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61화 (261/956)

상승(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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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루치드는 안트에게 자신의 신기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루치드의 기억은 잃어버린 가족의 흔적을 찾아 마을을 헤매다가 공터 중앙에 이르러 쓰러지는 것에서 끝이 났다.

안트는, 이제는 하얗게 새버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루치드의 경험에 관한 자기 생각을 밝혔다.

“재밌는 경험담이구나. 어떤 부분은 믿기 힘들고, 또 어떤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하고 그렇구나. 특히 세상을 숫자로 바라본다는 발상은 재밌기도 하다.”

안트는 자세를 고쳐 앉은 뒤, 이제는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진리를 탐구하는 것에 매진했던 나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 세상을 숫자로 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발상임이 분명하다. 숫자란 어떤 의미에서는 수많은 말과 의미를 함축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왜곡되지 않는 의미를 지니니까 말이다.”

“어떤 뜻이죠?”

루치드는 오랜만에 안트에게 수업을 듣는 기분으로 가르침을 청했다.

“1이란 숫자를 보자. 1은 유일함이다. 또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다. 그래서 1은 ‘태양’을 의미하기도 하지. 2는 어떠냐? 2는 두 번째란 의미도 있지만, ‘함께’라는 의미도 있다. 또 하나에 하나를 더 했다는 뜻에서 행복을 의미한다. 3은 ‘균형’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니 평등하다. 그래서 3은 ‘우주’다. 해와 달과 별을 가진 우주를 의미하지. 4는 둘에 둘을 더했다. 그래서 ‘대립’과 ‘갈등’을 의미하지. 동시에 4는 4가지 길, 즉 ‘방위’를 뜻한다. 5는 방위에 하나의 점을 찍어 ‘현재’를 의미한다. 또한 사람의 몸에 난 다섯 가지를 의미하니, ‘건강’한 숫자다. 6은 이미 건강한 5에 하나가 덧붙었으니 ‘쓸모없음’이다. 한편으로는 현재를 의미하는 5에 하나가 덧붙었으니 ‘장애물’이다. 7은 장애물을 뛰어넘었으니 ‘극복’이다. 극복하니 앞이 보인다. 그래서 7은 ‘목표’이며 ‘지향점’이다. 8은 목표에 다다르니 ‘성공’이며 ‘성취’이다. 또 8은 4에 4를 더한 수다. 그래서 전 방위를 뜻하니, 온 세상을 아우르는 바람이다. 9는 나중에 설명하고, 10부터 설명하자. 10은 5에 5를 더한 수다. 사람의 손가락 수이며, 발가락 수이다. 그래서 10은 꽉 찬 수다. 모든 것이 꽉 들어찼다는 의미에서 10은 가장 완벽한 세계, 이상적인 세계를 뜻한다. 이보다 건강한 수는 없다. 그래서 무병(無病)의 세계, 근심이 없음이니 완벽함이다.”

물론 루치드는 그 의미를 알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환상(?) 체험에서 느낀 바와 연결지어 들으니,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9는요?”

“완벽함에 하나가 모자라는 수다. ‘불완전’이다. 또한, 완벽한 세계에 모자람이 있으니 ‘현생’이다. 근심이고 고민이다.”

“그럼 9가 가장 안 좋은 수인가요?”

안트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수와 안 좋은 수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모든 것에는 좋은 의미와 안 좋은 의미가 함께 있다. 10이 완벽하다고 해서 좋겠느냐? 완벽한 세계에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늘 근심을 앓고 늘 미래를 걱정하는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0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대로 9가 근심과 고민, 불완전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9는 ‘인간’을 의미한다.”

어쩐지 ‘음양설’이 떠오른 루치드가 이를 안트에게 알려주었다. 안트는 진지하게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저쪽 세계의 철학이란 것인가? 과연 그곳에서도 진리를 탐구하고 고민하는 이들이 있긴 하구나. 과연 한 측면이 음(陰)이고, 다른 측면 양(陽)이라! 그 둘을 세계의 변화와 발전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타당하다. 나 역시 모든 사물에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고 보니까. 그러니 말하지 않았더냐? 의심하라고.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가정하고 추측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어쩐지 뿌듯해하는 것 같은 안트의 모습이었다. 루치드는 진중하게 가르침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안트는 루치드를 빤히 바라보더니,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한 가지만 더. 사실 이번에 넌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할 거다. 마약을 그렇게 섭취하고도 이리 별 탈이 없는 경우는 내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나, 내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니 너의 경우가 어떠한지를 딱 잘라 말하기 힘들구나. 그러니 지금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 것이며, 그렇다고 혹시 모를 부작용이나 후유증을 걱정하며 근심하지 말아라.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를 것이되, 넌 그저 이겨내려는 의지를 가지면 될 것이다.”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하던 루치드. 그가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지를 보던 안트는 루치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의 의지가 널 지켜줄 것이다.”

아마도 환상에서 겪은 이야기 때문에 ‘의지’를 강조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루치드였다.

“알겠어요.”

안트가 다시 손을 무릎으로 가져가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이렇게 볼 때마다 달라지니, 다음에는 널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구나.”

“자주 올게요.”

안트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날 보기 위해서 올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제까지와 다른 무거운 목소리로 루치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되도록 이곳으로 오지 말아라.”

“네?”

“여기서 니가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은 것 같구나. 더 얻으려 하는 것은 욕심이고 지나침이다. 6에 대해 설명했던 것, 기억하느냐?””

루치드는 안트가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쓸모없다는 뜻인가요?”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세계가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니가 마약에 취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니가 계속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할수록 오히려 건강을 해칠 뿐이니까.”

“그럼 계속 5에서 머물러야 하는 건가요?”

안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수의 의미들을 그렇게 즉물적(卽物的)으로 해석하지 말아라. 애초에 그 숫자들 각각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건강한 인간이 된다는 의미가 어떤 의미겠느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굳이 욕심을 낸다면··· 나나 디아트리, 신테처럼 지톤의 삶을 살아야겠지만, 그 삶이 행복해 보이더냐?”

마지막 말을 뱉으며 살짝 웃은 것 같기도 했지만, 원체 차가운 인상인지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건강한 삶을 되찾거라. 단지 신체의 건강함이 아니라 정신의 건강함도 일컫는 것임은 잘 아리라 믿는다.”

루치드는 머뭇거리며 꺼낼까 말까 하던 질문을 꺼냈다.

“그럼··· 저희 가족은요?”

안트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루치드.”

“네?”

“너의 이름의 의미를 아느냐?”

예전에 핀체노에게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밝은 새벽’이란 뜻이라고 들었어요.”

“맞다. 그리고 그쪽 세계의 이름은?”

“···단유요. 김단유.”

“혹시 그 이름에도 뜻이 있느냐?”

루치드는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단련할 단(鍛)에 도울 유(侑)를 쓴다고 들었어요. 듣기로는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받았던 것을 갚으라는 뜻이라고 했어요.”

안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어느 세상이나 마찬가지구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이름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거지. 너 역시 그렇다.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너의 삶과 이름의 의미가 맞지 않다고.”

“네.”

“너의 시간, 새벽의 시간은 동이 트기 전의 시간이고 그래서 동이 트고 나면 끝이 나는 시간이다. 매우 짧지. 짧지만 그렇기에 소중한 시간이다. 너의 이름은 그런 소중함의 마음이 깃든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여기서 떠났구나.”

루치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트는 고개를 들었다. 한쪽 지붕이 무너진 탓에 뻥 뚫린 천장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해가 점점 기울어가는 중인지, 그 하늘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반대로 저쪽 세상의 이름은 지금의 너를 그대로 보여주는구나. 단련한다는 의미도 좋고, 돕는다는 의미도 좋구나. 무엇보다 너의 삶이 너의 이름에 걸맞으니 더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이유가 없구나.”

“하지만, 하지만···.”

“다만, 너의 원래 이름을 잊지 말아라. 새벽은 순환이다. 밤이 가고 낮이 오는 그 짧은 순간이 매일 반복되는 것을 잊지 말아라. 언젠가, 넌 또다시 다른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또 다른 낮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너의 숙명이니, 비록 너의 삶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숙명이며 끝내 마주칠 운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의 시간이 끝났으니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루치드가 묵묵부답으로 안트를 바라보자, 안트가 눈을 돌렸다.

“가족을 찾고 싶은 너의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의 뜻대로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데, 지금 너에게서 보이는 운명은 여기에 없으니, 너의 이름 또한 의미를 잃었다. 이름의 의미를 잃는다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 삶의 길을 잃었다는 의미이거나, 혹은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방황하는 방랑자나 혹은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 그렇다. 하지만 넌 어떻느냐? 다행히 다른 삶이 마련되어 있으니, 그 삶 속에서 너의 이름에 부여된 사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럼, 가족을 찾지 말아야 하는 건가요?”

“찾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내 말을 따를 필요는 없다. 그건 너의 의지니까. 얼마든지, 또 이곳으로 여행 오듯이 와서 가족들을 찾고,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어느 한쪽의 삶도 충실히 하지 못하니, 결국 두 삶의 의미가 모두 사라지는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른다.”

안트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아꼈다. 그 이상은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루치드는 안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침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을 적셨고, 안트는 그 눈물이 그칠 때까지 앞에서 자리를 지켜주었다.

****

“어? 단유야? 너 왜 그래? 울었어?”

명수는 눈이 퉁퉁 부어서 나타난 단유를 보고 물었다.

“아, 자다가 슬픈 꿈을 꿔서 그래.”

“무슨 꿈?”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꿈.”

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그를 위로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어. 사실 밤새도록 꿈을 꾸는데, 진짜 기억나는 건 10분도 안 되잖아? 그래서 잠이 깨고도 슬플 때가 있지. 나도 그런 적 있어서 잘 알아. 그러니까, 울고 싶으면 울어. 형이 지켜줄게.”

“형은 무슨.”

“어허. 괜찮아, 괜찮아. 쑥스러워 하지 마. 형이 다 지켜줄게.”

단유는 피식 웃으며 어깨에 걸친 팔을 털어냈다.

“됐다. 그냥 운동이나 가자. 오늘은 좀 많이 뛰어야 할 거 같아.”

“그럴래? 좋다, 그럼 나도 같이 뛰어줄게.”

“같이 뛰다가 먼저 나가떨어지려고? 그럼 너 오늘 축구 못 뛸 텐데?”

“너 나 무시하냐? 내가 그 정도 체력은 되거든?”

“널 아니까, 이런 충고도 하는 거다.”

“오케이, 그럼 오늘 내기하자. 누가 더 오래 뛰나.”

단유는 먼저 뛰어가 버리는 명수의 등을 보며 하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벽 안개처럼 희미한 미소였다.

“그래, 오늘 죽을 때까지 뛰어보자.”

단유도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

여름이 지나갔다. 너무나 더운 여름이었다는데, 덕분에 어떤 곳에서는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더위 속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던 명수는 얼굴만 조금 탔을 뿐, 건강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건강함이 감독의 눈에 띄었다.

“2학기에, 추계 축구대회에서 주전 선수로?”

명수는 뻐기듯이 가슴을 쭉 내밀고 거드름을 피웠다.

“테스트를 했는데, 내가 2학년 형들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거 아냐? 결과가 딱 나오니까, 아, 석고가 평소에 이런 기분이겠구나, 라는 게 느껴지더라니까?”

“거기서 왜 날 걸고넘어지냐?”

“너 맨날 1등만 하잖아.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오늘 1등 해보니까 알겠더라고.”

“어떤 기분인데?”

채윤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명수가 히죽거렸다.

“딴 애들이 다 내 아래라는 생각? 별거 아니네, 이런 기분?”

“거만 떨긴.”

지태가 명수를 보며 툴툴거렸다. 그러더니 단유를 향해 눈을 흘겼다.

“왜?”

“너도 저런 생각이었던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떤 기분인데?”

“아무 느낌도 없어. 1등을 하든, 꼴찌를 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와, 이게 더 기분 나빠.”

“나도, 나도.”

지태와 채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역시 1등도 못해 본 녀석들은 이런 기분 몰라. 그치, 석고야?”

단유는 잠시 명수를 힐끗 바라본 뒤, 지태와 채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같이 가.”

개학 첫날. 모처럼 다 같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등교를 하는 네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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