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70화 (270/956)

소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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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지구 온난화’와 ‘짧아진 계절’이 긴소매를 입는 이유였다. 더러 어떤 이는 긴소매만이 아니라 검은 마스크까지 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감기예요?”

“아니.”

수련의 대답에 단유는 마스크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알아보잖니? 이래 봬도 연예인이랍니다.”

수련의 능청에도 단유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예전이야 잘 몰라서 그랬지만, 지금은 갤럭시즈가 얼마나 인기가 없는 그룹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반에서도 갤럭시즈라는 걸그룹을 아는 이는 평소 연예계에 관심이 많던 민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다르다. 단유와 엮이면서 갤럭시즈의 이름 정도는 다들 알게 되었으니까.

“무관심보다는 낫지.”

수련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연예인들이 많다고 했다. 한 번이라도 들어본 이름이라야 인터넷에서 동영상이라도 한 번 보게 되고, 음악사이트에서 스트리밍이라도 한 번 한단다. 이름도 모르는 가수의 노래 따위는 조용히 묻힐 뿐이라고.

“이름을 모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단유는 어쩐지 그 말이 남다르게 들렸다.

“그런 의미라며, 오히려 얼굴을 드러내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갤럭시즈의 얼굴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가요프로그램에도 몇 번 나오고 예능에도 몇 번 나왔다고 하는데도 주변의 반응은 ‘그게 누구’ 같은 반응뿐이었으니까.

“그냥 기분이라도 내려고 한 거니까, 그만 딴지 걸래?”

수련이 툴툴거리며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서 게임을 하는 명수를 쳐다보았다.

“누구?”

명수 옆에 앉은 상미를 가리키는 수련에게 단유는 간단하게 소개했다.

“동네 아는 애예요.”

상미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뒤에야 두 사람은 게임 패드에서 손을 놓았다.

“안녕하세요, 언니 너무 예뻐요.”

“어머, 고마워요.”

예전에 인터넷 방송할 때, 수련이 저런 목소리를 냈던 기억이 났다.

“접대용 목소리가 따로 있나 봐요?”

명수도 그걸 인지했던 모양인지, 대놓고 물었고 수련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집에 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한 후에, 다시 게임에 중독된 두 사람은 게임 패드를 잡았고, 수련과 단유는 식탁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바쁘지 않아요?”

“바쁘긴. 스케줄이 완전히 끊겨서 지금은 레슨받는 시간만 빼면 완전 자유다, 자유.”

바쁜 연예인에게는 금 같은 시간이겠지만, 수련과 같은 경우라면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라고 했다. 시간이 널널할수록 초조하고, 쫓기는 기분이라고. 텅 빈 달력을 볼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는 첨언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허무한 것은 없으리라.

수련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넌 좀 어때?”

“저요? 별일 없는데요?”

돌이키기 두려울 정도로 후회가 되던 일이 있었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기에 단유는 별일 없이 잘 지냈노라 답하며 어물쩍 넘겼다. 그런데 수련의 경우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사실 너 보러 오기가 조금 미안해서 말이지, 시간이 있어도 자주 오질 못하겠더라.”

“왜요?”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

지난 사건 이후, 갤럭시즈는 인지도를 올리긴 했다. 그런데 그 인지도라는 게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던 탓에 방송을 자제했고, 대신 인터넷 개인 방송 등으로 팬들을 만나는 데 주력을 했다는 수련의 설명이었다. 사실, ‘방송을 자제’했다는 표현은 오해가 있을 수 있었다. 스케줄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야 할 매니저가 업무에서 배제되어 있던 탓에 방송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장이라는 사람은 애초에 갤럭시즈를 밀어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었고 말이다.

아무튼 수련의 입장에서는 단유의 희생을 발판삼아 인지도를 올리려 했던 회사의 태도에 분노했고, 그런데도 결국 회사에 소속된 가수로서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리려 했던 자신에게 실망감이 컸다는 이야기였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갤럭시즈도 피해자로 생각했던 모양이지.”

인터넷 페이지에 ‘갤럭시즈’라고 적혀 있으면, 클릭이라도 한 번 더 하게 되고, 들어가서 ‘피해자’들이 어떻게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소통에서 시작해, 갤럭시즈의 팬이 되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피해자’라고 말하는 수련의 말에 묻어난 미안한 감정에 단유는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팬이 늘었나 봐요?”

“조금?”

이전보다 인터넷 방송을 시청하는 시청자 수도 늘었고, 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활동이 재개하기를 기다리는 응원의 글도 많아졌다는 수련의 말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갤럭시즈를 알게 되어 지난 앨범들을 찾아 듣고 팬이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단다.

이래서 ‘인지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수련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또 단유에게 미안하다고.

“태호 오빠가 다시 매니저를 맡긴 했는데, 지난번에 반강제로 활동이 종료된 탓에 지금은 다른 행사 스케줄을 잡기도 힘들어. 그래도 뭐라도 하려고 움직이는데, 그래서 바쁜 것도 있고. ···뭐 그런 이유도 있지만, 역시 지난번 일이 마음에 많이 걸리나 봐. 그래서 널 보러 오기가 미안하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전혀 신경 안 쓰니까요. 저한테 무슨 피해가 있던 것도 아닌데요, 뭘.”

인터넷에 남은 기록들과 사람들의 기억들이 단유의 미래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둥의 말들이 있었지만, 단유는 현재를 살아가는 중이고, 현재의 단유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단유의 일상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단유 역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오빠 입장에서 또 안 그런가 봐. 그 뒤로 연락도 잘 안 하잖아? 그치?”

농담처럼 계약하자고 말하던 태호 형의 방문이 잠잠한 이유가 그런 것이라면, 썩 좋지는 않았다.

“괜찮다고 전해줘요. 정말 전 신경 안 쓴다고. 아, 그리고 형이 준 게임기는 명수가 아주 잘 쓰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보시는 것처럼.”

그 말처럼 명수와 상미는 게임 패드에서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그나저나 저렇게 예쁜 애가 친구라니. 둘 다 싱숭생숭한 거 아냐?”

은근한 어조로 묻는 수련의 눈웃음에도 단유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짧은 한숨을 쉬면서, ‘진짜 모습을 몰라서 그런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진짜 모습? 그게 뭔데?”

뭔가 뒷담화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진짜 모습’을 감춘 것은 눈앞의 여인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원래 여자들은 그래요?”

저도 모르게 입 밖에 나온 말이었다. 수련은 피식 웃었다.

“그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보고 구미호 같다고 하잖아?”

본인이 그렇게, 능청스럽게 대답하니 단유로서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뭐 하나?”

상미와 명수에게 시선을 던진 수련이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뭘 하다니요?”

“심심해서.”

심심해서 놀러 왔는데, 또 심심하시다니 같이 놀아달란 말인가?

“다른 누나들이랑 같이 놀지 않고 왜 오셨어요?”

그 말에 수련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수련이 단유를 보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 이대로 끝날지도 몰라.”

‘우리’가 ‘갤럭시즈’를 뜻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끝난다’는 말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끝나다니요?”

“···해체한다고.”

조금 전까지 인지도가 늘어서 팬도 늘었다고 하지 않았나?

“팬이 늘었으면 다음에 컴백할 때 좋은 성적도 기대할 수 있던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수련은 말을 잇지 못했다.

****

걸그룹이 아니더라도, 아이돌 그룹이라면 스케줄을 소화하는 중에도 레슨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주간에 시간이 나지 않는다면 새벽에라도 레슨을 받아야 하는 게 아이돌 그룹들의 일상이었다. 물론 긴 연습기간을 거쳐 완성형 아이돌로 데뷔하는 경우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긴 연습생 생활을 거치더라도 완성형에는 한참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았고, 회사의 사정상 빨리 데뷔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 데뷔하고도 레슨을 받으면서 ‘완성형’에 도달코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중소기획사의 아이돌 그룹에 이런 경우가 많았다.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아이돌 그룹을 양성하는데, 수익이 없이 3년, 5년 연습만 시키고 있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대형기획사야 비교적 여유가 있어서 긴 연습시간을 주고 그 기간을 버틴 이들을 완성형으로 무대에 올리지만, 중소기획사는 적당히 연습시킨 후 무대에 올려 대중에게 선을 보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얻는 수익을 다시 레슨에 투자하여 천천히 완성형으로 끌어올린다는 전략이었다.

갤럭시즈 역시 그런 전략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룹이었다. 리더인 수영은 20살에 회사와 계약을 맺고 4년을 연습한 뒤에 갤럭시즈로 데뷔했다. 반면, 수련의 경우에는 1년 만에 데뷔한 케이스였다. 수련이 갤럭시즈에 합류하기 전까지 그룹 내에 확실하게 보컬 실력을 보일만 한 멤버가 없었는데, 수련이라는 뛰어난 메인보컬이 합류하면서 데뷔가 가시화된 것이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좀 더 빨리 아이들을 데뷔시키기 위해 수련이라는 멤버를 충원한 셈이지만, 그룹 내에서 보면 수련은 다른 아이들과 친해질 시간이 부족했던 셈이기도 했다. 더구나 수련의 성격이 남달랐던(?) 탓에 언니들과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었다. 사실 그런 문제만 없었다면, 수련이 합류하자마자 데뷔를 했겠지만, 멤버간 화합이 문제가 되면서 1년이나 데뷔가 늦춰진 셈이었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봉합한 뒤, 데뷔한 갤럭시즈는 모두의 소망과 달리 저조한 성적을 거두면서 첫 번째 활동을 마무리했었다.

“괜찮아. 우린 이제 시작한 거니까, 좀 더 노력하면 얼마든지 톱그룹이 될 수 있어. 우리 서로의 실력을 믿자. 다들 열심히 노력했잖아.”

태호가 아이들을 다독이면서 실력을 운운했지만, 그래도 가요계에서 ‘완성형’에는 미치지 못한 면이 많았기에 밤마다, 혹은 새벽마다 보컬 레슨과 댄스 레슨을 받아야 했다.

“자, 이번에 곡도 좋아. 이번엔 꼭 성공할 수 있어. 알았지?”

첫 번째 활동이 실패한 이유는 곡이 좋지 않아서라는, 회사의 높으신 분들이 들으면 화를 냈을 이야기지만, 아이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과장스레 말하는 태호의 응원이었다. 그리고 그 응원에 힘을 얻고 갤럭시즈는 늘 밝은 모습과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선보였다. 첫 번째 활동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회사의 덕분인지 스케줄도 첫 번째 활동 때보다 두 배로 많아졌고, 지방행사 스케줄도 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갤럭시즈의 음원 성적은 형편없이 차트 아웃이 되었고, 사람들의 기억에 이름 한 줄도 남기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세 번째 활동은 모처럼 좋은 곡도 얻었다고 서로들 좋아했지만, 역시나 이유도 모른 채, 스케줄이 줄었고, 게다가 인터넷에 이상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공중파 방송 자체를 줄여버렸다.

“이번 곡 좋지 않았어?”

보컬 레슨 중간에 잠시 쉬던 차에 명지가 물을 마시며 말했다. 명지는 수련이 들어오기 전 메인보컬로 인정되던 멤버였다. 나름대로 실력에도 자신이 있었건만, 수련이 들어오면서 메인보컬에서 리드보컬로 밀려났다.

“좋았죠.”

막내 예영이 명지에 이야기에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지수가 냉큼 말을 받았다.

“좋긴. 솔직히 그 곡이 어디가 좋아? 킬링 파트도 없고, 싸비도 평범하기만 하고. 난 그 곡 받고 진짜 사람들이 듣는 귀가 없나 의심했어.”

그런 곡을 활동곡으로 지정한 윗대가리들이 문제야, 라는 지수의 말에 명지는 입을 다물었고, 내심 동의한다는 듯 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이왕 입을 연 김에 속에 꾹꾹 눌러놨던 것들을 다 풀어보자는 심산인지 멈출 줄 몰랐다.

“그리고, 안무도 노래랑 어울려? 노래가 하나도 안 섹시한데, 무슨 섹시컨셉이야? 그래 놓고서는 무슨 대중성을 운운해? 곡이나 제대로 만들고 대중성 이야기하라고 그래.”

평소에 회사에 불만이 많았던 것은 다른 멤버들 역시 비슷했다. 좀 더 활동할 수 있다는 멤버들의 의견도 묵살하고, 활동을 중시시킨 예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지방행사에나 출연시키고 있으니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해야 할까?

“그만해. 너도 잘하는 거 없이 그렇게 불만만 말한다고 뭐가 좋아져?”

연습실 유리에 기대어 있던 수영이 지수에게 제동을 걸었다.

“이런 말이라도 안 하면 답답하잖아요. 언니는 안 그래요?”

아무래도 지수의 오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언니인 수영의 말에 이렇게 대꾸할 리가 없었으니까.

“우리가 실력이 모자란 것도 사실이잖아. 태호 오빠 말처럼, 실력만 좋으면 곡이 구려도 커버할 수 있어.”

“그것도 어느 정도지.”

툴툴대는 지수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던 수영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대에서 음정도 제대로 못 맞추는데, 라이브도 안 되는 그룹이라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찾아서 들을 생각이 나겠어?”

지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거 나보고 하는 소리예요, 언니?”

땀으로 가득 찼던 연습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동창고처럼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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