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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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아래, 해자의 틈에서 가루의 맛을 보았을 때, 루치드는 매우 강렬한 ‘환각’을 느꼈다. 루치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소금이나 설탕도 아닌 하얀 가루를, 그것도 경비대 모르게 비밀리에 옮겨야 하는 하얀 가루를 보고 ‘마약’을 떠올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맛을 본 것은 첫째는 마약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엉뚱하게도 호기심에 맛을 보고 싶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것은 ‘의무감’이었다.
“네. 미친 것 같아요.”
당연히 그런 의무감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루치드는 알 수 없었다. 돌이켜보건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먹어야 한다’고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니고, 다만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니. 먹지 않으면 어찌 될 것인가? 그런 의문도 없이, ‘먹어야 한다’니.
“뭐?”
“이거요. 완전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물질이네요. 사실은 그냥 버리려고 했어요. 이거, 사람들에게 전해져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너무 궁금해서요. 도대체 이게 뭐죠? 뭐길래 지금 절.”
다만 그 사실을 토엔에게 이야기할 순 없었다. 토엔 아닌 누구에게라도 말할 수 없었다.
루치드는 잠시 말을 끊었다. 토엔은 느긋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잊고 루치드의 뒷말을 기다렸다.
“뭐?”
“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마치 인지의 경계선에 섰을 때, 이랬던 것 같았다. 넘어서는 안 될 선.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이 ‘넘어서는 안 돼’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금기가 되어 행동의 제약을 가져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누구도 먹어, 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루치드는 히죽 웃었다. 뜬금없는 루치드의 감탄사에 토엔은 황당해하고 있다가 약의 효능 때문에 루치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런 미친놈이.”
미친 꼬마 녀석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언제 포세가 칼을 들이밀고 등장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여기서 꼬마랑 노닥거리며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토엔은 주머니의 터진 쪽을 꼭 쥔 채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루치드가 그 앞을 막았다. 막을 뿐만 아니라 손을 들어 토엔의 가슴을 툭 밀었다.
토엔은 방심했다고 생각했다. 방심했으니까, 저 꼬마의 손장난에 말려서 이렇게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주먹 좀 쓴다는 녀석들도 자기 앞에서 실실 기는 판국에 어린 꼬마 아이와의 힘 싸움에 밀려 바닥에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은 인정할 수 없었다.
토엔은 언제 쓰러졌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넘어질 때 등과 머리를 심하게 찧은 것 같긴 한데, 쪽팔림이 더 컸던지 고통은 없었다.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그거 뭐예요? 뭐길래 절 이렇게 만드는 거죠?”
“뭐?”
“지금 제 눈에 토엔이 이상하게 보이는 거 알아요?”
심한 중증 중독자들이 저런 소리를 내뱉곤 했다. 하늘에서 금덩어리가 쏟아져요, 입에서 무지개가 나와요, 물고기를 갈랐더니 아이가 나왔어요, 같은 헛소리들.
더는 말장난을 할 시간이 없었다. 토엔이 우격다짐으로, 아니 한방에 루치드를 때려눕힐 심산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루치드가 사라졌다. 아니 루치드는 가만히 있었는데 주먹이 루치드를 치고 지나갔는데 치질 못했다. 토엔은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분명 정확하게 맞춘 것 같은데, 루치드가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은 있는데, 눈앞에 루치드는 그대로 서 있고, 다만 자신의 주먹이 지나갔는데, 무언가를 맞췄다는 기분은 들지 않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토엔은 당황스러워하다가 문득, 자신이 터진 주머니를 쥐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설마 중독된 것인가?
“이런 썅!”
토엔은 이번엔 발을 크게 휘둘렀다. 역시나 발이 루치드가 있던 곳을 지나가는데, 루치드를 헛쳤다. 잔뜩 힘이 실린 발차기에 몸이 돌아가며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데,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치드였다.
“안 돼요. 그건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물건이잖아요. 나가려면 그걸 두고 나가시든가.”
“이런 미친 새끼! 뭐라 씨불여대는 거냐!”
약이 잔뜩 오른 토엔이 몸으로, 어깨로 밀고 나가려는 자세를 취하고 달려들었는데, 루치드가 손바닥을 뻗었다. 그리고 토엔은 잠시 세상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고 뒤이어 등과 다리, 팔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가 밝아지면서 자신이 강한 힘에 밀려 쓰러졌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믿을 수 없었다. 고개만 겨우 들어 바라보니, 역시 루치드라는 작은 꼬마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신장에 덩치는 반의반도 되지 않을 몸인데,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바닥에 눕힌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어떻게 쓰러졌는지 그 방법도 유추할 수 없었다.
루치드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토엔, 아저씨가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요?
토엔은 이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루치드가 두려워졌다.
“토엔, 도대체 그 약이 뭐죠?”
토엔은 한 걸음 다가서는 루치드를 피해 등과 다리로 바닥을 밀며 물러났다.
“저리 가! 안 가?”
루치드는 천천히 토엔에게 다가왔고, 토엔은 뒤로 물러났다.
“토엔, 제 머리가 터질 거 같아요. 토엔.”
심하게 중독된 듯하다. 어쩌면 저 꼬마 놈, 곧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런 놈들이 죽기 전에 지랄발광하면 자기도 다칠 수 있었다.
“저리 가라고!”
“토엔, 머리가 터질 거 같아요.”
말하는 건 마치 머리가 터져 죽겠어요, 라고 고통을 호소하는 것 같지만, 정작 루치드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토엔.”
토엔은 뒤에 벽이 닿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루치드가 자신을 향해 선언했다.
“토엔, 당신을 인수분해 해야 할 거 같아요.”
“뭐?”
****
포세는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인데, 굳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적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토엔은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의 집, 아니면 그의 안가. 그 두 곳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마당이다. 당연히 다른 곳을 포세의 부하들이 점거하고 있으니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토엔의 집이 보였다.
“포세, 저희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부하들이 만일에 대비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포세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조끼를 단단히 동여매고, 긴 나이프를 고쳐 잡은 부하들이 굵은 허벅지를 당기며 땅을 울리고 먼지를 뿌리며 달려갔다. 그들의 쿵쾅거림이 보기 좋았다. 언제나 열심히 산을 오르는 그들이다. 그들이 밀어주기에 포세는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생각만 그럴 게 아니라, 조만간 남쪽의 저 산에 비밀터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 높이에서 바라보는 녹스 성은 장관일 테지. 녹스를 자기 손에 둔 뒤에, 이를 바라보며 웅비의 꿈을 키우는 것이다. 대륙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자신의 꿈을.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지르는 부하들이 보였다. 부하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저 덩치들이 날뛰면 허름하기 짝이 없는 토엔의 집 정도는 금방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느긋하게 기다릴까?’
바깥에서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부하들이 곧 피범벅이 된 토엔을 질질 끌고 나오겠지. 자신은 천천히 다가가 무릎 꿇은 토엔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토엔은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살려달라고 빌려나? 아니면 깡이라도 보여주겠다고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생각도 못 한 제안을 들고나와서 협상을 시도할까? 생긴 것과 다르게 머리가 좋은 놈이니 어떤 짓을 할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짓을 하든 자신은 가볍게 웃어주리라. 그리고 그의 머리를 밟고 진흙에 비벼주리라. 그것이 정상에 선 자의 여유이리라.
생각이 길어지는데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집이 코 앞인데, 생각보다 집이 조용했다. 무너질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다투는 소리도 없었다. 더구나 들어간 부하들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리에는 자신과 뒤따르는 부하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곳에는 그런 소음마저도 없었다.
“야, 애들 왜 안 나와?”
한 녀석이 눈치 빠르게 뜻을 알아채곤, 옆의 선 사람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두 사람이 포세를 앞질러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침묵. 어느새 포세 무리는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열린 문 안으로 짙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음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방금 들어갔던 사람들마저 어둠에 잡아먹힌 듯했다. 조금 전까지 더워서 땀이 흘러내리던 팔이 바싹 마르며 소름이 돋았다. 털들이 삐죽 서는 느낌까지 들어, 포세는 괜히 쪽팔렸다. 뒤에 선 부하들이 혹시 자신의 팔에 선 털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포세는 일부러 크게 팔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애들 다 데리고 나와.”
다시 무리의 앞에 섰던 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갔다. 다만 이전의 부하들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키튼, 제호, 얀도?”
들어간 이들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데요?”
한 녀석이 돌아보며 멍청한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겁이 난 것이리라. 포세는 눈가를 좁히며 들어가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 사람이 눈치를 보다가 한 사람이 용기를 내서 어둠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어둠이 그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포세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으허어!”
처음으로 집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단말마의 비명이랄까? 짧은 비명은 곧 그의 운명처럼 사그라들었고, 더 이상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제길,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포세는 한 차례 발을 굴러 짐짓 화가 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는 화가 아니라 겁을 먹은 것이지만, 그런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 들어가!”
부하들은 머뭇거리다 열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다가가는 순간까지도 누가 먼저 들어갈지는 결정하지 못한 듯, 다들 주춤거리는 모습이었다. 이럴 때,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먼저 칼을 뽑아 들고 앞장을 섰겠지만, 포세는 안전제일주의였다.
“빨리 들어가라고, 새끼들아!”
“들어가긴 어딜 가, 이 개 쌍놈의 종자들아!”
골목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힘찬 함성.
“모두, 저자들을 제압하라!”
명령과 그 뒤를 따르는 복창의 함성이 있고, 골목에서 우르르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녹스의 치안을 맡은 경비대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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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는 절뚝거리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얼굴 한쪽이 심하게 부어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오른쪽 허벅지도 심하게 부풀었는데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하는지, 계속 절룩거렸고 그 외의 다른 곳도 자세히 보면 성한 곳이 없다 할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협박과 고문에 장사가 없다지만, 특히 두려움이 많았던 게리는 괜한 고문을 받기 전에, 더 심한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토설했다. 구레나룻이 지하실을 나간 뒤, 자신도 곧 풀려날 줄 알았다. 하지만 남은 덩치들이 심심하다면서 자신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말했잖아요! 다 말했잖아요! 풀어준다고 하셨잖아요!”
덩치가 게리의 머리끄덩이를 비틀어 잡고 히죽 웃었다.
“언제?”
그 뒤로 손발을 가리지 않고 휘두르는 덩치들이었다. 비명을 질러도 멈추지 않았고, 눈물, 콧물을 다 짜내어도 힘이 약해지지 않았다. 혼절했으면 좋겠는데, 또 매번 고통이 주어질 때마다 각성한 것처럼 정신이 들어서, 결국 게리는 끝날 때까지 고통을 맛봐야 했다.
고문은 때리는 게 지겨워질 때까지였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것처럼 포만감을 느끼는 얼굴을 하며 얼굴과 목, 손에 묻은 피와 땀을 닦아낸 덩치들은 게리를 그대로 버려두고 지하실을 나가버렸다. 게리는 한참을 지하실에서 버둥대며 꿈틀거리다가 더 이상 덩치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때쯤에야 겨우 일어나서 지하실을 나왔다.
“개새끼, 구역질 나는 새끼, 똥물을 퍼다 마실 새끼.”
지나가는 사람들이 듣지 못할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길을 걷는 게리였다. 어차피 지나가는 누구도 게리를 붙잡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멀찍이 두고서 돌아가는 형국이었으니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해도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게리는 지하실을 나온 뒤, 바로 숙소로 향했다. 숙소 매트리스 안쪽 깊숙이 숨겨놓은 돈을 꺼내 들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간 나름대로 먹을 거 아껴가며 돈을 모았다. 벌이 자체가 시원찮은지라 큰돈은 아니겠지만, 이곳을 벗어나 다른 도시로 갈 경비 정도는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게리는 걸었다.
마른 흙바닥에 먼지가 풀풀 날리며 게리의 흔적을 길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