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us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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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전교 1등을 놓친 일은 단유 본인에게는 별거 아닌 문제였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통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이시네요?”
하교 중이던 단유에게 걸려온 전화는 다름 아닌 주영이었다. 최근 주영은 갑자기 바빠진 탓에 단유와 명수를 자주 보러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요즘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선생님께 듣기는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말이야. 만약 선생님한테도 말하기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전화했어. 일 핑계로 바쁘다고 자주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나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해주지 않을래?
단유는 담담하게 별일 없노라고, 잠깐 다른 ‘재미있는’ 일에 매달리는 바람에 시험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랬다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혹시 누나는 제가 계속 전교 1등을 하는 걸 바라시는 건가요?”
―뭐? 아냐, 아냐. 그런 건 아니지. 굳이 전교 1등 같은 거 안 해도 학교생활 잘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꾸준히 공부만 한다면 내가 뭐라고 터치하겠어?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한 거니까. ···설마 내가 전화해서 귀찮다거나 간섭당하는 거 같아서 불편하다거나 한 건 아니지?
“그런 거 없어요. 오랜만에 누나 목소리 들으니까 좋기만 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전교 1등 놓쳐 보는 건데 그랬어요.”
단유의 농담에 마음이 풀렸는지, 주영의 목소리도 느슨하게 긴장감이 사라졌다.
―얘는 무슨 농담도. 굳이 할 필요는 없어도 하면 좋잖니?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전교 1등이란 타이틀이잖니?
“누나는 전교 1등 하니까 좋았었나요?”
―나? 나는 뭐, 나쁘진 않았어. 그런데 내가 당시에는 욕심이 별로 없어서 금방 놓았지만 말이야.
“저도 그래요. 별로 1등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도 않고, 아직은 제가 하고 싶은 공부 마음대로 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그럼, 그래도 되지. 너라면 뭘 하든 믿음직스러우니까 괜찮아.
웃음이 섞인 목소리 뒤에 ‘그래도 명수는 공부 계속하도록 해야 돼’ 라는 말을 덧붙였다.
“재훈이 형은 잘 지내나요?”
―아마도? 요즘 실습 2년 차라던가? 게다가 시험도 있어서 아마 정신없을 거야. 그러고 보면 참 사람이 무신경하다, 그치?
“지금이 한참 바쁜 시기라고, 지난 봄에 말씀하신 적 있잖아요. 괜찮아요. 저희는.”
―그렇게 이해해 주니까 고맙네.
몇 마디 사담이 더 오간 뒤에 단유는 핸드폰을 명수에게 건넸다.
“안녕하세요.···예. 공부 잘하고 있어요. ···아뇨, 굳이 와서 검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통화가 끝나고 명수가 히죽 웃으면서 핸드폰을 건넸다.
“왜?”
“다음에 오면 스테이크 사준대.”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단유의 성적 하락(?)이 미친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유의 전교 성적이 떨어진 와중에도 반 1등을 놓치지 않는 기염을 토한 덕분에 줄곧 반 2등을 놓치지 않던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등짝을 한 번 때렸고, 처음으로 전교 1등을 차지한 아이의 어머니는 전화기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돌렸다.
“엄마, 그러지 마.”
“뭘 그러지 마? 사람들한테 다 알려놔야 우리 아들이 다음에 또 전교 1등 하려고 기를 쓰지 않겠어?”
“그렇게 한다고 나 1등 못해.”
“어머? 얘 좀 봐?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 어떡해?”
“들어보니까, 이번에 단유 걔, 전혀 공부를 안 해서 그렇대.”
“걔가 앞으로도 공부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한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전교 1등 하는 거 안 어려워. 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이제부터는 니가 계속 전교 1등 하는 거야. 아, 엄마가 내일 너네 반에 피자라도 사서 갈까?”
“엄마!”
“그래, 그래야겠다. 너희들 피자 같은 거 좋아하지?”
“엄마!”
“조용히 해봐, 엄마 계속 전화 좀 하자. 넌 들어가서 공부해.”
아이는 현실을 모르는 엄마가 답답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전교 1등 하지 않는 건데, 라며 후회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답답한 마음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책상의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책을 접어 책장에 꽂아 넣은 뒤, 할 수 있는 한 가장 힘차게 침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쿠션의 반탄력에 살짝 몸이 튕겼다가 떨어진 아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단유 네 반을 직접 찾아갔다.
“나 한경재라고 이번에 니 덕분에 전교 1등 했어.”
“···축하해. 그리고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들었어. 니가 이번 시험 준비 별로 안 했다고. 그런데 물어볼 게 있어서.”
“뭐?”
“다음 시험 때는 공부 할 거지?”
“응?”
“다음, 그러니까 2학기 기말고사 때는 다시 전교 1등 할 거지?”
“그건 모를 일이지.”
“그냥 니가 전교 1등 해라.”
“응?”
“다른 사람이 1등 하면 내가 공부를 안 했다는 소릴 듣지만, 니가 1등 하면 그런 소리 들을 일 없으니까, 제발 1등 해라.”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피자 한 상자를 단유에게 건넨 뒤, 건투를 빌며 자리를 떠났다.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반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피자를 주었다. 얼마 안 되는 피자가 치열한 경쟁 끝에 아이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서 분쇄되다시피 조각난 채, 입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단유의 소식을 들은 또 한 사람, 상미가 달려왔다.
“너 전교 1등 못했다며?”
“그런데?”
“왜 이야기 안 했어?”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래?”
“우리 엄마가 니 걱정 하더라.”
“너희 어머니가 왜 걱정을 해?”
“나 때문에 너 성적 떨어진 거 아니냐고. 아니지? 내가 놀러 와서 공부 방해한 거 아니지? 아니면 아니라고 우리 엄마한테 이야기해줘. 엄마가 이제 니네 집에 자주 가지 말래.”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 때문 아니지? 그치?”
“아니야.”
“알았어.”
상미는 단유를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전교 1등 떨어진 일 말고 또 다른 일이 있어야 돼?”
“설마 전교 1등 놓쳤다고 이럴 리는 없는데.”
“무슨 말이야?”
상미는 아무래도 친절해진(?) 단유의 태도가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부담스러워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데 너 어디 가?”
“아, 호빵 산책이나 시키려고.”
단유는 마침 들고 있던 목줄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같이 갈까?”
“너 게임 하러 온 거 아냐? 명수가 오늘 학교에서 올 때부터 벼르고 있던데?”
상미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내가 봐줘서 그렇지, 걔가 나한테 상대가 안 돼. 지가 벼른다고 이길 수나 있겠어? 아, 비교하면 그런 거야. 내가 너 같은 거지.”
“무슨 비교가 그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전교 1등을 할 수 있지만, 일부러 안 한 거잖아? 나도 얼마든지 명수를 이길 수 있지만, 일부러 한 번씩 져주는 거야. 그래야 명수가 날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덤비지. 난 말이야, 만만한 상대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확실히 이럴 때 보면, 상미는 남자 같은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부분에서는 모르겠는데, 게임에 있어서만큼은 남자처럼 허세도 부리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기도 했다.
“둘이서 놀아. 나 혼자 잠깐 주변 돌다 올 거니까. 가자.”
말하는 사이 호빵의 목에 줄을 채운 단유는 호빵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호빵은 혀를 빼물고 깡충깡충 복도를 뛰어다니면서 기분이 좋다는 표시를 했다.
단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호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사람들을 분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호빵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유를 올려다보았다.
“넌 그냥 뛰고 싶을 때 뛰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잖아? 니 행동은 어느 정도만 관찰해도 이해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겠는데, 사람은 그게 어렵다는 소리야.”
호빵이 흥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머리를 살짝 털어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호빵이 먼저 안으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단유가 천천히 움직여 들어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소음이 나직하게 울리는 가운데, 단유가 혼잣말을 하듯 호빵에게 말을 건넸다.
“상미 쟤도 알고 보면 착한 구석이 있어? 그치? 자기 엄마 핑계 대면서 저렇게 이야기하는 거 보면 말이야.”
아마 상미네 어머니 역시 단유가 전교 1등을 놓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미가 이야기한 것처럼 상미에게 단유네 집에 놀러 가지 말라느니, 상미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미는 엄마 핑계를 대면서 단유의 마음을 떠보려 했던 것이고, 이를 단유가 알아챈 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네.”
계속된 단유의 말에 호빵이 또다시 흥하고 콧김을 뿜어냈다. 짖지 못하는 호빵의 습성이었다. 단유는 호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햇살 비추는 거리에 나온 호빵이 신나게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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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괜찮아요?”
“위에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니 의사가 중요하지.”
모처럼 집으로 찾아온 태호는 식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단유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듀엣곡 나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요? 벌써 활동하려는 거예요?”
“뭐, 이번에 사활을 걸기도 해서 단단히 준비하고 나가는 게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만 잡아먹고 있을 순 없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급한 편도 아니야. 뮤직비디오 찍는다고 바로 방송하고 활동하는 건 아니니까.”
뮤직비디오를 찍고 편집하고 공개를 한다고 해도 그 시간만 따지면 한 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회사에서 듀엣 출격 날짜를 12월로 잡고 있었다. 특별히 계절을 타는 노래는 아니지만, 아련한 감성의 미디엄 템포 댄스곡임을 감안하면 12월에 불러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작전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12월에 새 곡을 내는 경우가 드물었어. 아무래도 연말 분위기도 있고, 크리스마스라는 최대 이벤트가 끼어있는 달이다 보니 다른 노래가 나와도 묻힐 확률이 높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요즘은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별로 그런 분위기가 잘 나지 않는 사회 분위기다 보니, 오히려 이런 때에 음원을 내서 빈집을 노려보자는 전략이 먹힐 것 같기도 해.”
단유는 ‘네’하고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아무튼, 위에서는, 특히 박 이사님이 너를 뮤직비디오에 쓰는 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더라. 지난번 뮤직비디오에서는 신비감을 가진 소년의 이미지였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남성미가 묻어난 여린 소년을 연기해달라는 주문이 있었고. 이 두 개가 어떻게 어울리냐 했더니, 너를 지목하더라고.”
단유는 박 이사의 제안이 지난번 대화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박 이사라는 분은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다. 살짝 꼬아서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알아듣게 하는 화법을 구사하는 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런 화법에 뭔가 감추려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사실도 느꼈던 단유였다. 좀 더 많은 대화를 통해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박 이사는 정보를 꺼내야 하는 대화는 의식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깊이 있게 알아내기 어려웠다.
“박 이사님의 지지가 있다 보니, 지난번 일은 우리 회사 내부에서 없던 것처럼, 뭐 그렇게 흐지부지 덮기로 했는데, 사실 니가 가장 큰 피해자였으니까, 당연히 이렇게 네 의견을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직접 온 거야. 그런데 형이 왔는데, 명수는 왜 얼굴을 안 보이는 거냐?”
“명수는 축구부 활동 때문에 늦을 거예요.”
“아, 다리 다 나았구나?”
“네.”
“이제 곧 겨울인데, 축구부 활동이 가능하냐?”
“사실, 추계대회 시합도 2번째 시합에서 지는 바람에 더는 없고요. 그래서 대신 내년 봄을 대비해서 훈련을 받기로 했대요.”
“벌써 봄을 준비해? 이야, 중학교 축구부도 빡세구나.”
앞에 놓인 물을 살짝 마신 태호가 단유를 힐끔 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듀엣곡 들어봤다며?”
“네.”
“괜찮았다며?”
“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반신반의이긴 한데, 그래도 니가 그때 이야기한 알고리즘인가, 뭐 있잖아? 그걸로 분석해봤어?”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니 예상에 이번 노래는 어떻게 될 거 같아?”
태호는 아기동자가 빙의한 무당 앞에서 점을 보는 마음으로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