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90화 (290/956)

Sing for m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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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연습실의 열기와 방음차단문으로도 막지 못하던 음악 소리를 기억하던 단유는 3층 기획사 사무실의 조용한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교무실에 갈 때도 이렇게 엄숙하고 진지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역시 회사라서 그런 걸까, 라고 잠시 생각해보던 단유였다.

앞서 걷던 태호가 흘깃 돌아보며 ‘긴장 안 해도 돼’라고 말해주었지만, 단유가 보기에 자신보다 태호가 더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던지, 태호는 이사실 앞에서 자신이 문을 두드리고도 두드린 소리에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이사님, 장태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태호는 잠시 기다리라고 속삭인 뒤, 혼자 이사실로 들어갔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단유는 다시 한번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색 벽과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닥이 마음에 들었다. 이사실로 들어오는 복도 중간쯤에 열린 문을 통해 살짝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기획사 사무실을 생각했을 때, 다소 소란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에 반해, 실제로는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여서 단유는 몰래 감탄을 했다.

“단유야.”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문이 반쯤 열려있고 그 사이로 얼굴만 살짝 내민 태호가 단유를 부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단유입니다.”

“어서 와요. 거기 앉아요.”

“네.”

박 이사라는 분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낯설지 않았다. 마치···예전 보육원의 원장을 보는 기분이랄까? 다만 보육원 원장보다 훨씬 예의를 지키려는 단정함과 표현되지 않는 엄숙함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니 반갑네요. 단유 학생에 대해서는 여기 장 매니저 통해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단유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음, 잠깐만.”

박 이사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책상으로 돌아가 몇 가지 서류들을 확인한 뒤, 단유에게 물었다.

“밥 먹었어요?”

저녁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직 시간이 5시를 겨우 넘긴 시간이라 원래 먹는 시간대는 아니었다.

“아직 안 먹었는데요?”

“그럼 같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사실 내가 점심을 챙겨 먹질 못해서 말이죠. 괜찮죠?”

단유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여서 사인을 보냈고, 박 이사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태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 매니저는 시간이 어떻게 되나? 괜찮으면 같이 갈 텐가?”

“아닙니다. 전 일이 남아서.”

태호는 재빨리 답을 했다. 그리고 가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박 이사의 스타일상, 만약 진짜 같이 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면, 저렇게 묻기보다는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지금 저렇게 둘러서 표현하는 것은 ‘웬만하면 두 사람이 이야기할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주게’ 라는 내용이었으리라.

“그런가? 아쉽군. 그럼 다음에 같이 먹도록 하고, 단유 학생은 같이 일어나지.”

****

“어? 단유만 두고 혼자 내려오신 거예요?”

연습실 앞 정수기에서 물을 받던 수련이 태호를 보고 물었다.

“박 이사님이랑 단유는 식사하러 갔어.”

“왜 같이 가지 않으시고요?”

“···이사님이 단유랑 따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눈치껏 빠졌어.”

수련은 물컵을 들고 가만히 서 있다가 태호에게 말했다.

“단유, 혼자 괜찮을까요?”

“야, 걔가 어디 보통 애도 아니고, 괜찮을 거야. 그리고 박 이사님이 무슨 혼을 내겠어, 아니면 처음 만난 사이에 화를 내겠니? 별문제 없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아직 14살인 단유인데 그런 어려운 자리에 홀로 보내는 게 편치 않게 느껴졌다. 수련은 미지근하게 온도를 맞춘 물을 천천히 마시면서 단유를 걱정했지만, 여기서 무슨 걱정을 한들 도울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만 생각하고, 연습이나 해. 곡은 어땠어?”

“나쁘진 않았어요. 아니, 좋아요.”

“그래? 나윤이도 좋대?”

“네. 그런데 노래가 조금 부르기 어렵게 나와서 연습할 때 조금 힘들긴 해요.”

“그래? 그래도 수련이 너라면 잘할 거야.”

태호의 믿음이 담긴 응원에 수련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습실로 돌아가는 수련의 뒷모습을 보던 태호는 잠시 자신이 직접 받아왔던 곡을 떠올려 보았다. 태호가 매니저라서 그런 게 아니라 확실히 좋은 곡이었다.

하지만 좋은 곡이라고 생각하고 활동했던 곡들이 꼭 성공하지는 못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자신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잠시 애들이 연습하는 모습이라도 볼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털고는 위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편, 연습실로 돌아온 수련은 같이 떠온 물을 나윤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원래는 나윤이 가서 물을 떠 와야 하건만, 수련이 기어코 공기도 쐴 겸해서 떠오겠노라며 나간 터라 연습실 안에서 좌불안석으로 기다리던 나윤은, 수련이 등장하자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공손하게 컵을 받아들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목을 보호해야 한다’는 수련의 의지로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만 했던 나윤은 그래도 마른 목에 수분이 보충되니 기운이 나는 느낌이었다.

“아, 맞다. 아까 단유 왔었는데, 인사 못 했지?”

“단유? 단유요? 걔 왔어요?”

“어머, 얘 봐라? 단유 이야기하니까 얼굴 빨개지네?”

“네? 아니에요, 놀리지 마세요. 그런데 단유는 오늘도 레슨 청강하러 오는 거예요?”

“아니. 이사님이랑 독대하러 갔어.”

“이사님이랑 독대요?”

“응.”

이사님과 독대를 한다고 생각하면 괜히 주눅이 드는 나윤이었다. 나이가 많으신 어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회사에서의 위치가 대표님 다음으로 높으신 분인지라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자기보다 어린 단유가 과연 이사님이랑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무는 다 외웠어?”

“대충은요.”

“그럼 이제 맞춰볼까?”

“네.”

듀엣이라서 그런지, 예전보다 안무를 맞추는 시간은 줄었는데, 대신 안무가 좀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복잡하게 동선을 옮기는 안무가 아니어서 외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두 사람은 거울을 보며 안무를 맞추기 시작했다.

“다시.”

나윤은 서둘러 음악을 껐다가 다시 재생시키기를 반복했다. 수련은 사실 춤보다 노래가 나은 멤버였지만, 팀에 피해를 끼치기 싫다는 생각에 안무 연습에 가장 열심인 멤버이기도 했다. 오랜 연습과 노력으로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메우는 멤버였기에, 듀엣 안무를 맞추는 지금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

“어서 오세요, 이사님. 오랜만이시네요.”

“안녕하세요. 자리 있죠?”

“그럼요.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박 이사의 뒤에 따라오는 단유를 보더니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분···이신가요?”

박 이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배고파서 온 거니까, 편하게 해주세요.”

“아, 예.”

사장은 안쪽의 룸으로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이윽고 넓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박 이사는 단유의 기색을 살피며 웃음을 지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내가 배가 고파서 온 거니까, 온 김에 같이 먹자는 것뿐이에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요?”

“혹시 마음대로 와서 불편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여기가 맛은 있으니까 아마 입에 맞을 거예요.”

그 사이 종업원이 들어와 반찬을 놓아주었다.

“한식 A코스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무 무늬를 그대로 살린, 밝은 원목 소재의 창틀과 푸른 창호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커다란 창이 박 이사의 뒤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의 시간대라 그런지 빛이 서린 푸른 창과 은은한 조명 덕분에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도는 룸이었다.

“어린 친구 취향에는 안 맞을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곳이 맛도 있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좋은 곳이라 불렀어요.”

“분위기가 좋네요.”

“그래요? 허허, 어린 친구 취향에도 맞다니 다행이로군요.”

단유는 잠시 박 이사의 눈을 마주하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말을 편하게 하시죠?”

“아, 그래도 되겠어요?”

“네.”

“그래, 알았다. 아, 거기 앞에 있는 녹두전이 꽤 맛있어. 간장을 살짝 찍어서 먹어보게.”

단유는 일단 박 이사의 지시에 따랐다. 그 뒤로도 박 이사는 말은 편하게 하면서도 정작 본론이라 여길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단유는 박 이사가 평범하게 사담을 늘어놓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아이라면 모를까, 단유는 이런 대화가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가 만났던 여러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이런 대화 방식도 존재했었으니까. 뭐 그래도 대화 끝에 감옥에 끌려간다거나 하는 결과는 없을 테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식사가 나오고 잠시 조용해지나 싶었는데, 한동안 여러 가지 가벼운 질문을 던지던 박 이사가 이번에는 단유의 학교생활에 대해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가벼운 이야기였지만, 식사하면서 나누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가볍게 입가를 정리하던 박 이사가 말했다.

“젊은 친구가 참 차분하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박 이사가 단유를 관찰하듯, 단유 역시 박 이사를 관찰했다. 차라리 박 이사 같은 사람이 단유는 편했다.

“그래, 사실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 했는데, 자네 학교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하지 못했네. 나도 과거 학창 시절을 보냈던 기억도 새로 하게 돼서 기분이 좋았거든.”

“네.”

박 이사는 물수건을 손가락 하나하나를 세심히 닦아냈다.

“듣기로 장 매니저가 자네에게 계약 이야기를 꺼냈는데, 자네가 싫다고 했다면서?”

“아, 네.”

“이유를 직접 들어볼까?”

단유는 차분하게 태호에게 얘기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음, 그래. 학업이라. 확실히 자네 학교 성적을 보면 그쪽으로 대성할 가능성도 보이지. 게다가 재미까지 느끼고 있다면, 이쪽 업계 쪽으로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기도 할 테고. 이해는 가네.”

박 이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 이쪽 업계도 요즘은 많이 바뀌어서, 고학력자임에도 연예계에 진출한 이들이 적지 않단 말이지. 단순히 국내 최고 클라스의 대학을 나온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학위를 딴 이들도 연예계로 진출하고 있지. 그 이유가 뭘까? 단순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동경? 혹은 몇 안 되는 억대 재벌이 되기 위해?”

박 이사는 단유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요. 제가 그쪽으로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말이죠. 평소에도 잘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방금 말씀해주신 분들이 누구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지.”

박 이사는 싱긋 웃음을 짓고는 손깍지를 끼고 단유와 시선을 마주했다. 50대 박 이사의 눈이 나이에 맞지 않게 초롱초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그랬어. 연예인을 하찮게 보거나, 혹은 딴따라라고 낮게 보는 경향도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선망의 대상이고 동경하는 아이돌들이 돼버렸어. 왜일까? 잘생겨서? 노래를 잘해서? 연기를 잘해서? 어쩌면 다 맞는 말이겠지. 그런데 내가 보는 연예인은 조금 다른 관점이야. 다른 직업도 그렇지만, 연예인이란 직업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고 있거든.”

박 이사의 목소리는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 깃든 진심은 생생하게 전달되는 중이었다.

“더 이상은 남이 써준 노래를 그저 부르기만 하는 가수는 없어. 더 이상은 남이 써준 대본을 그저 따라 연기하는 배우는 없어. 현장에서 자신의 감정을 살려서 노래하는 가수가 더 인기를 얻고, 대본에 나오지 않는 대사와 감정으로 현실감을 덧입히는 배우가 더 인기를 얻어. 예능도 마찬가지야. 남이 써주는 대본대로 움직이는 연예인은 마네킹이나 마찬가지야. 현장에서 분위기에 맞춰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는 연예인이 방송을 만들어내고, 프로그램을 살리지.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난 연예인도 하나의 크리에이터(Creator)라고 생각하네. 이제는 예전 방식의 연예인들은 성공할 수 없어. 점점 더 자기 것을 가지고 있고,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연예인이 성공할 수 있다고. 바로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가 되어야만 이 연예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거지.”

박 이사는 살짝 입을 축이고 호흡을 고른 뒤, 여전히 정자세로 자신을 마주하는 단유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걸 아무나 하지 못하더란 말이지. 아무나 했으면 다 성공했겠지만, 아쉽게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란 말이야. 방송에 익숙한, 나이가 많은 연예인들은 이전의 방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기 것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혹은 이전에 만들어놓은 자신의 이미지를 재활용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아. 이래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최신 유행에 발을 맞추기 힘들지. 반면에 젊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잘 해내. 개성이 넘치는, 이라고 수식어를 붙이곤 하지만, 사실 개성을 넘어서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 거야.”

단유는 몇 가지 의문이 생각났지만, 일단 박 이사의 말이 끝날 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렸다.

“그런데, 자네에게서 그 모습을 봤어.”

“저요?”

단유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박 이사가 등을 바로 세우며 웃음을 지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머리 좋은 연예인들이 많이 유입되는 이유? 그들은 ‘연예인’이 아니라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크리에이터’로서 성공하기 위해 이 시장에 들어오는 것이야.”

박 이사의 눈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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