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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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선택해야 했다. 단유는 그대로 몸을 뒤로 눕혔다. 쓰러진 사람에게 걸려 그대로 넘어진 덕에 단유는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지만, 대신 사내의 주먹은 피할 수 있었다. 준비하고 넘어진 덕분에 곧 옆으로 몸을 굴려 일어난 단유는 다시 자신을 향하는 사내를 향해 두 손을 뻗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새끼, 졸라 빠르네? 응?”
단유는 입을 여는 대신 달려들 준비를 하는 사내의 눈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답답하다고 하소연한들, 들어줄 사내도 아니었고, 자신도 말로서 이 상황을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단유가 자세를 취하니, 사내는 비웃음을 날렸다.
“이제 한 번 제대로 해보자, 이거지? 응?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맞먹자고 지랄하는 거지?”
사내 역시 말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단유의 틈을 찾는 중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주먹을 피할 사람이 없는데, 벌써 두 번이나 자신의 주먹을 피한 아이였다. 무턱대고 주먹을 날렸다간 되려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경각심이 생긴 탓이었다. 이럴 때는 말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도 일종의 노하우였다.
“이런 데 와서 노는 새끼가 제정신일 리는 없고, 왔으면 조용히 놀다 갈 것이지, 어디서 건방지게 굴어!”
몇 가지 거친 욕을 곁들인 사내의 말에도 단유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야 지난 시간 동안 찰지게 들어왔던지라, 단유의 정신을 흩어놓기에는 부족했다.
강렬한 악의에 앞에 선 단유는 도리어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를 생각할 필요 없이,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게 만드니 어쩐지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다.
‘오른쪽, 왼쪽···.’
상대의 시선이 훔쳐보는 방향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상대에게 어떤 틈을 보이는지 스스로는 알기 어려웠지만, 상대의 시선을 따라가면 상대의 공격이 들어오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제대로 싸움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지난 경험들이 그 정도는 알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긴 주먹 정도야 맞아도 아플 뿐이지만, 창을 든 병사들에게 당하면 아픈 정도로 끝나지는 않으니까.
사내는 속으로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의 움직임과 달리 자세는 전혀 싸움꾼의 그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비웃기까지 했는데, 막상 달려들려고 하니 아이가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자신의 동작 하나하나를 모두 검열하는 듯한 시선이었고, 그 시선 아래에서 자신의 공격 따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단유는 사내의 공격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 까닭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비록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볼 수는 없어도, 주변에 쓰러진 사람과 주위의 사물들을 눈에 담을 수는 있게 되었다. 보이는 시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까지 주변을 봤던 기억을 되돌려 주위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조립하여 주위의 모든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 넣을 수 있었다.
사내는 한 발을 앞으로 미끄러뜨리며 조금 전진하였다. 어차피 쉽지 않을 공격이라면,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공격이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다행히도 지금 이 화장실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고, 게다가 주위는 모두 벽으로 막혀 있었다. 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자기 뒤에 있는 화장실 출입구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몰아세우면,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자신의 공격이 닿는 거리 안에서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단유도 사내의 접근을 알아챘다. 그리고 상대의 생각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뒤가 막힌 이상, 결국 이렇게 몰리다가는 피하기 어려운 곳까지 밀려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피할 곳이 없겠지만, 단유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다만 이대로 지지부진한 흐름을 이어나가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지 않았다. 주정뱅이와 싸움이나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은 아니니까.
‘아.’
단유는 문득 어떤 생각에 닿았다.
‘왜 내가 물러서야 하는 거지?’
물러서지 말자고, 적극적으로 가자고 다짐했던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왜 또 물러서서 피하려고만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나 뭔가 계속 쫓기는 느낌이었구나.’
방학 이후로 단유는 계속 쫓기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계속 단유를 잡으러 달려들고, 단유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단유는 당당하지 못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계속 주제에서 피하려는 모습이었고,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했지만, 사실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견딜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떨어지고 싶었고, 자신을 격리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명수가 이야기한 것 중의 단유의 감정을 들끓게 했던 한마디.
“넌 왜 화를 내는데?”
단유는 자신이 화를 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상대와의 대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화를 내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명수의 말에 단유는 울컥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단유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때도 화를 내고 있었고, 지금도 화를 내는 중이었다. 이성적이었다면, 악의를 보이는 상대 앞에서 ‘내가 뭘 잘못했냐’고 따지듯이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유 스스로가 생각하는 본인의 평소대로라면, 상대방의 악의에 대해 냉정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상대의 악의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든가, 혹은 아예 그 악의 자체가 자신을 향하지 못하도록 만들던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라니.’
조금 전 자신이 뱉은 말이 창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피함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 단유였다.
말로는 길었지만, 감정의 동요로 인한 생각의 흐름은 순간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라도 흐트러짐이 보인다면?
사내는 단유의 눈에 초점이 살짝 흐려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멍 때리는 사람 같달까? 순간이지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구석까지 몰지 못했어도, 이번 공격은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단유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사내의 ‘훅’ 공격에 다소 늦게 반응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순간, 단유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급히 들이마신 숨은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아랫배로 흘러갔다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호흡과 함께 온몸에 전달된 힘은 긴장으로 인해 근육을 굳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속도에 맞춰 몸이 움직이게끔 해주는 전도체 역할을 했다.
위기감을 느낌과 동시에 무릎이 살짝 구부러지며 몸에 탄력을 주었고, 시선은 끝까지 다가오는 주먹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주먹의 궤적을 계산하고 간격을 가늠했다. 수치를 표현하기도 전에 직관적으로 이해한 단유는 목을 뒤로 밀며 동시에 얼굴이 주먹의 궤적에서 살짝 떨어지게끔 움직였다.
주먹이 날아와 단유의 턱을 스치려고 할 때쯤, 좀 더 미세하게 반응한 몸이 주먹을 피했고, 사내의 주먹은 끝내 단유를 헛치고 지나갔다. 대신 단유의 오른쪽 볼에 붉은 상처를 남겼는데, 어지간히 빠른 주먹에 살갗이 스치면서 난 자국이었다.
사내는 주먹을 피한 단유의 움직임에 놀라움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지난 두 시간 동안 마신 술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어떻게 그걸?’
단유는 자신이 싸움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인정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녔지만, 일단 이 상황을 원만히(?)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단유는 상대가 이미 두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 점,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 이유 없이 악의를 드러내고 상해를 가하려 한 점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사내는 무릎에 힘이 꺾이면서 풀썩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까뒤집으면서 쓰러진 사내는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유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이 모든 일의 죄를 이 사람에게만 덮어씌우는 것 같아 불편했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인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 불편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불편한 마음인 채로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단유는 사내의 정신을 다시 돌려놓은 뒤, 자리를 떠났다. 단유가 떠난 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일행을 찾으러 온 사내가 화장실에서 상황을 확인하고 119를 부르기에 이르렀고, 클럽이 아수라장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클럽은 아수라장이었고, 앞으로도 아수라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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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난 시간 자신을 돌아보았다. 분명 클럽을 가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그리고 이해가 되던 자신의 행동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해가 되지 않길 시작했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저런 말을 했을까. 단유의 고뇌와 반성은 밤을 새워 이뤄졌고, 마침내 단유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안트의 말은 사실이었어.”
단유는 오로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마약을 찾아 헤맸다. 토엔이 그랬던가? 소량의 마약을 직접 섭취했으니 보통이 아닐 것이라고. 자각하지 못했지만, 분명 단유는 마약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음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신체적 부작용이 아니라 정신적 부작용을 앓았던 것이고, 그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명수만이 단유의 모습에 강한 이상 현상을 느꼈고, 단유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친구의 친절에 대해서, 바르지 못한 반응을 보인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살면서 부끄러운 일, 창피한 일이 어디 없었겠는가? 하지만 오늘, 아니 이제는 자정이 지났으니 어제의 일이다. 어제저녁, 명수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보였던 추태보다 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은 없다고 여겨졌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사과만 한다고 해서 명수가 용서해 줄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 자체가 지금껏 없었기 때문에, 더욱 명수의 반응이 두려운 단유였다.
단유는 이번 일이 스스로에게 꽤 위험한 순간이었음을 인정했다. 다행히 마약을 구하기 어려웠던 탓에 이렇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만약 마약을 구해서 또 마약을 복용했다면, 어쩌면 단유는 이대로 쭉 쫓기는 기분으로 살았을지도 몰랐다.
‘아마 그게 죄책감이란 거겠지?’
보이지도 않는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틀어쥘 것 같은 초조함, 그래서 계속 도망가고 회피하면서 자신을 부정하려는 태도가 아마도 죄책감이란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트와의 대화에서도 스스로는 죄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주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고.
‘안트는 알고 있었을까?’
어쩐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유 스스로가 깨닫기를 바라서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건강한 삶을 되찾거라.”
아마도 지구의 삶을 살라는 의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때 이미 단유의 정신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던 안트였기에, ‘이곳으로 오지 말라’거나 ‘건강한 삶’을 살라는 말을 했던 것이리라. 그 말의 뜻도 제대로 해석할 여유가 없었던 걸 보면, 스스로에게 분명 문제가 많았던 것이리라.
밤새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하늘이 열리며, 서늘한 가을 공기가 창을 타고 넘어와 단유의 볼을 만졌다.
“새벽은 순환이다···넌 또다시 다른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또 다른 낮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안트의 말처럼, 단유는 언제나 맞이했던 것과 다른 밤을 맞이했었다. 길었던 밤이었고, 밤의 유혹에서 헤매었다. 하지만 이렇게 새벽을 맞이하니 이제는 또 다른 낮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부끄러운 기억이고, 창피한 순간들이었지만, 단유는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우지 말고, 영원히 되뇌고 또 되뇌어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단유가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부스스한 머리로 눈을 비비던 명수와 마주쳤다. 명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너 볼 왜 그래?”
단유는 씩 웃음을 지었다.
“반성하느라고.”
“무슨 반성?”
“친구한테 바보짓 한 거 뉘우치는 반성.”
명수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가, 이내 단유를 따라 웃음을 지었다.
“반성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단유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명수가 말했다.
“이런 뜻.”
명수는 단유의 어깨를 짚고 몸을 돌려세우더니, 그 위에 올라탔다.
“가자, 새벽 공기나 쐬러.”
단유는 명수를 업고, 오피스텔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