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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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는 성문을 지날 때, 아까와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닌데도 경비병이 바뀌어 있던 데다가, 경비병들의 분위기도 제법 삼엄한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원래 경비병들을 만나면 인사를 하라고 사전교육을 받았다. 성밖을 나갈 때는 ‘안녕하세요’, 들어올 때는 ‘수고하세요’라는 말로 인사를 건네도록 교육받았으나, 지금 성문 앞에 선 경비병은 들어올 때 봤던 경비병도 아닐뿐더러, 북문 쪽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경비병은 힐끔 루치드를 보곤 빨리 지나가라는 눈치를 줬다. 루치드가 수레를 잡은 손잡이에 힘을 주고 지나가려는데, 다른 경비병이 창을 뻗어 길을 막았다.
“어이, 어딜 그냥 가려고?”
대답은 루치드가 아닌 눈치를 줬던 경비병에게서 나왔다.
“왜 그래?”
“조사를 해야지?”
“이 봐, 이 녀석은 보아하니 매일 오가는 놈들인데, 뒤에 저거 안 보여?”
아무리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밀봉한다 쳐도 새어 나오는 냄새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 조사는 제대로 해야지. 일도 터진 마당에.”
루치드가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다.
“무슨 일, 있나요?”
“···알 거 없다.”
창을 든 경비병은 단호하게 대답을 거절하고는 루치드에게 수레를 놓고 앞으로 나올 것을 명령했다. 루치드는 별로 거리낄 게 없었기에 경비병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진 말고.”
경비병은 어느새 코를 막는 천을 꺼내 들고는 창대 끝으로 루치드를 쿡쿡 찔렀다.
“돌아봐.”
“호주머니 다 뒤집어 봐.”
“윗옷 들춰 봐.”
역시나 걸릴 게 없었다. 성문 밖으로 나가는 이들을 검문하던 경비병이 보다 못해 빨리 끝내라고 재촉할 정도였다. 경비병은 뒤이어 수레 쪽으로 다가갔다. 창으로 수레를 툭툭 건드리는데, 루치드는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심하세요, 잘못하면 가죽 찢어져요.”
그렇지않아도 늘 젖어있는 가죽이다. 어지간해선 잘 찢어지진 않겠지만, 날카로운 창으로 찌르면 성할 리 없었다.
“뭐?”
―부욱.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 안에 남아있던 잔여물들이 냄새와 함께 쏟아졌다. 수레를 적시며 아래로 흐르더니 금세 바닥에 뚝뚝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경비병은 당황해서 황급히 창을 잡아당겼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오늘 막 수거했던, 그리고 여름 햇살을 받아 적당히 달궈졌던 오물이 북문에 향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이봐, 조심하지 그랬어.”
사람들이 물러서면서 오롯이 경비병과 루치드만이 오물의 향에 빠졌다.
“야, 당장 이거 치워. 얼른!”
그렇게 말해도 어떤 도구도 없는 판에 어떻게 치운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이 수레 여기 두면 더 안 좋을 거 같은데요.”
“그렇네. 야, 너 얼른 수레부터 치워.”
루치드는 수레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경비병이 창을 들어 막았다.
“어딜 들어오려고?”
“예?”
“나가. 나가서 고치든지 알아서 해. 냄새나는 그걸 성안에 흘리면서 다니겠다는 거야!”
할 수 없이 루치드는 수레를 끌고 다시 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수레가 멀어지는 사이, 남은 경비병들은 인상을 쓰며 바닥에 흐른 오물들을 바라보았다.
“야, 니가 치워.”
“내가 왜?”
“니가 사고 친 거잖아. 그러니까 내 말 좀 듣지.”
“아오, 이 새끼. 얄밉게도 말한다.”
“칭찬 고맙고, 빨리 치워.”
결국, 사고 친 경비병이 창대 끝으로 바닥을 긁어보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결국 사람을 시켜 삽을 구해오도록 했다.
그 사이, 루치드는 다시 감시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뭐야?”
루치드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감시자가 인상을 푹 쓰면서 머리를 긁었다. 하얀 가루가 바닥에 떨어지는 게 보여, 루치드는 조용히 한발 물러섰다.
감시자는 신경질을 부리다가, 막 생각난 듯 수레로 다가가 주머니를 들쳤다. 다행히 주머니는 그대로 있었다. 감시자는 주머니를 꺼내어 입구를 살폈는데, 루치드는 그의 말대로 열어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때, 루치드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요.”
루치드가 가리킨 방향은 바로 자신의 발아래였다. 시선을 옮긴 감시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발아래로는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하얀 가루가 쌓이는 중이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를 살피니, 조그맣게 찢어진 부분이 있었다.
“새끼야, 이거 언제부터 그런 거야!”
루치드로서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애초에 열어보지 말라고 해서 호기심을 누르고 그 자리 그대로 놔뒀는데, 언제 어떻게 저리됐는지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으니, 아까 경비병이 창으로 이리저리 찔러댈 때, 그래서 오물 수거 주머니가 찢어질 때 같이 뚫린 게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그 추측을 들려줬더니, 감시자는 낭패라는 듯 혀를 찼다.
주머니를 뒤집어 더 이상 새지 않게 만든 후, 감시자는 길 위를 살폈다. 애당초 크게 뚫리지는 않았던지 가루가 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흘렀더라도 작은 가루라서 바람에 흩어졌을 확률이 높지만, 당장 감시자의 눈에 이상이 없어 보인다는 게 중요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내용물의 손실 없이 이 주머니를 토엔에게 전달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와.”
루치드에게 주머니를 건넨 후―구멍 쪽을 다른 손으로 막아서 가루가 새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성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감시자는 이윽고 성문이 아닌 성벽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성벽의 어느 한 지점에 도착한 그는 해자가 파여있는 쪽으로 루치드를 안내했다.
“저기로 들어가면 반대쪽으로 나갈 수 있다. 지금은 몬스터의 공격이 없는 시기라서 해자의 물을 반밖에 채우지 않았으니까,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하수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수달이 낸 구멍 같기도 한 검은 통로가 물 위로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젖지 않을까요?”
“머리 위로 들고 가면 되잖아. 그거 조금이라도 젖었다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조심스럽게 해자 아래로 내려갔다. 거의 가슴께에 차오르던 물은 그 이상은 넘지 않았다. 이게 원래 차는 양의 반이라고 하니, 원래라면 쉽게 지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며 루치드는 수면 위로 살짝 보이던 통로로 들어갔다. 입구만 좁을 뿐, 그 안쪽은 도로 넓어져서 가죽을 들고 지나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통로 가운데쯤에서 루치드는 걸음을 멈췄다. 이쯤이면 어느 쪽에서도 자신이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루치드는 주머니를 들고 있던 한 손을 떼어서 구멍을 막고 있는 손 쪽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뺐다. 손가락 끝에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눈으로 그 가루의 결정을 관찰하다가 조심스럽게 혀 끝에 가루를 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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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너.”
게리는 혹시나, 하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역시나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내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망가자, 라는 것이었다. 인파가 많은 중앙 거리다 보니, 잘만 숨어들면 피할 수 있으리라.
“그만 생각해. 니 뒤에도 있으니까.”
피식 웃던 덩치의 고갯짓에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어깨 가득히 타투를 새긴 덩치가 팔짱을 끼고 길을 막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험악한 인상에 놀라서 다들 옆으로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조용히 따라가지 않을래? 잘못했다가는 니 팔이 부러질 거 같아서 그래.”
사내는 조곤조곤 차분한 목소리로 게리를 꾀었다. 목소리와 달리 담긴 내용은 뼈를 분지르겠다는 협박이었기에 게리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게리는 사내를 따라가야 했다. 사내는 덩치와 게리를 데리고 남문 쪽으로 향했다. 이들이 경남지구로 갈 리는 없을 테니, 역시 구관 지구로 가는 것일 테고, 구관 지구에서도 남쪽이라면 역시 포세쪽일 확률이 높다.
분명 오늘 아침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는데. 결국, 중앙 거리로 나온 게 잘못이었던 걸까?
‘나는 중앙 거리로 나서면 안 되는 거였구나.’
자신은 구관 지구의 냄새 나는 뒷골목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역시 사람은 난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구나, 라는 걸 깨닫는 게리였다.
게리를 끌고 간 남자는 남쪽 빈민가의 골목을 따라 들어가다가 어느 허름한 집 안으로 게리를 집어넣었다. 바닥을 구른 게리에게 엄살 부리지 말라며 머릴 한 대 쥐어박더니, 지하실로 끌고 갔다.
“어이, 너. 이름이 게리였던가?”
굉장히 짙은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게리에게 다가왔다. 게리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군.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말이야.”
물어본다고 해도, 아는 게 없어서 답할 것도 없던 게리는 열심히 자신의 처지를 항변했다.
“하루 종일 똥만 푸는 일만 해요. 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오늘만 파트너가 대신 일 해 준 덕분에 쉬는 거란 말이에요. 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구레나룻이 히죽 웃었다. 앞니 하나가 빠졌는지 누런 이 사이에서 바람이 쉬쉭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래. 안다고. 똥쟁이 게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치?”
구레나룻 뒤에 선 덩치 둘이 멍청한 웃음을 지으면서 게리를 놀리듯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넌 아마도 내가 궁금해하는 걸 풀어줄 수 있을 거 같거든?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대답하도록 해.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니까.”
게리는 겁에 질린 얼굴로 두리번거렸지만, 정작 눈앞에 선 사내를 바라보지는 못했다. 시선을 피하는 게리를 보며 웃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토엔 밑에서 얼마나 일했지?”
“······.”
겁에 질린 게리는 여전히 패닉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게 해줄 겸, 이라고 해야 할까? 사내는 손을 세차게 휘둘렀고 게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왼쪽 뺨을 부여잡고 정신을 차린 게리는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느긋한 여유를 보이며 손가락을 들었다.
“앉아.”
게리는 주춤거리다 사내가 발을 까닥하자, 얼른 일어나서 의자에 앉았다.
“손내리고.”
게리는 멈칫했지만, 얼른 손을 무릎에 딱 붙이고 정자세로 사내의 물음에 답할 자세를 취했다. 왼쪽 뺨이 붉게 타오르듯 붓고 있었다.
“두 번 묻기 싫은데, 대답을 안 해줘서 한 번 더 물을게. 잘 대답해 줘. 토엔 밑에서 얼마나 일했지?”
“사, 삼년 입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있던 조끼를 벗었다. 그리고 그 조끼를 뒤에 선 덩치에게 맡긴 후,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 정도면 이것저것 보고 들은 게 많겠네.”
“아, 아닙니다!”
“뭐?”
“······.”
게리는 괜한 소리 했다는 후회를 하며, 입을 다물고 또 다른 고통에 대비했다. 그러나 사내는 손을 쓰지 않았다. 다만 질문을 할 뿐이었다.
“심부름, 해봤지?”
“네?”
사내가 눈을 부라리자, 얼른 대답하는 게리였다.
“네, 네! 해 봤습니다.”
“어떤 심부름?”
“그, 그러니까 우유 심부름도 해 봤고, 채소 사 오라는 심부름도 있었고, 수레바퀴 고쳐오라는 심부름도 있었고, 또···.”
게리는 생각나는 모든 심부름을 줄줄 읊었다. 사내는 표정 없는 눈으로 게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슬며시 들었다. 저절로 게리의 입이 다물어졌다.
“토엔의 심부름. 해 봤지?”
“에?”
“토엔에게 아무도 몰래, 누구도 모르게 배달하라는 심부름, 해 봤지?”
딸꾹. 게리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횡격막이 경련을 일으켜,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이게 또 대답을 안 하네?”
“아! 해, 했습···.”
게리의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금 게리의 뺨을 강타한 손바닥 때문에 게리는 바닥을 굴렀고, 아무리 굴러도 뺨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지르면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지 못했던 게리는 끅끅거리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앉아.”
게리는 급히 정신을 수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시 정자세를 취하고 손을 무릎에 댔다. 하지만 얼얼함을 지나,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는 왼쪽 뺨 때문에 왼쪽 눈이 경련이 난 듯 꿈틀거렸다.
“심부름했지?”
“네, 했습니다.”
“뭔지 알아?”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알려주지 않았어요. 알아서도 안 된다고 협박해서 정말 모릅니다.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혹시라도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게리는 비명을 지르듯 변명을 했다.
“누구한테 받아서 누구한테 줬는지 이야기해봐.”
게리는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모두 털어놓았다.
“좋아. 그럼 토엔이 또 너한테 심부름도 시켰겠지?”
“···네.”
사내는 히죽 웃었다.
“토엔이 시킨 심부름에 대해서 설명해 봐.”
게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