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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259화 (259/956)

상승(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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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호빵이 흘린 털들을 치울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동물은 이렇게 흔적을 남기는데, 과연 사람은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까?’

가만 보면, 호빵은 정말 집안 곳곳에 그 흔적들을 진하게 남겨두었다. 거실에서 호빵이 오줌을 지리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가 움직이는 곳곳마다 털들이 날리는데, 매일 청소하지 않으면 발이며 무릎에 호빵의 하얀 털들이 들러붙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은 달랐다. 가만 보면 사람은 주변에 흔적을 그토록 부주의하게 남기는 이들이 드물었다. 없는 건 아니다. 명수만 봐도, 그 친구는 호빵과 버금갈 정도로 흔적을 남기니까. 흐트러진 소파의 쿠션, 변기에 남긴 흔적, 정리되지 않은 신발, 아무렇게나 접힌 침대 등 열거하면 끝이 없을 정도다. 반면에 이모님과 선생님은 거의 흔적이 없었다. 이모님이 출근하셔서 요리하시는 주방을 제외하고는 이모님이 앉았던 의자, 소파, 화장실, 방에서 이모님이 사용하였다는 흔적은 거의 보기 힘들었다.

루치드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루치드도 집 안에 흔적을 잘 남기지 않았다. 언제나 정리된 침구와, 늘 어제와 같은 책상, 언제나 같은 자리에 꽂혀 있는 책들과 늘 그랬듯 먼지 하나 없는 방바닥이 그랬다.

하지만, 고작 그런 정도의 흔적 때문에 고민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명언에도 있지 않던가.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고.

이름 따위를 기억하는 것도 그 사람이 특별한 사람일 경우였다. 루치드는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을 잘 모른다. 얼굴도 잘 모른다. 그들 중 한 명이 사라지거나 죽는다고 해도 루치드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 사람들의 이름을 모를 것이다.

그런 마당에, 대륙에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에 존재하지도 않는 작은 빈촌 마을의 사람들을 누가 기억할까?

그래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찾는 일은 시작부터 매우 곤란하고 막막한 일이었다. 틈날 때마다 신관 지구, 구관 지구, 상업 지구를 돌아다니며 빈촌에 대해 물어보지만, 단 한 명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가 있으니, 바로 루치드 자신이었다. 그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들의 흔적을 되짚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루치드는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기억하는 이들의 혹시 모를 흔적들을 찾기 위해서. 부디 그들이 호빵처럼, 명수처럼 작은 흔적이라도 남겼길 바라며. 그 흔적들이 오랜 세월에도 고이 간직되어 있길 바라며.

그리고 루치드 본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자, 묵은내가 후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희미해지기 시작한 숫자들이 루치드에게 달려들었다.

“아.”

모든 숫자는 변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든 사물과 세상은 변하게 되어 있었다. 영원히 같은 것은 없었다.

루치드가 받아들인 숫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변하니까.’

겉으로는 아직 쓸만해 보이던 나무 탁자도 삭아서 다리 한쪽이 부러지기 직전이었고, 비록 금이 갔지만 그래도 튼튼해 보이던 침실 쪽 흙벽도 심각할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었다. 집안의 모든 것들이 오랜 세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지 모두 변했고, 또 변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느리지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람의 흔적, 어머니의 흔적, 동생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수십 번을 들락거렸던 자신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숫자가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루치드는 재빨리 집 안을 수색한 뒤, 다른 집으로 건너갔다. 최대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찾아야 했다. 점점 희망이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루치드가 마을 중앙의 공터에 왔을 때, 루치드는 바쁘게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루치드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가며 이마에 흐르던 땀을 식혀주었다.

“누구세요?”

루치드는 입을 열어 눈앞에 선 이에게 물었다. 루치드 앞에 선 그는 대답이 없었다. 루치드는 다시 한번 물었다.

“누구신가요? 혹시···.”

그가 대답했다.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니?”

그리고 루치드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원해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다리에 힘이 빠져서 절로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너무도 심한 무력감과 탈력감(脫力感)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루치드는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턱이 잘게 떨려왔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선 흐릿한 형체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내가 누굴까?”

루치드는 마지막으로 봤던 수를 떠올렸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람.”

그가 피식 웃었다.

“사람?”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신의 말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의 실소에 대한 인정이었다.

“신이신가요?”

모든 것이 변할 때, 전혀 변하지 않는 숫자가 있었다. 그 수는 가장 완벽한 숫자였다. 그 자체로 완벽했고, 변화를 허용치 않는 숫자였다. 그래서 그 숫자는 고정되어 있었다.

“뭐, 그건 부르기 나름이겠지.”

이제는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치드 역시 더는 숫자로 된 세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숫자는 루치드에게 어떤 답도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는 답을 줄 수 있는 존재, 라고 생각했다.

“가르쳐주세요. 우리 가족들, 어디 갔어요?”

‘영원불멸의 존재’는 루치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왜 여전히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거야?”

“쓸데없다뇨?”

“완벽해질 기회가 있는데도, 넌 불완전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네?”

루치드는 그 존재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완벽해지고 싶지 않아? 완전해지고 싶지 않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은 모두 불완전한 이들이잖아? 완전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지 않는 거야?”

완전해진다고? 그게 어떤 의미지? 그러다 루치드는 자신이 들여다보았던 숫자들을 떠올렸다. 포세, 토엔, 경비대, 게리, 그 밖에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

“생각해봐. 그들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들은 늘 결핍되어 있어. 그래서 늘 충족시키려 하지. 하지만 너도 봐서 알 거 아냐? 그들은 충족될 수 없어. 결핍된 채로 태어난 존재들. 그리고 영원히 그 결핍을 채울 수 없는 존재들이야. 반면에 넌 어때? 넌 완전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 그런데 왜 굳이 불완전한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뭐가 결핍되었다는 건지, 그래서 뭘 충족시키려 한다는 거죠?”

그 혹은 그녀는 루치드의 대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넌 이미 알고 있잖아. 너무 긴 시간이 지났다고. 이제는 모른 척하지 마.”

“뭘요?”

“넌 마치 버려진 것처럼 굴잖아? 사실은 니가 버린 거잖아? 안 그래?”

루치드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

푸른 하늘과 그림 같은 구름. 짙은 녹음과 하얀 바위들. 그 사이를 오가는 시원한 바람이 아래로 내려와 열에 들뜬 지면을 식혀주었다.

“엄마! 엄마!”

한 아이의 외침에 밭을 매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조그만 남자아이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짧은 다리가 앙증맞게 엇갈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아이는 아슬아슬한 움직임 속에서도 끝내 넘어지지 않고 여자에게 다가왔다.

“엄마, 이것 봐.”

아이는 자신이 가져온 것은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가 바라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멩이였다. 의아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는 자랑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예쁘지? 보물이다, 이거.”

“응?”

“이거, 여기 보면 사람 얼굴 같잖아? 그런데 이쪽에서 이렇게 보면, 강아지 얼굴 같지? 또 이쪽에서 보면 도끼처럼 생겼어. 그치?”

아이는 돌멩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여자에게 자신의 자랑스러운 습득물을 자랑했다. 하지만 여자의 눈에는 그저 작은 돌멩이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저기 가서 엄마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려.”

여자는 다시 밭으로 시선을 돌려, 들고 있던 호미로 땅을 팠다. 여자의 관심이 자기 생각보다 약하자, 아이는 심통이 났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판단했는지, 아이는 다시 한번 여자에게 자신의 습득물이 얼마나 큰 발견이고, 위대한 것인지를 강조했다.

“여기 봐봐. 이쪽은 새까만데, 여기는 하얗잖아? 신기하잖아?”

여자가 대충 보느라고 이 돌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파악했던 아이는 색의 반전이 가져다주는 시각적 아름다움과 그로 인한 착시작용으로 돌의 외형이 동물의 얼굴처럼 보이는 기묘한 현상을 지적했다.

“그래서 이쪽에서 보면, 봐봐, 여기가 강아지 같잖아?”

여자는 호미를 땅에 내리꽂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오래 쭈그리고 앉았던지, 허리에서 두둑 거리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허리 참에 두른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거칠어 보이는 누런 천을 꺼내 땀을 닦고는 위로 올려다보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엄마 일하는 거 안 보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

아이는 들고 있던 돌을 슬며시 내렸다.

“그리고 정 심심하면, 옆집 형이랑 같이 저기 가서 놀아.”

어머니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푸른 나뭇잎으로 가득한 숲이 어둠을 품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질척거리는 행동은 좋지 않은 결과만 야기할 뿐이었다. 그 정도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돌이라면, 이 신기한 돌이라면 여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여자―엄마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패였다.

아이는 숲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옆집 형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혼자 숲을 갔다. 옆집 형이 했던 방식을 답습했고, 아주 예전에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귀한 약초를 우연히 구할 수 있었다.

“이거 먹을 수 있다고?”

“응. 옛날에 아빠가 이거 먹어도 된다고 그랬어.”

여자는 아이가 들고 온 버섯을 바라보다가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여자는 웃으며 돌아와 아이를 칭찬했다.

“맨날 쓸데없는 짓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것도 잘 구했네.”

그 날, 여자는 버섯을 구워 조각을 내고 버터 바른 빵에 버섯구이를 올려 식탁에 내놓았다.

아이는 숲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힘이 붙으면서 아이는 좀 더 많은 것을 숲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좀 더 많이 집으로 들고 왔다. 하지만 처음과 같은 반응은 없었고, 그마저도 점점 시들해져 이제는 숲에서 여러 가지를 구해와 등에 잔뜩 메고 들어와도 그러려니 하셨다.

“그걸 여기 들고 오면 어떡해? 저 밖에 내려놓고 와야지.”

아이는 집 밖에 나무껍질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정리해놓고, 겨우 구한 약초들을 잘 씻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식탁에는 빵이 있었다.

“먹어.”

어머니는 이미 먹었다고 했다.

아이는 빵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늘 뭔가를 하지만, 항상 부족했다. 언제나 등에 가득 짊어지고 오는데도, 늘 부족했다. 부족하므로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 이상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냐.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아이는 포기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빵을 뜯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이는 가방을 메기 시작했다. 가방을 들고 다니면, 양손이 자유롭게 되고, 그러면 그 손에도 뭔가를 들 수 있다. 즉, 더 많은 양을 들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옆집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가 되었다. 어린아이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쑥스러워서 그만 헤헤 웃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말했다.

“먼지 나는 걸 왜 들고 들어와? 밖에다 놓고 오라고 몇 번을 말하니?”

아이는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냐.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잘못된 건 엄마야.’

아이는 집 밖으로 나갔다.

****

“아니요, 아니에요.”

루치드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어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래?”

“네, 없었어요. 그건···사실이 아녜요.”

“그럼 사실이 뭔데?”

사실. 루치드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잘 떠올랐는데, 지금을 잘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구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진 것 같았다.

“어머닌 앞치마를 입고 저녁을 준비하셨어요. 그리고 숲에서 돌아오는 절 기다려주었어요. 따뜻한 수프와 갓 구워낸 빵을 접시에 담아서 제가 돌아올 때까지 먹지 않고 기다려주었어요.”

“그리고?”

“제가 들고 온 가방을 받아다 주고, 저한테는 수고했다며, 씻고 오라고 하셨어요. 제가 씻고 오면, 어머니도 정리를 끝내놓고 다 같이 식탁에 앉아요. 그 후에 우리 가족은 식사했어요.”

“가족?”

“어머니와 저, 그리고 동생이요.”

“동생? 동생이 있었어?”

루치드는 입을 다물었다. 동생···이 있었다. 이름이 에이미, 였던가? 루치드는 아직 마약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이렇게 머리가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할래?”

어쩐지 눈앞에 있는 존재가, 비록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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