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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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다고 공간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건물, 책상, 의자, 식탁 위에 놓인 그릇에 특징적인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외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주변 환경이 저절로 위치를 이동한다거나 모양을 바꾼다거나 색을 변화시키는 일은 없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일견 개별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적어도 과거의 일반인들―평범하게 하루를 살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제 일차 과제였던 이들―에게는 그저 해가 뜨고 지는 정도의 흐름 속에서 일과를 묵묵히 해 나가는 것에만 인식의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 철학의 사유에서 시간과 공간은 전혀 개별적이지 않다. 굳이 철학을 논할 필요도 없이, 시간과 공간의 접합점은 현대 문물을 향유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인식하고 변화를 느낀다. GPS가 그렇고, 인터넷, TV, 라디오가 그렇다. 정교한 톱니바퀴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시계,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미시 세계의 변화가 그렇다.
관찰 도구가 부족하던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미시 세계가 관찰됨으로써 인간은 시간을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간에 종속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으며, 시간이 멈추지 않으니 공간도 멈추지 않는다. 공간이 멈추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사람의 상상력과 의지는 끝이 없으니,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에도 일부의 사람들은 붓과 목탄을 들어 하얀 도화지 위에 그 순간을 새겨넣었다. 더 이전에는 단순히 날카롭기만 한 돌멩이를 손에 쥐고 동굴의 벽에, 넓은 바위에, 큰 나무에 그 순간을 새겨넣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엄밀히 말하면 시간의 한순간을 포착하기란 어려웠다.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하려고 시도했고, 드디어 과학의 힘을 빌려 사람들은 한순간을 포착해내는 기술을 발명해냈다. 사진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시간을 붙잡았다는 희열에 감동했다.
그러나 과연 사진은 시간의 흐름을 붙잡았던가? 결론적으로 시간은 현실의 외형을 ‘복제’한 모조품이며, 그것도 전체가 아닌 일부의 한 장면을 복제하는 데 그쳤다. 웃는 사람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었을 때, 그 순간의 표정은 담아냈을지 모르지만, 그 사진이 찍히는 순간, 인간의 단백질 구조가 변화하며 생기는 양상,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의 감정까지 모두 포착해내지는 못했다. 복제물의 한계였다.
그런데 이 순간, 루치드는 마약 때문에, 혹은 마약으로 인해 야기된 어떤 능력 때문에 시각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빛의 굴절과 반사로 야기되는 시각적 이미지를 해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대신 루치드는 이미지가 아닌 숫자로 표기되는 본질을 보게 되었다.
수(數)는 본질이었다. 어떠한 형태로도 가공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원형과 동일한 본질이고 개념이었다. 왜곡 없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자, 루치드에게 가장 친숙한 형태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그 수에 변화를 일으켜 보겠다고 다짐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그저 무의식적인 의지의 발현이었다. 루치드 본인이 표현했듯이,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의지의 발로(發露)였다.
그리고 그 의지는 환상의 공간, 혹은 초현실적, 마법적 역장을 구성하여 발현되었다. 그 공간에서 루치드는 시간을 멈추고 그 틈에서 본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모조품이 아닌 진짜 세계였다. 그것은 세계가 지금껏 감쳐두었던 진실이었고, 진리였다. 어쩌면 이것이 지톤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루치드는 그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고, 경험이 없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사유를 해본 바가 없던 루치드였기에 오직 단편적인 진실에만 몰두했고, 그래서 루치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고치거나 없애는 수준에 그친 것이다.
예컨대, 수천수만 페이지의 책에서 오·탈자를 찾아 수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글자를 안다면 오·탈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오·탈자를 찾는 수고만 하느라,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한 셈이니, 이후 루치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쉬움이 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장 루치드가 원하는 바는 따로 있었으니.
“토엔, 저 가야겠어요.”
“응?”
갑자기? 토엔으로서는 아직 루치드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평생 루치드를 곁에 두고 모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치드는 아니라지만, 자신이 보기에 루치드는 ‘신(神)’이거나 그를 따르는 천사임이 틀림없었다.
악마는 아닐 것이다. 악마였다면, 자신을 이렇게 치료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 어딜 가신다고 그래요?”
“찾아야 할 사람들, 가족이 있어요.”
루치드는 토엔에게 작별을 고했다. 루치드의 단호함에 토엔은 머리를 굴려볼 생각도 못 했다. 루치드는 포세와 그 외 집 안을 꽉꽉 채운 사람들에게도 말을 건넸다.
“여러분은 모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분들이에요. 부디 그 이유를 잃지 마시고, 바르게 살아가시길 바랄게요.”
루치드는 초점 없는 눈으로 사람을 쭉 훑은 뒤, 모습을 감췄다. 기현상에 어느 누구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경비병 한 명이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너도 다 나았어?”
목적어가 불분명한 물음에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비병이 물음에 대꾸했다.
“다 들었잖아. ‘고장’ 난 거라고.”
물론 듣기는 다 들었다. 토엔과 루치드 간의 대화는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마치 머릿속에 박제되듯이 박혀 있었다. 다만 모두 그것을 ‘들었다’로 인식할 뿐이었고, 그 차이를 구분해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바르게 살아가라는 말이 무슨 뜻이지?”
경비병은 주위 사람들을 눈짓하며 대답했다.
“이놈들 보고 착하게 살라는 말 아냐?”
“우리도 포함된 말 아냐? 그렇게 들리던데?”
경비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뭔들 어때. 착하게 살면 되지. 솔직히 지금 이 기분이라면 평생 착한 짓만 하면서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경비병은 수년간 앓아왔던 치질이 사라져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
“루치드?”
루치드는 게리의 부름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게리. 저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어딜?”
루치드는 자신의 이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속하는 동안에 이 능력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곳이 떠올랐고,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찾으러요.”
“아.”
일전에 루치드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루치드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했을 때도 이해를 했었다.
“그렇구나.”
게리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혹시 말이야, 니가··· 니가 날 살려준 거야?”
“살리다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 루치드였다.
“길게 말할 틈이 없어 죄송해요. 그만 가볼게요. 게리. 그리고 부디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살아요.”
“응?”
루치드는 다시 한번 미소를 띠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애초에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마냥, 사라진 루치드를 찾아 게리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루치드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다 등 뒤에서 멍청한 얼굴로 창을 들고 있는―창끝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경비병을 보게 되었다.
“방금 보셨어요?”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갔는지도요?”
경비병이 고개를 저었다. 게리는 목 옆을 긁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가슴을 더듬었다. 게리의 반응에 경비병 역시 호기심을 보였다.
“저, 저기, 거기··· 괜찮아?”
이번에는 게리가 경비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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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경비대에게 전설처럼 회자 될 일이었지만, 결국 크게 번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에 소외된 경비대장이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 보고 믿으라는 거야?”
한 경비병이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증언해보았지만, 콧방귀나 뀌며 무시하는 경비대장이었다.
“다들 마약상 집에서 함께 마약이라도 마신 거야, 뭐야!”
경비대장은 두 번 다시 ‘그따위’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고, 한 번 더 자기 귀에 이 일이 들리면 자신을 농락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여 엄히 처벌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포세와 토엔은 그대로 경비병에게 붙잡혔고, 포세의 일당 역시 경비병에게 붙잡혔다. 포세와 토엔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기적’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능력이 부족한 데다, 경비대장이 그 일만 언급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통에 결국 마약 소지와 유통에 대한 죄를 인정하는 선에서 심문이 마무리되었다.
“제 죄를 인정합니다.”
토엔은 죄를 인정했다.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전 그냥 토엔과 사업적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포세는 죄를 부정했다. ‘기적’은 기적이고, 기적을 행사한 그는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심문 결과는 경비대장의 보고서에 옮겨져 성주에게 전달되었다.
“오랫동안 마약 유통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마약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여서 심문하는 동안 계속 헛소리를 했습니다.”
성주는 두 사람을 비롯, 마약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마약유통조직 소탕의 성과를 거둔 이로 치하받으며, 훈장과 상여금, 그리고 근위대 소속 부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경비대장이 경비대를 떠나며, 입단속을 확실히 시켰음은 물론이다.
“어떤 경로로든 이번 일에 대한 헛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경비대장의 으름장에 경비대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것도 순리지?”
“글쎄?”
경비대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눈앞에 선 이의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가라.”
게리는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아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비병은 그저 손을 저어 빨리 가라는 시늉만 보였다. 심문 결과도 그렇고, 당시 자기 눈앞에서 보였던 기적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경비병은 게리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의 파트너 역시 그에 동의하였다.
“그 아이와 되게 친해 보였는데, 죄가 없다고 하니까 풀어주는 게 맞는 거지.”
두 경비병은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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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가 녹스를 떠나 도착한 곳은 바로 빈촌이었다. 사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빈촌에 와야겠다고 결정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없을지라도, 감춰진 정보는 볼 수 있겠지.’
루치드는 단 하나의 단서라도 찾을 수 있길 바라면서, 빈촌으로 향했다. 오는 동안 루치드의 불안은 점점 심해졌는데,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시력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숫자가 살짝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점점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안 돼!”
루치드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다행인 점은, 현재의 상태에서 이동이 매우 빠르고 편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무조건반사(無條件反射)적으로 실현되니 눈으로 위치를 가늠하고 이동할 때보다 빨랐다.
그리하여 곧 루치드는 빈촌으로 올 수 있었다.
“제발, 제발···.”
루치드는 부디 제시간에, 이 능력이 다하기 전에 단 하나의 단서라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줄어든 정보의 양 때문에 한 번에 다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루치드는 가장 먼저 자신의 집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루치드가 문고리를 붙잡고 문을 열어젖혔을 때, 오랫동안 묵힌 실내의 공기가 빠져나오며 루치드의 귀환을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