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65화 (265/956)

파동(4)

-------------- 265/952 --------------

그렇지만 마음먹는다고 될 일이었으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을 터. 평소에도 책을 읽을 때나 혹은 자신이 의도한 상황에서 집중력이 남달랐던 단유였지만, 집중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결국 한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있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단순한 집중만으로는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단유는 슬그머니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뒀던 방법을 꺼내볼까 궁리했다. 어쩌면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마약으로 얻었던 능력이었으니, 다시 한번 마약을 섭취해서 일시적이나마 능력을 재현해보자는 생각.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안트가 두 번 다시 마약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부분이었다. 어쩌면, 단유의 호기심과 힘에 대한 집착을 알고 있던 안트였기에 이런 상황이 닥칠 것을 미리 알아채고 단유에게 경고를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단유는 꼭 그 능력이 얻고 싶었다. 명수의 다리를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진실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이곳은 그곳보다 더 복잡한 세계. 마법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세계. 이 세계의 비밀을 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어릴 때야 주위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도 없었고, 혈혈단신으로 낯선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갈구했지만, 어느 정도 이 사회의 시스템과 환경에 대해 익숙해지고 나니, 굳이 마법과 같은 비현실적, 혹은 초과학적 능력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능력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그런 능력을 개발할 시간에, 돈 잘 버는 방법을 생각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늘고 있던 즈음이었다.

‘마법이나 물리적 힘이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아도, 이 세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눈 정도는 쓸모가 있지 않을까?’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질 자원이 ‘정보’라는 것이라면, 단유가 경험한 ‘눈’은 마법보다 더 큰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런 무기 따위를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난 명수를 위해서 그 힘을 쓰려고 하는 거야.’

단유는 잡생각을 버리려 애썼다. 그리고 오직 명수를 위한 것임을, 정말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임을 스스로에게 이해시켰다.

****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단유는 다른 곳에 눈을 팔지 않고 곧 녹스로 향했다.

녹스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향했던 단유는 무너진 숙소와 토엔의 집을 볼 수 있었다.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침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저 집 왜 저래요?”

무너진 잔해에 잠시 눈길을 주던 행인이 혀를 차며 되물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아, 그냥 저 집만 무너진 게 이상해서요. 게다가 치우지도 않고 저대로 두는 걸 보면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모르는 척 능청을 떠는 게 썩 익숙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행인은 과연 그렇다, 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경비대가 범죄자의 집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앞으로 또 다른 범죄가 나올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집을 부셔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멍청한 놈이라니까, 경비대장이란 놈. 집을 부순다고 범죄가 안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그 발상이 참. 그 때문에 한동안 욕 좀 많이 먹었지, 그 녀석.”

“그런데 왜 안 치우고요?”

“저걸 치우는 것도 일이잖냐? 그런데 그 일을 시킬 사람이 마땅히 없다는 게 문제지. 돈을 주고 사람을 시키면 간단한 일일 텐데, 또 그렇게 지급할 돈은 없다고 하니 누가 나서서 하겠나? 결국 저런 흉물을 만들어 내고 만 거지. 하여튼 위에 놈들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지가 사는 곳이었어 봐. 저렇게 놔뒀겠어? 당장 그날 새벽에 사람 불러다 치우게 했을 거야.”

행인은 한참을 욕하다가 기분이 조금 후련해졌는지,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사라졌다.

“너도 이런 곳에 서서 있지 말고 갈 길이나 가거라. 괜한 오해나 받을지도 모르니까.”

아저씨가 사라진 후에도 가만히 그 잔해들을 바라보던 단유는 다시 발품을 팔아서 토엔과 그 일당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확인했다. 모두가 처형당하고, 그 덕에 경비대장은 근위대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게리? 그런 이름은 모르겠는데?”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때 심각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모두 교수형에 처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아, 그렇지. 나도 일만 없었으면 처형식에 가볼 생각이었는데, 가지 못했단 말이지.”

하지만 단유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게리는 죄가 없었고, 그러니 처형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떠올린 것은 게리가 자주 가던 식료품점.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디 갔었어?”

가게 주인은 단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리에 대해 묻자, 금방 빼빼 마른 놈, 이라며 기억해내는 모습이었다.

“그 녀석은 안 죽었어. 죄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경비대에서 풀어주더라고. 하긴 그 녀석, 하루 종일 일만 하던 놈인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야. 어, 잠시만. 미코! 배달 심부름 좀하고 와라.”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나타난 가게 주인은 게리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도 바로 풀려나진 못했고, 나흘 정도인가, 붙잡혀 있다가 풀려났던 모양이야. 전보다 더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는 동전 몇 개를 가지고 와서 먹을 것 좀 달라고 하지 뭐냐. 난 순간 거지로 전업이라도 한 줄 알았다. 아무튼, 그동안 봐온 정도 있고 해서 돈에 상관없이 먹을 것 좀 챙겨줬지. 그리고 그 녀석이 먹는 동안, 이것저것 좀 물어봤었다.”

주인은 들어온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이것저것 봐주면서도 단유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일도 잃어버린 마당에, 그 녀석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 불쌍하다고 우리 집에서 일을 시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다시피 우리 집에도 오랫동안 일하는 놈이 있잖니.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게리 그 녀석,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더구나. 안 그렇겠냐? 모질게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손에 쥔 건 하나도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또 아이러니하게도 손에 쥔 게 없으니 녹스를 나가지도 못했나 보더라고. 몇 일간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길래 먹을 것 좀 쥐여주긴 했는데, 그러다가 다시 일을 구한 모양인지 나타나진 않더라.”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고요?”

“잘은 모르겠고, 대신 경남지구 쪽에서 무슨 일자리를 구한 모양인데, 워낙 그쪽은 높으신 분들만 사는 곳이다 보니, 들려오는 게 별로 없어. 그러고 보면 어떻게 그쪽으로 갔는지 모르겠군. 별 능력도 없는 녀석이 말이야.”

단유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가게 주인이 붙잡았다.

“그런데, 넌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냐? 너도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거냐?”

걱정하는 듯한 가게 주인의 얼굴에 단유는 잠시 멈칫했다.

“거의 두 달? 석 달 정도 안 보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만약 니가 계속 녹스에 있었더라면, 게리 그 녀석도 이리 고생은 안 했을 텐데. 넌 워낙 똘똘한 녀석이었으니 말이야.”

단유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신 주인의 말을 들어주었다. 좀 전과 다른 분위기의 단유를 보고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뇨. 제가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런데,”

단유는 주인의 말을 잘랐다.

“일은 아저씨한테 있는 거 아닌가요?”

주인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무, 무슨 말이냐?”

“게리 이야기는 관심이 많아서 그냥 들었지만, 지금 아저씨는 일부러 계속 말을 거시는 거잖아요. 마치 저를 붙잡아 두어야 하는 것처럼.”

“응?”

“그리고 방금의 그 표정, 거짓이잖아요.”

주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은 다급한 기색을 띠더니 단유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녀석이오, 이 녀석! 이 녀석도 토엔과 한 패였소!”

뒤가 소란스러워 돌아보니, 경비대 수 명이 단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 눈치를 살피는 미코라는 점원의 얼굴도 보였다. 아마도 심부름 배달이라는 것이 경비대로 가서 알리라는 심부름이었던 모양이었다.

“네 이놈! 허튼 짓 하지 말고 순순히 따라와라!”

앞장선 경비대원 한 명이 날카로운 창을 뻗어 단유를 가리켰다. 그러나 단유는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경비대원들이 하는 모양새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뒤에 선 경비대원 한 명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어?”

경비대원의 눈이 커졌다.

“어?”

말은 하지 않고, 계속 어버버 거리기만 하는 동료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옆에 선 경비대원이 물었다.

“왜 그래?”

“어··· 저기 그러니까, 저기 저 사람, 아니 저분은···.”

“뭐?”

경비대원은 창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야, 왜 그래?”

“저, 저 사람이야! 아니, 저분이야! 그때, 기적을 일으키신 분!”

“뭐?”

아직 앳된 얼굴 가득한 단유를 가리켜 존칭을 쓰는 동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경비대원의 말이 이어졌다.

“있잖아! 그때, 집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던!”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 실제로 단유를 본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경비대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지금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는 이였다.

하지만, 말로만 들었던 이들은 눈앞에 선 평범한 아이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 따라 와라.”

가장 앞에 선 이가 창을 고쳐 잡으며 외쳤다.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경비대의 기개가 무너지진 않았다.

“죄송해요.”

“뭐?”

단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선 경비대를 살피며 말했다.

“제가 웬만하면 같이 가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때는 꼭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무슨 유명인과의 대담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용의자가 바쁘다고 나중에 보자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 앞에서 그럽시다, 하고 말할 경비대원들이 아니었다.

“무슨 헛소리야!”

단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할 뿐이고, 단유 역시 거리낄 것이 없기에 피할 필요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가서 서로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해서 오해도 풀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단유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되도록 이곳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줄여야만 했다. 혹시라도 선생님이나 명수, 혹은 상미가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단유는 다음을 기약하고 사라졌다.

“······.”

당연히 남은 이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고 텅 빈 허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들이 정신을 수습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는 데?”

선생님보다 명수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

“같이 갈까?”

“아냐. 다리도 아픈데 무리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

“나 안 힘든 데.”

단유는 상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쟤 움직이지 못하게 잘 보살피고 있어.”

“오케이.”

상미가 한쪽 눈을 깜찍하게 찡긋거려 보이더니 이내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이어 터져 나오는 함성.

“야, 이럴 때 넣는 게 어딨어!”

명수가 뒤늦게 패드를 조작했지만, 이미 화면에서는 상미네 팀 선수의 풀샷이 나타나 골 세레머니를 펼치고 있었다.

“그니까, 한눈팔지 말고 집중하라고.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문만 바라보고 있지 말고.”

“에이 씨. 다시 해.”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단유는 선생님께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저세상에서는 그 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마약을 다루던 무리가 모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녹스로 들어오는 마약의 공급선이 모두 끊어졌다는 것이나 다름없고, 설령 남은 마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찾아낼 능력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게리에게서 혹시 모를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함께 다녀본 바로는 게리 역시 거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비록 게리를 찾아서 만나면 반갑긴 하겠지만, 게리를 통해 목적을 이룰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판단한 단유였다. 굳이 게리를 찾으려 한 것도, 마약 때문이라기보다는 모두가 처형된 마당에 게리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잠시 ‘변덕’을 부렸을 뿐이었다.

다시 목표에 집중하니, 게리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단유는 목표를 재설정했다.

‘이왕에 재현해 낼 거라면 모든 조건을 똑같이 맞추는 게 좋겠지만, 상황이 이러니 비슷하게라도 조건을 맞춰보자.“

단유는 현실에서 마약을 찾아보기로 했다. 진짜 마약은 찾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마약성 의약품이란 게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