찾아.”
한 달 전, 통화했을 때, 일을 그만두었다는 숙희의 말을 기억해낸 희정은, 숙희가 일이 없다 보니 자신의 직장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에휴, 나도 얼른 일을 찾아야 하는데.”
혼잣말하듯 꺼내는 숙희의 말에, 희정이 피식 웃다가 잠시 갸웃했다.
“일이 급해? 신랑은 뭐하고?”
“우리 신랑? 요즘 일이 좀···힘든가 봐.”
숙희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어쩐지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힘들어?”
“힘들지. 요새 안 힘든 사람이 어딨니? 너처럼 신의 직장이라도 찾지 못하면 다들 힘들게 살 거든?”
“왜 계속 ‘신의 직장’ 타령이야? 사람 민망하게.”
“부러워서 그러지. 아무튼, 큰 애도 내년이면 중학교 들어가는데, 그러면 돈도 많이 들 거고···. 아무래도 남편 수입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내가 빨리 일을 찾아야 하긴 해.”
“하긴, 요즘은 돈 없으면 애도 못 키우겠어. 물가가 왜 이렇게 올라갔는지.”
“내 말이. 요즘 집값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나라가 망하려고 그러는지···.”
주부의 애환 대신 넉넉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잔뜩 묻어난 대화가 시작되었다. 물가에서 시작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과 옆집 아줌마 지인이 돈 번 이야기, 사촌 언니 남편의 직장동료가 주식에 실패해서 한강에 갔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희정아.”
“응?”
“너네 아이들 후원자란 사람 말이야.”
“응.”
“연성 그룹의 막내 손자라는 말, 사실이야?”
“맞다니까?”
“그런 사람이 왜 고아들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선 거야?”
희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요즘은 덜하지만, 처음 이 일을 맡았을 때는 자주 듣던 질문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몇 번 보니까 그냥 애들을 좋아하고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
숙희가 고개를 살짝 내리고 목소리를 줄여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숨겨둔 아이, 같은 건 아니고?”
“그건 아닌 것 같더라. 솔직히 나도 의심하긴 했는데, 생김새도 많이 다르고, 2년 동안 지켜본 결과 그런 건 아닌 거 같더라고.”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 애가 외탁을 해서 안 닮아 보이는 걸 수도 있고. 솔직히 아무 득도 없는데 애들 둘을 그렇게 조건 없이 돌본다는 게 말이 돼?”
확실히 그런 의심을 할 만하다고 희정은 생각했다. 자기도 처음에는 그렇게 의심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의심을 품기에는 재훈이나 단유의 태도가 너무 자연스럽달까, 무언가 숨기는 기색 따위는 찾기 어려웠다. 주영 역시도 아이들이 어려움 없이 평범하게 자라기를 바랄 뿐, 특별히 관리한다거나 또는 방치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기 일이 바빠서 자주 찾지는 못하는데, 그렇다고 관심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나한테 자주 전화해서 묻는 것도 그렇고, 애들하고도 통화는 종종 하는 것 같으니까. 그냥 맞벌이하는 아빠 같달까, 뭐 내 느낌은 그래.”
그런 설명을 들은 숙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들을 많이 사랑한다는 거지?”
“그렇지.”
숙희가 잠시 커피를 마시며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 조용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대화를 열심히 했던 탓에 음악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점심은?”
“나온 김에 밖에서 먹고 들어가겠다고 이야기해놨어.”
“아, 너네 집에서 일해주신다는 분?”
“응.”
“진짜, 너 자리 잘 잡았다.”
“그렇게 생각해.”
이어서 두 사람은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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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좋다.”
병원 옥상에 올라온 재훈이 넉살 좋게 웃으며 팔을 펴자, 뒤따라온 친구가 피식 웃었다.
“좋기는요. 옷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코가 막힐 지경이구만.”
같은 학교 동기이자, 재훈보다 3살이 어린 ‘주례’가 코를 찡그리며 투덜댔다. 조금 전에 어떤 환자가 구토를 하는 바람에 신발과 바지, 가운에 토사물이 잔뜩 튄 참이었다. 그런데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임시변통으로 이렇게 쉼터에 나와 냄새를 몰아내는 중이었다.
“야,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냄새가 맡아져? 니 코는 개코냐?”
“추워요, 빨리 내려가요.”
“밑에는 쉴 곳이 없잖아. 여기 말고는 우리 같은 실습생이 쉴 만한 곳이 없어요.”
“···추운데 이게 뭐야.”
연신 투덜대기만 하는 주례는 그래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입술을 삐죽이다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햇볕을 쬐는 재훈에게 말했다.
“다른 선배님들한테 걸리기 전에 내려가시죠?”
“정 추우면 혼자 내려가던가?”
“어떻게 혼자 가요. 오빠랑 같은 팀인데, 오빠 없으면 저만 혼나잖아요.”
“화장실에서 똥때린다고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알았다, 알았어. 무슨 애가 이렇게 여유가 없어?”
재훈은 주례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려 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요.”
“응?”
“오빠,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
“오빠한테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소문.”
“뭐?”
재훈이 놀란 눈으로 주례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큰 웃음소리에 쉼터에 올라와 있던 환자 가족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였다.
“왜, 왜 그렇게 웃어요?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요?”
그래도 재훈은 쉽게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사람 민망하게 그렇게 웃어요?”
“야,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하냐? 그리고 애인도 없는 사람한테 애는 무슨 애야?”
“없어요?”
“자식은 없어. 숨겨놓지도 않았고.”
“네?”
“자식 아니고, 숨겨놓지 않은 아이가 있는 건 사실이야?”
주례는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다. 재훈은 싱긋 웃으며, 보육원에서 만난 단유와 명수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걔가 얼마나 똑똑하냐면,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팔불출처럼 자식 자랑하는 아버지랑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건만, 자식은 아닌 후원자라는 재훈의 설명을 들으며 주례는 흥미를 가졌다.
“진짜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시나 봐요?”
“솔직히 양아들 삼고 싶었는데, 주변에 반대가 심해서 못했어. 그래도 지금은 착한 동생 생긴 셈 치고 살아. 항상 천덕꾸러기 막내로 살아만 오다가 이런 동생 생기니까, 책임감도 생기고 든든하고 좋아.”
가족보다 더 든든한 동생이 있다고 믿는 재훈이었다.
“자주 만나요?”
“자주는 못 보지. 너는 니네 가족 자주 보니?”
“못 보죠.”
“똑같애. 병원에서 24시간을 보내는 판국에 어떻게 시간을 빼니? 그래도 가끔 통화는 하니까, 괜찮아.”
슬쩍 미간을 찌푸리는 재훈은 요즘 단유가 전교 1등을 놓쳐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는 소리를 덧붙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학교 공부 대신 다른 공부가 재밌어서 거기에 빠지는 바람에 시험공부를 전혀 안 했다는 거야. 전혀 안 했는데 전교 3등이래. 지금 자랑질하는 거냐고 찌르니까 한다는 말이 뭔줄 알아?”
“뭔데요?”
“전교 3등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그러냐는 거 있지?”
실실 웃음을 짓는 재훈은 영락없는 ‘아들 바보’ 아빠의 그것이나 다름없었다.
“어, 콜 왔다. 내려가자.”
재훈이 핸드폰을 흘겨본 뒤, 쿵쿵거리며 쉼터 출입구로 향했다.
“같이 가요.”
주례가 졸레졸레 뒤따라 뛰어갔다.
“지금 콜 온 걸 보니, 제 시간에 점심 먹긴 글렀네.”
주례는 재훈의 투덜거림에 맞장구를 치며 비상구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