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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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을 바닥에 떨어뜨려도 금방 익을 것 같은 뜨거운 한낮의 열기 속에서도 사람들이 일상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한 줄기 바람 때문일 것이다. 비록 바람마저 뜨거운 온기를 담았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포세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을 구경하고 있었다. 푸른 산의 능선은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하는데, 포세는 자신이 현재 가파른 능선을 오르는 중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힘들고 위태롭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정상에 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포세, 투키입니다.”
포세는 뒷짐 진 손을 풀며 뒤를 돌았다. 구레나룻을 기른 투키가 포세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알아냈습니다.”
“수고했다.”
포세는 투키를 치하하고는 옆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는 덩치에게 말했다.
“투키와 함께 가서 마무리를 지어라.”
“네.”
덩치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곧 돌아섰다. 투키와 함께 길을 거슬러가자 대기하던 다른 부하들도 분분히 일어서 덩치의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포세가 다시 몸을 돌려 능선을 바라보았다. 꽤 오랫동안 토엔의 등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하지만 토엔은 체력이 다해서 능선을 오르다 포기한 것처럼 멈춰 서있었다. 이때 자신이 토엔을 제치고 오른다면 능히 정상을 먼저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은 선점하는 자의 것이다.
“포세, 이제 토엔의 돈줄도 우리 쪽으로 끌어오게 되었고, 비자금도 거두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토엔 뿐이지 않습니까? 그냥 토엔을 재껴도 될 것 같은데요.”
포세는 뒤에서 조언을 하는 친우(親友)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게 보기도 좋겠지.”
“그렇습니다.”
포세는 이날을 위해, 이때를 위해 줄곧 땀을 흘려 왔다. 지금 목 뒤에 흐르는 땀은 긴장해서 흘린 땀이 아니라,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고 흘린 땀이었다. 이제 이 땀을 식힐 때가 되었다.
“가자.”
****
“뭐?”
토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심성 없는 토엔의 움직임에 책상 위에서 결제를 기다리던 서류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포세 애들이··· ‘다섯 번째 집’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다섯 번째 집’은 암호였다. 사실은 토엔의 비자금과 비밀장부가 숨겨진 장소였다. 그 장소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꽤 조심스럽게 움직였기 때문에 포세는 물론이고 외부 사람들은 알아낼 수 없는 안가(安家)였다.
“우연히 그쪽으로 향할 확률은···없겠지.”
“······.”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토엔은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애들은?”
“마침 애들이 간식 먹는다고 나간 틈이라···.”
말은 ‘간식’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주먹 패거리들이 인근 상가들과 하위 조직들의 수금을 하러 간 것이었다.
“당장 부르고, 신관 지구에 일 나간 애들도 다 불러!”
“걔들 까지도요?”
토엔이 책상을 발로 차며 소리쳤다.
“포세가 그쪽만 노릴 거라고 생각해? 멍청한 놈아!”
덩치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토엔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생각을 해 보았다.
포세가 단순히 돈이나 벌자고 경관지구의 오물 수거 업을 맡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오물 수거는 마약 보급선의 확장을 위한 눈가림이었다. 다른 어떤 직업보다 사람들에게 개별적인 접근이 가능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공급의 확장과 경비대의 눈가리개용으로 적당했다. 이러한 수단을 제일 처음 고안한 것은 다름 아닌 토엔이었다. 토엔은 이를 통해 안정적이고 높은 이익을 거두었고, 이를 발판으로 더 큰 사업으로 진출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토엔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 다른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도 굳이 오물 수거 일까지 진출해서 토엔의 사업을 막으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때문에 토엔이 독점으로 담당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오물 수거가 푼돈밖에 되지 않았고, 냄새나고 뒤처리도 까다로운 일이었기에 토엔의 독점을 방기(放棄)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포세가 토엔의 독점에 반기를 들고 끼어들었다. 처음 경남지구를 먹을 때도 토엔은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너무 나서서 포세를 몰아세우면, 다른 조직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대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포세도 한동안 경남지구의 오물 수거만을 담당했고, 다른 지구로의 진출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기에 토엔도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관지구를 먹어치웠다. 당연히 윗선이 있을 테지만, 당장은 그 윗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관지구를 먹어치우는 순간, 동시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지속적으로 거래를 하던 대륙 쪽의 마약 공급처에서 거래를 끊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토엔이 공급책으로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인데, 그들이 내세운 핑계가 바로 경관지구였다.
“녹스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요가 있는 경관지구를 잃은 토엔과 함께 파트너십을 이어나갈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런 이유라면 되찾으려는 노력을 봐주던가, 아니면 되찾을 시간을 주든가 했어야지, 저렇게 공급을 일방적으로 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 이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어떻게든 빼앗긴 지구를 되찾기 위해, 윗선에 계시는 분들을 차례로 만나가며 설득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포세가 ‘다섯 번째 집’을 노린다?
모든 아귀가 맞춰진다. 아니, 애초에 좀 더 영리하게 굴었다면, 더 빨리 눈치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느긋하게 있었던 탓인지, 토엔은 본인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저지른 셈이었다.
이제 포세가 눈에 띄게 움직였다는 말은 곧 자신에게도 칼을 들이밀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비밀 장부를 뺏기면, 그의 모든 것을 뺏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공급처를 확보하고 있는지, 어떤 수급지가 있는지, 어떤 계산으로 거래를 해왔는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를 뺏긴다? 차라리 자신의 간을 꺼내서 보여주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토엔이 서둘러 집을 나서려는데, 먼저 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토엔은 우뚝 멈춰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목소리를 냈다.
“누···구냐?”
곧 문밖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루치드입니다.”
토엔은 얼른 문을 열었다. 원래도 얼굴이 하얀 편이던 루치드는 평소보다 더 하얗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다른 사람의 얼굴색이나 감평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
“이거 심부름으로 주라던데요.”
눈에 익은 주머니가 루치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얼른 받아들려는데 루치드가 주머니의 아래쪽을 받쳐 들며 말했다.
“여기 찢어졌어요.”
“뭐?”
루치드는 북문에서 있었던 일부터 감시인의 으름장까지 자세하게 알렸다. 토엔은 가죽 주머니를 먼저 챙긴 뒤,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이게 뭔지도 들었어?”
“아니요.”
루치드는 토엔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태연하게 표정을 감추고 토엔을 바라보았다. 토엔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일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비록 시기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도 없잖아 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포세와는 연관이 없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기에 싸움에는 무소용이리라. 그렇다면 시간벌기로라도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요.”
루치드가 틈을 노려 입을 열었다.
“뭐?”
“그거 마약이죠?”
순식간에 토엔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루치드를 노려보았다. 혹시 이 녀석은 첩자?
“어떻게 알았냐?”
“떨어진 가루 맛을 봤죠.”
“뭐?”
마약을 먹었다고? 사실 이 마약을 사용하는 방법은 얇은 종이 위에 올려놓고 그 아래 양초를 대는 것이었다. 양초의 열기에 종이가 타기 전 마약이 먼저 증기를 내며 녹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증기를 코로 흡입하는 것이 이 약의 올바른 흡입법이었다. 만약 이것을 그대로 녹여 먹는다면? 혀가 마비되고 온몸이 굳으며 뇌가 녹는 느낌이 들 정도의 열이 발생한다. 그래서 한참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움직이더라도 지금 루치드처럼 멀쩡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약을 먹고 그렇게 서 있을 수 없다!”
루치드는 토엔의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아저씨가 이 마약을 사람들한테 팔고 있다는 사실이죠. 그건 범죄라고요.”
토엔은 갑작스러운 루치드의 설교에 잠깐이지만 얼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저딴 소리를 한단 말인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인가?
“너, 미쳤냐?”
****
“대장님, 잠시 여기 좀 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멋진 콧수염의 경비대장은 콧수염의 끝을 손으로 다듬던 중에 부하의 외침을 들었다.
“무슨 일인가?”
경비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복장을 가다듬고는 뚜벅뚜벅 걸어서 경비대를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서니, 밖에는 경비대원 두 명이 서서 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요상하게도 삽을 든 채였다.
“뭐냐, 그건?”
경비대원들에게 보수공사나 삽질을 시킨 기억은 없는데. 경비대원이라면 엄연히 이 성의 치안을 책임지는 병사로서 한순간이라도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경비대장에게 그 삽은 심히 거슬리는 모양새였다.
“실은 북문에서 일이 있었는데.”
경비대원은 북문에서 조기교대를 하고 경비를 서던 이였다. 북문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설명하고는 오물을 치우기 위해 삽으로 치우던 중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는 설명이었다.
대장은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결론이 뭔데?”
“마약 같습니다.”
“뭐?”
경비대장의 눈이 크게 떠지는 순간이었다. 얼른 다가와 삽을 살폈다. 오물 섞인 진흙 위에 하얀 가루 같은 게 설탕처럼 뿌려져 있었는데, 설탕은 아닐 것이다. 소금처럼 굵지도 않고.
“정말이냐?”
“사실, 확신은 못 했습니다만···.”
그 경비병의 말을 옆에 선 경비병이 대신 받았다.
“오전에 북문 순찰 중에 쓰러졌던 도순 말입니다. 조금 전에 죽었습니다.”
“뭐?”
“그런데 의사의 말이··· 마약 중독 같다고 합니다.”
경비대장의 눈이 이보다 커질 수 없다는 듯이 동그랗게 떠지며, 동시에 입이 벌어졌다.
마약은 ‘마법사의 저주’라고도 불렸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법사의 축복’이라고도 불렀다. 당연히 마약을 애용하고 상습 복용하는 이들의 말이었다. 마약이 사람들한테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막연하게나마 환상의 끝을 보여준다는 식으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저주’인 이유는 마약이 퍼지면, 곧 그 성 혹은 도시가 몰락 직전에 이르는 상황에 도달하기 때문이었다. 마약은 중독성이 강해서 한 번 복용하면 끊을 수가 없고, 의도치 않게 공기 중으로 소량만 흡입하더라도, 중독되어서 마약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실제로 마약 때문에 지역 봉쇄가 결정된 곳도 있었으니 단순히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경고만은 아니었다.
심한 중독의 경우에는 곧 죽음에 이르게 되고, 심하지 않은 중독이라도 가정의 파탄, 경제의 파탄을 불러온다. 어떤 이유든, 흡입 한 번만 해도 죽음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는 격이었다.
“범인은? 범인의 얼굴은 아느냐?”
“그게, 똥쟁··· 아니 오물 수거용 수레에서 떨어졌습니다.”
대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포세냐, 토엔이냐?”
“그것까지는···.”
업무를 주로 보던 곳이 북문이 아니었던 경비병으로서는 루치드가 토엔의 소속인지, 포세의 소속인지를 분간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보고 있을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당장 병력을 준비해라. 구관 지구로 가봐야겠다. 어느 놈이든 붙잡아서 문초를 해봐야 하겠다.”
경비대원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명을 수행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