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63화 (263/956)

파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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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나이 때의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다. 그래서 방학 한 번씩 지날 때마다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이들이 한 반에 한두 명씩은 있기 마련이었고, 단유 역시 그런 아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단유보다 더 놀라운 모습을 연출한 아이가 있었다.

“너 키 얼마나 큰 거냐?”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 그렇게 컸나?”

시치미를 떼고는 있지만, 사실 얼마 전에 키를 잰 적이 있었던 민일은 괜히 능청을 떨었다. 사실 키가 큰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었다.

“사실은 말이다.”

말을 길게 끌던 민일이 품에서 카드를 하나 꺼냈다.

“어? 뭐야?”

그냥 체크 카드 정도로 생각하고 보던 짝이 카드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넥서스 엔터테인···먼트?”

민일이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답했다.

“드디어 넥서스 연습생이 됐다.”

“진짜? 와, 대박!”

그 소란에 주변의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달려들었다. 곧 민일이 들고 온 출입증 카드는 보물처럼 다뤄지며, 마치 성공을 기원하는 부적이라도 되는 양, 한 번씩 만져보기를 원했다.

“거기 누구 유명한 사람 있어?”

괜히 시비를 걸고 싶은 건지, 아니면 민일이 재는 꼴이 보기 싫었던 건지 한 아이가 뾰로통한 어조로 질문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고픈 민일은 친절하게, 그리고 모두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PDG(Pretty Darling Girl)알지? 그 그룹이 넥서스 소속이잖아.”

3년 차 걸그룹 PDG는 초기 앨범을 말아먹고 망하나 싶었는데,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은 두 번째 싱글이 대박을 치면서 대세가 된 걸그룹이었다. 소규모 기획사를 중견 기획사 정도로 끌어올릴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진짜? 와, 완전 대박! 야, 지니 만나봤어?”

PDG의 얼굴마담이라고 불리는 지니는 남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만나봤지!”

사실은 만나지 못했다. 기획사에 들어간 지 이제 겨우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은 민일은 엊그제 체력 테스트를 비롯한 몇 가지 테스트를 받은 뒤, 회사에서 정해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완전, 얼굴 이만해.”

꽉 쥔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민일의 퍼포먼스에 아이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민일은 어쩐지 우쭐거리고 싶은 기분에 취해서 몇 마디 덧붙였다.

“몸매도 완전 예술인데, 진짜··· 딱 보면 와, 소리밖에 안 나. 그래 가지고 처음에 인사할 때, 나 완전 얼어서 아무 말도 못했잖아. 근데 나한테 잘해보자고 어깨를 두드려주는데, 나 바로 기절하는 줄.”

“오오!”

아이들의 환상과 민일의 망상이 합쳐져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교실이었다.

한편, 모두가 그런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언제나 마이웨이 스타일인 단유는 물론이고, 걸그룹이나 가요를 즐겨 듣지 않는 채윤 또한 그 분위기에 다소 떨어져 있었다.

“뭐하냐?”

다음 수업을 준비하느라고 책상 서랍에서 책을 꺼내 들던 지태가 채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채윤은 종아리와 허벅지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아침에는 그냥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러나, 싶은 마음에 그냥 넘어갔었는데, 매 쉬는 시간마다 계속 다리를 주무르는 채윤의 행동이 기이하게 보여 결국 채윤에게 물음을 던져보는 지태였다.

“아, 그냥···.”

“어디 아파?”

“아니. 아픈 건 아니고.”

채윤은 눈치를 보더니 중얼거리듯 답했다.

“난 키가 안 크는 거 같아서.”

애초에 반에서 제일 작은 정도는 아니었고, 중간 정도였던 채윤은 방학이 끝난 후 교실에 왔을 때,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예민한 채윤의 시선에 반 아이들 대부분이 방학 전보다 커져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대놓고 재보진 않았지만, 어쩌면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야 할지도 몰랐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언젠가는 크겠지.”

지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국어책을 펼치며 다음 시간에 배울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넌 키가 컸으니까,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거다.”

채윤의 대답에 지태가 피식 웃었다.

“크긴 뭐가 커? 고작 2㎝나 컸으려나?”

“단유도 3㎝는 더 큰 거 같고, 너도 그렇고. 근데 나만 키가 안 크잖아.”

“야, 키는 언제라도 클 수 있어. 지금 안 큰다고 계속 안 크겠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수업 준비나 해.”

채윤은 지태의 대답에 발끈하며 화를 냈다.

“야, 니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막말할래?”

“뭐?”

채윤은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별거 아닌 거로 괜한 사람한테 신경질을 부렸다는 생각에 곧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게, 그렇잖아. 우리 아빠도 키가 작고, 우리 엄마도 키가 작단 말이야. 다들 키가 크는데, 나만 키가 안 크니까···불안하기도 하고.”

지태는 평소에도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채윤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뿐인데, 나름은 꽤 심각한 고민이었던 모양이라 판단했다.

“그럼, 우유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칼슘 보충제 같은 것도 먹고, 운동도 하고 그래 봐. 아, 단유가 운동 많이 하니까, 한번 물어봐라. 혹시 알아, 키 쑥쑥 크게 하는 운동법이라도 알고 있을지.”

단유가 무슨 트레이너도 아닌데, 그런 걸 알고 있을까 싶지만, 또 단유니까 그런 걸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윤이 돌아보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는, 혹은 잠이 든 건지도 모를 단유가 보였다.

만약 잠이 든 거라면, 깨우기 미안한데.

“점심때, 물어봐야겠다.”

“가서 물어봐.”

“···나중에.”

지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 전에는 드물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이 여린 채윤의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어서, 금세 목소리를 줄이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친구한테 말을 거는 건데도, 그조차도 쉽게 하질 못한다.

‘어쩌면 키보다 성격이 더 문제일지도.’

하지만, 지태는 속으로만 생각할 뿐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울 수도 없을뿐더러, 이런 문제는 스스로가 바뀌어야지,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한편 턱을 괴고 있던 단유는 눈만 감은 채, 귀로 들어오는 온갖 소음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시각적 정보를 숫자로 받아들였던 지난 날의 환상을 돌이켜보던 단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그런 방식을 마약에 취하지 않은 멀쩡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일으킬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도 책을 보는 대신, 창밖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푸른 잎사귀가 풍성한 교내의 나무들이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에서는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단유는 알고 있었다. 비록 책으로 배운 내용이지만, 그 내용을 머리에 되새기면서 나뭇잎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특별한 작용으로 이전의 그 현상을 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뭇잎은 그저 나뭇잎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문득, 명수가 책상 위에 지우개를 올려놓고 염력으로 옮겨 보겠다고 노려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하는 꼴이 그거랑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바보 같애.’

자책하던 단유는 생각을 전환하여, ‘정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시각적 정보를 숫자로 치환하는 방식은 체험해 본 바로는 굉장히 효율적이고 동시에 의미의 손실이 없는 방식이었다. 시각적 정보가 착시나 혹은 시야의 한계 등으로 사물 자체의 의미를 100%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단유는 ‘정보’의 올바른 습득과 이해라는 방향성을 탐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정보’가 단지 시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각’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각적 정보는 선택적 취합이 가능한데, 청각은 선택이 어렵다.’

시각적 정보의 경우, 시선을 돌려 원하는 사물을 바라볼 수 있고, 혹은 눈을 감아서 아예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택도 할 수 있는 반면, 청각적 정보는 취사선택이 거의 어려운 편이었다. 게다가 다양한 정보들을 ‘한꺼번’에 취합하기도 어렵다.

‘한꺼번에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할까?’

물론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각적 정보 역시 한꺼번에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굳이 시간을 따지면 거의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청각’의 경우에는 쉽지 않은 방식이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떠들 때, 그걸 한 번에 다 들을 수 있다면?

갑자기, 명수와 상미가 양옆에 서서 떠드는 경우를 떠올렸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상상이었다. 상상만 했는데, 귀가 피곤해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왕 생각난 김에 한 번 시도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점을 보면 확실히 단유도 변한 게 틀림없었다. 예전이라면 특별히 호기심을 느끼더라도 합리적으로 따지고 든 뒤에 그 결과가 자신에게 유용할 것인가를 한 번 더 생각하고 효율성을 고려한 뒤에야 시도해 볼 문제였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일에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 것은 비효율이라는 생각이 컸던 단유가 이리 행동하는 것도 어쩌면 마약의 부작용일지도.

그리하여 단유는 눈을 감고 가장 편한 자세로 몸의 긴장을 풀고 귀에 들어오는 모든 소리들을 거르지 않고 모두 듣는 중이었다. 시끄러운 걸 꽤나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오직 실험이라는 목적 아래 멈추지 않는 단유는, 앞에서 지태와 채윤이 나눈 대화도 들었다. 그 때문에 민일과 그의 친구들이 나누던 대화의 뒷부분은 듣지 못했다.

‘첫째는 지태와 채윤이의 대화가 더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그랬고, 두 번째는 민일이가 하는 말들이 너무 시시해서 그런 것이고, 세 번째는 지태 쪽이 더 가까운 곳에서 나누던 대화라서 멀리 있던 민일이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은 탓이겠지.’

분명히 귀에는 두 집단의 대화가 모두 들렸지만,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한 쪽은 지태 쪽이었고, 그 때문에 민일이 쪽은 목소리나 웃음소리는 계속 들었지만,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청각적 정보를 받아들이는 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정보를 해석하는 뇌의 문제가 아닐까?’

단순히 듣기만 해서는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단유는 한 가지 가정을 해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빨리 정보를 분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단유는 쉬는 시간 내내 눈을 뜨지 않았고, 채윤은 진짜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다시.”

단유가 가만히 서서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앞에서 숨을 헐떡이던 채윤이 거의 울기 직전인 눈으로 단유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그러나 인정 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듯, 단유는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깊이 숨을 몰아쉬던 채윤은 다시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땅을 짚고, 다리를 뒤로 뻗었다.

“더 쭉 뻗어야지. 몸이 완전히 펴지게.”

채윤은 역동작으로 다리를 끌어당기고, 손을 땅에서 떼고, 일어서는 동시에 손을 힘껏 위로 뻗으며 뛰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동작을 반복했다.

“저거 힘들어 보인다.”

구경하던 지태가 명수에게 넌지시 말하자, 명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힘들어. 익숙하지 않으면 20개도 겨우 할 수 있을걸. 게다가 단유는 자세랑 호흡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그거 지키면서 하려고 하니까, 몸만 힘든 게 아니라 머릿속도 막 꼬이는 기분이 들고 그래.”

명수가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대답해 주었다.

“10번만 더 해.”

그 사이, 단유는 채윤의 자세를 교정해주며 마지막 10번, 이라고 알려주었다. 채윤은 젖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 악을 쓰면서 10번을 마쳤다. 끝나자마자 땅에 널브러지는 채윤에게 단유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이 운동을 하면 키도 클 뿐만 아니라, 몸도 꽤 좋아질 거야. 철봉이랑, 팔굽혀펴기랑, 버피(버피테스트) 같은 맨몸 운동도 자세만 잘 잡아서 하면 다른 어떤 운동 못지않게 효과를 발휘하니까.”

그리고 농구나, 다른 구기 종목도 추천해준 뒤, 쓰러진 채윤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만약 생각이 있으면 새벽에도 운동하러 공원에 나와. 명수랑 나는 매일 새벽에 나가니까, 거기서 같이 운동하는 것도 좋을 거야. 솔직히 지금 이 시간은 내가 시간 내기 어려우니까, 계속 봐주기가 힘들어.”

채윤은 숨을 몰아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진짜 아는 것인지 그냥 너무 힘들어서 아무렇게나 대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것도 정보란 말이지.’

상대가 보여주는 몸짓, 호흡, 눈빛, 말투 모두가 정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 정보를 100%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단유는 그 정보들을 알아내는 것이 자신이 해내야 할 과제라고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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