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 for m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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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아침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해 11월이 되자 마치 이제 겨울이라고 선언하듯 온도가 뚝 떨어져서 맨손으로 철봉을 잡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장갑이라도 가져올걸.”
명수가 엄살을 부리면서 손바닥을 문지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늘 그렇듯, 묵묵히 자기 운동을 계속했다.
“너 어제 보니까 힘 정말 세더라?”
장난 중에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렸던 일을 거론하자, 단유는 철봉에서 손을 놓고 내려왔다. 손을 탁탁 털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단유의 몸에서 하얀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너도 계속 운동하면 나처럼 될 거야. 그러니까 웬만하면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호흡을 좀 하지그래?”
“야, 그건 너무 어려워.”
“어렵긴? 그냥 숨 쉬는 건데 뭐가 어려워?”
“아, 몰라. 그냥 어려워.”
그냥 생각 없이 운동만 하기에도 벅찬데, 숨 쉬는 법까지 고려하면서 하려니 시쳇말로 ‘머리에서 쥐가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걸 지키면서 하면 운동 효과가 더 좋다니까?”
“그거 안 해도 충분하다고, 난. 타고난 몸이 좋아서 괜찮아.”
팔을 구부려 알통을 만들어 보이는 명수였다. 사실 명수도 또래에 비하면 몸이 많이 단련된 편이긴 했다.
“근데, 단유야.”
“응?”
“너 혹시 격투기 같은 거 배워 볼 생각 없어?”
“격투기? 왜?”
명수는 철봉 근처의 의자에 철퍼덕 앉아서 어깨를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그냥 이런 맨손 운동하는 것 보다는 그런 거 있잖아? 뭐라고 그러지? 막 관장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고, 그거 따라서 막 이렇게 하고.”
“체계적으로?”
“응. 그런 체계적으로 운동하는 거 어때?”
“지금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걸 배워야 하나 싶다.”
“그래도 기술 같은 것도 알면 좋잖아? 그러면 지난번처럼 싸움이 났을 때도 막 힘으로 안 하고 기술적으로 막 하면 막 좋잖아?”
“막 좋을 것도 없고, 그런 기술 없어도 싸움은 안 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야, 싸움이 네가 하고 싶다고 하고 안 하고 싶다고 안 하냐? 옆에서 시비를 걸면,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게 싸움인데?”
단유는 명수를 흘겨보며 물었다.
“너 최근에 싸운 적 있어?”
“나? 아니, 난 안 싸우지. 알잖아? 우리 반에 누가 나한테 싸움을 걸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명수였다. 명수의 말처럼, 어지간해서는 명수에게 싸움을 거는 일은 드물었다. 일단 명수가 겉보기에도 몸이 크기도 했지만, 성격이 워낙 활달하고 교우 관계가 좋은 편이라서 아이들이 명수에게 중재를 맡기면 맡겼지, 시비를 거는 일은 없었다. 특히 명수는 시비를 만들 일이 없는 게, 먹는 것만 아니면 대부분 친구에게 양보를 하는 편이었고 고집을 세우는 일이 적었다. 단유가 다소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려는 경향이 있음을 상기해 보자면, 확실히 명수가 단유보다는 시빗거리로 고생할 확률이 적은 편이긴 했다.
“나도 그래.”
명수랑 비교할 수 없지만, 단유도 최근에는 시비가 없었다. 시비 걸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야 옳겠다. 그 난리(?)를 피우고 동영상까지 뜬 마당에 누가 단유에게 시비를 걸까?
“그런데, 왜 갑자기 격투기 타령인 거야?”
“아니, 그냥. 진짜, 순수하게, 진심으로, 니가 체계적으로 운동하는 게 어떨까 해서 말했던 거야. 신경 쓰지 마.”
다른 운동도 많은 데, 왜 하필 격투기? 명수가 딴청을 피우며 자리를 피한 탓에 더 묻지는 못했다. 단유는 머리를 털고 다시 운동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격투기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은 초등학교 때 하긴 했었다. 그 당시에는 ‘종합 격투기’ 따위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저 잘 피할 수 있는 운동으로 ‘권투’를 고려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런 운동을 배우는데도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이내 포기해버렸던 기억이 있었다. 돈을 들여가면서 꼭 배워야 할 만큼 절실하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맞지만 않으면 되지 뭐.’
단유는 운동법을 가르쳐준 디아트리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운동을 이어나갔다.
****
1학년 3반 교실이 뒤집힐 정도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기쁨의 환호성이 아니라 놀람의 탄성이었다. 정작 그 놀람을 제공한 주인공,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교탁 앞으로 나가 선생님 앞에 섰다.
“너 요즘 무슨 일 있냐?”
“아니요.”
“정말?”
“네.”
“···그럼 나중에 수업 다 끝나고 잠깐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할까?”
“네.”
단유는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조용히 ‘성적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옆자리에 앉은 병수가 힐끔 보더니, 물었다.
“너 진짜 공부 안 했어?”
“봤잖아?”
“어떡해?”
“뭘 어떡해?”
“이럴 때 위로해줘야 하는 거 아냐?”
단유는 피식 웃으며 병수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난 아무렇지 않아. 말했잖아? 등수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단유는 ‘3/315’ 라고 적힌 성적표를 곱게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솔직히 말하면, 위로를 해야 할지 아니면 축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쉬는 시간에 언제나처럼 달려온 지태의 말이었다.
“무슨 말이야?”
“전교 1등을 놓친 것에 대해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부를 하지 않고도 전교 3등을 하는 너의 무시무시한 능력에 축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소리야.”
“별말씀을.”
“별말씀이라니! 솔직히 너 그런 식으로 나오면 너무 재수 없다고!”
“최근에 재수 없다는 소리를 몇 번 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재수 없는 게 맞는가 보다.”
“헐. 그거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쉬는 시간 다 됐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알았다, 알았어.”
지태는 채윤과 자리로 돌아왔다. 채윤은 책을 챙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단유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한 표정으로 책을 보는 중이었다. 확실히 자신의 말처럼 단유는 전교 1등을 놓친 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았다.
“단유, 조금 변한 것 같지 않아?”
“응? 뭐가?”
“딱,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려운데, 조금···편해졌달까?”
“야,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친구가 편한 게 당연한 건데, 너, 그럼 지금까지 단유가 불편했다는 소리야?”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
채윤은 말을 이으려다 말았다. 지태야 워낙 눈치가 없고, 또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성격이라 단유의 딱딱한 성격에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늘 조심하고 눈치를 보던 습성이 있던 채윤에게 단유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던 친구였다. 동갑이고 같은 교실에 있는 이였으니 ‘친구’라고 부르지, 만약 길에서 만난 낯선 이였다면 ‘동갑’이라고는 볼 수 없을, 그런 어른스러움이 있는 친구였다. 그런데 최근 중간고사도 등한시하고 뭔가에 매달리는가 싶더니, 조금 대하기 편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교 1등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좀 더 근원적인, 단유의 변화가 있었다고 보이는데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말로 꼬집어 표현하기 힘들었다.
‘말을 편하게 받아줘서 그런가?’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임은 분명했지만, 대화가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는 ‘느낌’이 있던 단유였는데, 오늘의 단유는 뭔가 대화가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마치 또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렇게 표현하려니 그동안의 대화는 뭐였냐는 자문(自問)에 적당한 대답이 없었다.
‘느낌일 뿐이니까.’
마침 선생님이 들어와서 교탁을 두드려 주의를 환기시키는 노력에 채윤은 단유에 대한 생각을 깊숙이 밀어 넣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
“야! 단유야! 놀자!”
집에 돌아왔더니 상미가 대뜸 소리를 지르며 반겼다.
“갑자기 뭐야?”
“나 시험 끝났어! 놀자! 명수야! 놀자!”
“그래! 놀자!”
역시 명수는 뜬금없는 상미의 제안도 반갑게 받아들였다.
“노래방 갈까?”
명수는 며칠 전 시험 끝나고 갔던 노래방에서의 일이 기억에 남아 물었다.
“오오! 괜찮은데? 난 니들 올 때까지 뭐 하고 놀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역시 인명수!”
두 사람은 거실이 울릴 정도로 파이팅 넘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며칠 전에 갔다 왔는데, 또 가?”
“뭐야? 니들끼리 노래방 갔었어?”
상미에게 명수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상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주먹으로 명수의 어깨를 툭 쳤다.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때 나 시험이었으니까. 오케이, 가자! 레츠 고!”
단유는 업이 잔뜩 된 상미를 보다가 물었다.
“시험 잘 봤어?”
상미는 순식간에 얼굴을 마귀처럼 일그러뜨리며 단유를 노려봤다.
“김단유! 안 본 사이에 너 왜 그렇게 못되졌어? 이번 시험 때는 공부도 안 가르쳐주더니, 이제 막 시험 끝내고 홀가분해진 마당에 그런 걸 묻기 있기야, 없기야?”
허리에 손을 얹고 콧김을 과장되게 뿜어내며 들이대는 상미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은 뒤, 상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형식적인 인산데, 뭘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오늘은 널 위해서 시간 내줄 테니까 걱정 말고 나가자. 아, 명수야. 이번에는 동전 좀 많이 챙겨가자.”
“어, 그래.”
단유가 다시 미소를 짓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상미가 방으로 들어가는 명수를 붙잡았다.
“야.”
“왜?”
“단유, 쟤 왜 저래?”
“뭐가?”
“쟤, 좀 이상해졌는데?”
“뭐가 이상해? 알아듣게 말해.”
“넌 단유 안 이상해? 단유 변한 거 없어?”
“없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나도 옷 갈아입고 나올게.”
명수마저 방으로 들어간 뒤, 상미는 거실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단유 쟤 좀 변하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펜을 멈추고 잠깐 상미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다? 잘 모르겠는데? 왜 어떻게 변했는데?”
“애가···갑자기 착해졌어요.”
‘착해졌다’는 소리를 누가 들을까 봐 속삭여서 말하는 상미였다. 선생님은 피식 웃으면서 상미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단유는 원래 착했어.”
“아니에요. 아니, 착한 것도 있지만, 저렇게 착하게 말하는 애가 아니라고요. 맨날 나한테 뭐, 왜, 아니, 이렇게만 말하던 애란 말이에요.”
“그럼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지.”
“기분이 좋아요?”
“그래. 상미를 오랜만에 봐서 기분이 좋은가?”
“네?”
상미는 괜히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야, 가자.”
명수의 목소리가 상미의 정신을 깨웠다. 상미는 얼른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는 명수에게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던 선생님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조심해서 놀다 오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
“선생님.”
“응?”
“제 호흡이 그렇게 길어요?”
“뭐?”
보컬 트레이너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나윤은 단유가 해줬던 말을 트레이너에게 전했다.
“확실히 니 노래에 쪼가 있어. 그런데 걔 말대로 이런 노래에는 또 잘 맞아들어가는 것도 사실이지. 이야, 그렇게 들으니까 걔가 음악을 전혀 모르는 애는 아닌가 보네?”
옆에서 듣던 수련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때 단유가 그렇게 말했어?”
“네.”
“그리고 또 다른 말은 없었고?”
“솔직히··· 잘 기억이 안 나요. 뭔가 어려운 말들이 있었는데,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지···. 그런데 우리 노래가 좋다고 했어요. 아, 그리고 언니랑 같이 노래 부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도 했어요.”
“그래? 흐음. 그건 좋은데? 우리의 공식 팬 1호가 좋다고 했으니 출발이 좋은 셈이잖아?”
“그렇죠.”
수련이 잠시 나윤을 쳐다보다 물었다.
“그런데 나윤아.”
“네, 네?”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네?”
“너 얼굴이 빨간데? 귀도 빨갛고?”
“네? 그래요?”
“누가 보면 머리랑 얼굴이랑 같이 염색한 줄 알겠어?”
나윤이 놀라서 연습실 벽에 붙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뒤, 두 손바닥으로 뺨을 가렸다.
“왜 이러지?”
“왜 그럴까? 갑자기 왜 그럴까?”
수련이 능청스럽게 운율을 붙여가며 나윤을 몰아붙였다. 나윤은 죄지은 것도 없이 죄지은 사람마냥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돌렸다.
“저, 잠깐만 바람 쐬고 오, 올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연습실 밖으로 뛰어나가는 나윤이었다.
“쟤 왜 저래?”
트레이너가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자, 수련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저 나이 때 애들이 다 저래요.”
“응?”
“연습생들 보면 다들 저렇게 놀더라고요.”
특히 나윤은, 수련이 보기에 순진함으로는 1등급 수역에 사는 생물이었다.
“이거 남의 귀한 팬, 뺏기는 거 아냐?”
수련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흐뭇한 마음으로 원기회복하여 다시 연습을 매진해야지, 다짐해보는 수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