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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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는 모처럼 늦잠을 자다가 일어났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기도 하지만, 늦은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는 일상도 나쁘진 않았다. 단점이라면 땀에 젖은 채로 일어나 뜨거운 햇살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정도는 게으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침실을 나와 거실로 나오니, 까맣게 타버린 작은 심지가 위태롭게 붙은 꼬마 양초가 식탁 위에 지난밤의 흔적을 남긴 채 눌어붙어 있었다.
하품을 한 차례 크게 한 게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집 밖으로 나왔다. 창으로 들어오던 햇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양의 뜨거움이 정수리를 관통하고 눈꺼풀을 찔러댔다.
“팔자 좋구나?”
옆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즉각 반응한 게리는 돌아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어나셨어요?”
“일어나긴 한참 전에 일어났지. 니가 나보다 더 신세가 좋구나?”
토엔은 뭔갈 씹고 있는지 질겅거리면서 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치드 덕분이죠.”
“나 참.”
시비를 걸고 싶어도 걸 거리가 없다. 확실히 루치드가 일을 맡은 이후, 비록 일거리가 줄어든 탓도 있다고는 하지만, 소위 효율이란 게 좋아졌다. 밤낮없이 일하던 게리의 얼굴에 피로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시간이 지체되는 일도 줄었고, 평판이 좋아지니 신관지구에서 일을 맡기지 않았던 집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점점 의뢰가 늘어나니 신관지구 내의 벌이가 쏠쏠해지는 추세였다.
루치드 개인으로만 봐도, 사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인 게, 어찌나 빨리 일을 처리하는지 게리가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 빈 수레를 끌고 오는 경우라면, 루치드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빈 수레를 끌고 왔다. 그리고 이후 수금을 위해 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릴 때도 들어보면 확실히 루치드가 일을 잘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 어린 녀석이 일을 잘하데? 저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들고 옮기는 게 예사 힘이 아니야?”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변기를 비우고 사라지는데, 집 안에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아서 좋아.”
좋은 평판이란 사업주의 관점에서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관지구의 주민들 중 반 이상이 공관지구에서도 일하는 이들인지라, 이런 평판이 전해진다면 공관지구의 일을 되찾는 것도 금방일 것 같았다.
다만 업주의 입장에서, 아랫사람이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비록 그에게 주어진 권리라 할지라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뭐라도 시켜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당장은 시킬 일도 없으니 빨리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상책이다.
“일어났으면 가서 밥이나 처먹던가, 아니면 성 밖에 나가서 구덩이라도 치우던가 해.”
구덩이 치우는 일은 매일매일 해도 똑같으니까, 굳이 시키자면 매일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루치드가 구덩이를 모두 비워놔서 당장 할 게 없어요.”
그랬다. 루치드는 무슨 수를 썼는지, 구덩이를 말끔히 비워놨다. 구덩이를 지키던 수하의 말에 믿을 수 없어 직접 가서 확인까지 했다. 구덩이 아래에 찰랑거리는 물과 밑바닥이 보일 정도라니.
“계속했더니 어느새 이렇게 됐네요.”
라는 미심쩍은 대답이나 듣자고 물었던 게 아닌데, 정작 본인이 저렇게 답변을 하니 더는 추궁할 수도 없어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그게 바로 엊그제 일이었다. 다시 떠올리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고, 웬 복덩어리인가 싶을 뿐이었다.
게리는 토엔이 잠시 멍을 때리는 사이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곁에 있어 봐야 잔소리 말고는 오붓하게 나눌 대화도 없는 터라 있어 봐야 무소용이었다. 당장 자리를 피한 뒤에 골목을 나선 게리는 가까운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사실 이렇게 늦은 아침에 식료품점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루치드가 일을 시작한 지는 일주일이 넘었지만, 그사이에는 사실 불안한 마음이 커서 늦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치드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서, 식탁 위에서 멍하니 있다가 루치드가 돌아온 뒤에 같이 점심을 먹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이틀 전, 토엔이 루치드의 성과를 눈으로 확인하고 입으로 찬탄해 마지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늦잠을 결행한 게리였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게리는 히죽 웃으며 몇 가지 먹을거리를 손에 들었다. 오늘은 어쩐지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에 먹으면서 거리를 걷기로 했다.
“어이, 게리? 일 쫓겨난 거야?”
“게리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일 안 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게리를 보며 물었고, 게리는 웃으면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게리에게 행운이 찾아들었다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유유자적 걸어가던 게리는 어느새 상업지구로 향했다.
매대 앞에서 호객 행위를 하던 이들을 여유롭게 구경하며 입안에서 감도는 싱싱한 채소와 뻑뻑한 빵의 질감을 만끽했다.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
북쪽 성문 앞을 지키던 도순은 오늘따라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몇 번이고 창을 놓쳤다.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파트너가 걱정할 정도로 도순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했고, 짙은 다크서클이 눈동자를 집어삼킬 것처럼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집에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인데?”
“···돈 문제야.”
파트너는 입을 다물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검속(鈐束) 하는 데 집중했다. 도순도 파트너의 추궁을 피하려는 의도로 뱉은 말이었기에 파트너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이렇게 약 먹은 닭처럼 졸다가 경비대장의 순찰에 걸리기라도 하면 간단히 지적받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쓸 뿐이었다.
“수고하십니다.”
오물이 담긴 수레를 끌고 오던 남자가 경비병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경비병들은 수레만 보고도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지나가. 냄새난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레를 힘겹게 끌고 성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수레가 경비병들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어린아이였다. 어린데 힘은 좋은지, 아까 남자보다 훨씬 가볍게 수레를 끌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 수레는 뒤에서 밀어주는 이도 있었는데, 이 아이는 혼자 수레를 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경비병들은 인사 대신 코를 막으며 턱짓으로 지나가라는 뜻을 알렸다. 소년은 씩씩하게 수레를 몰고 성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왜 북문인 거야? 지들은 남쪽에 살잖아? 그럼 남문 쪽 가서 버려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말이야.”
굳이 대꾸하자면 남쪽의 귀족들과 부유층이 사는 경남지구에 폐를 끼칠 수 없으므로 북문 쪽에 구덩이를 만든 거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대꾸를 하는 것도 귀찮았던 도순은 그냥 대충 말을 받아주는 정도로만 대했다.
도순이 몰려드는 잠과 싸우고 있을 때, 그가 그토록 기대하던(?) 일이 벌어졌다. 경비대장이 일련의 병사들을 끌고 나타난 것이다. 물론 정기적인 순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순찰이 끝난 후에는 교대 인원이 올 때까지 경비대장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만 무사히 넘기면, 파트너에게 양해를 구해서라도 잠시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이상 없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왜 이러나? 도순.”
“······.”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말이 아니잖아?”
도순은 입을 열고 말을 하려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에 뭔가 막힌 것 같기도 하고, 입안의 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분도 들었다. 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혀 천장에 붙어있는지, 아랫니 쪽에 붙어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혀가 잘렸나?
방금까지 눈앞에 멋진 콧수염을 기른 경비대장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경비대장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자신이 뭘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얼굴 전체에 둔탁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순이 그렇게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도순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경비대장이 부르는데도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서 있더니 갑자기 바닥으로 쓰러져 버린 도순이었다. 놀란 경비대장이 움직이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먼저 반응하여 한 명은 경비대장 앞으로, 한 명은 쓰러지는 도순을 붙잡으러 뛰어갔다. 도순은 팔을 뻗어 부상을 막으려는 본능적인 움직임도 없이, 마치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를 강하게 바닥에 부딪힌 도순은 이마가 깨졌는지 피를 철철 흘리는데, 그래도 눈은 게슴츠레한 상태 그대로였다.
“이거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이래!”
병사들이 도순을 둘러싸고 도순의 정신을 차리게 노력을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장님, 여기!”
도순의 상태를 살피던 병사가 도순의 코 밑에 난 피를 가리켰다. 새까만 피였다.
“독인가?”
보통 새까맣게 오염된 피는 독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 의무대로 데리고 가게.”
병사들은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어 얼굴에 두르고 코와 입을 막았다. 그 후 정신을 잃은 도순을 한 사람이 업고 뛰기 시작했다.
“자네 둘이 이곳을 지키도록 하고,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살피도록. 토우즈, 넌 따라와.”
도순의 파트너 토우즈는 난데없이 벌어진 일에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경비대장이 다른 사람에게 업무를 맡기고 따라오라고 하니 한 것도 없이 덜컥 겁이 났다. 경비대장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뭔가 오늘 하루가 불길하게 흘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이미 최악의 하루가 되어버린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
구덩이에 수레에 싣고 온 오물을 모두 버린 뒤, 오물이 마르고 굳을 때까지 다른 구덩이를 청소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사실 잘 마르지 않기도 했고, 가장 아랫부분은 늘 축축해서 구덩이를 말끔히 청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깔끔하게 처리했고,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리를 끝내고 구덩이에서 약간 떨어진 감시소―감시인이 사는 집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집에서 구덩이가 잘 보이지 않았다―에 가서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감시인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느릿느릿 구덩이가 보이는 언덕을 올라갔다.
“잘 치웠네.”
잘 보이지도 않지만, 구덩이 주변이 깨끗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확인을 마친 감시인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 확인증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확인증을 가슴에 넣고 돌아서려는데, 감시인이 멈춰 세웠다.
“오늘은 이걸 들고 가.”
감시인은 작은 자루를 하나 주었다. 호기심을 보이려는 찰나 감시인은 경고를 던졌다.
“열어볼 생각 말고. 수레에 실어. 똥주머니 아래에 밀어 넣어서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돌아앉았다가, 다시 일어섰다. 투덜거리면서 일어난 감시인은 루치드의 손에 들린 자루를 빼앗았다. 그리고 집 옆에 세워둔 수레로 가더니 직접 오물 주머니 아래를 들추고 그 밑에 자루를 숨겼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시범을 보여준 거야. 다음부터는 직접 하도록 해. 알았지?”
“그게 뭔데요?”
“알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그냥 가서 토엔에게 물건 왔다고만 전하면 돼.”
감시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루치드를 째려보았다.
“만약 니 마음대로 자루를 열었다간 그날로 넌 끝장이다. 알겠어? 자루는 열면 그 흔적이 남게 되어 있으니까, 절대 열어보지 말길 바란다.”
감시인은 집으로 들어갔다. 루치드는 잠시 수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끌었다. 늦지 않게 도착한다면, 오늘도 점심은 게리와 함께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