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트립(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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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엔은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너무 나빠서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아서 시비를 걸고 싶었고, 평온한 낯짝을 하고 지나가는 이라면 누구든지 자빠뜨려서 그 얼굴을 짓밟고 싶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했다. 철이 없을 때.
하지만 이제는 거느린 식구도 있고, 사업을 벌이는 사업가의 입장에서 함부로 처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겨도 제대로 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이런 이들은 존재했고, 이런 이들을 위한 장소와 수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풀고 싶어도 풀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극한의 스트레스를 극한의 쾌락으로 맞바꾸어 주는 이들이.
“어서 오세요.”
구관 지구는 어쩌면 상업지구의 오래된 가게들 만큼이나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래되었다. 붉은 기둥이 없다뿐이지, 더 오래전에 지어진 집들도 많았다. 하지만 복잡한 골목과 골목 사이로, 촘촘하게 들어선 집들에는 수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거주자들이 머물고 있어서 함부로 집을 철거할 수도 없었다. 좁은 성안에서 생긴 난민(?)은 그대로 거리의 부랑자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부랑자인 이들의 경우에는 차라리 구석에 처박아두는 편이 낫다는 위정자들의 판단 덕분이기도 했다.
그런 오래된 집 중의 하나인 검은 대문을 열고 들어간 토엔은 회색 드레스를 걸친 중년 여인의 환대를 받았다.
“있어?”
“이쪽으로.”
긴말이 필요 없었다. 토엔은 이 집의 단골이었고, 회색 드레스는 토엔의 말이 짧을수록 그가 많이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인이 안내한 방 앞에서 토엔은 따라온 덩치들을 문밖에 세워두고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방 안에는 묘한 향이 나는 향초가 작은 협탁 위에서 홀로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토엔은 익숙하게 조끼를 벗어 벽에 걸어두고, 내의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걸친 게 많진 않아서 금세 토엔은 우람한 가슴 근육을 드러내었고, 그 시간에 맞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토엔의 허락 이후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온 이는 검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위로 살짝 올라간 눈초리와 다소 뭉툭한 콧대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렸고, 윗입술보다 두꺼운 아랫입술에는 진한 붉은색이 입혀져 있었다.
여자는 쟁반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익숙하게 들고 온 쟁반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향초를 벽 등장 위에 올려두었다.
누구냐, 혹은 오랜만이다, 같은 인사는 없었다. 여자는 말없이 입고 있던 얇은 슬립형 슈미즈를 벗어 한쪽 구석에 있던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이 토엔은 금이 간 나무 쟁반 위에서 장갑을 들었다. 채찍과 회초리와 같은 것보다는 맨손이 편했다.
여인은 벽 한쪽에 마련된 흙이 담긴 나무 상자에 긴 종이 심지를 하나 꽂고 그 위에 불을 붙였다. 종이가 타들어 가면서 향초와는 또 다른 향이 방안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누워.”
여자는 침대 위에 엎드렸다. 토엔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의 엉덩이를 바라보면서 바지를 벗었다. 곧 토엔 역시 몸 위에 걸친 것이 없어진 상태에서 오직 장갑을 낀 손만이 불끈불끈할 뿐이었다.
“시작한다.”
여자는 엎드린 상태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방안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처음 토엔을 맞이하던 중년 여인이 연초를 물었다가 긴 연기를 토해냈다.
“너무 상하는 거 아닌가 몰라.”
옆에 있던 턱이 뾰족한 사내가 여인의 연초를 뺏어다가 한 모금 깊게 빨아 마셨다.
“돈 벌려면 별수 있나?”
“저놈 한 번 오면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은 기분이야.”
“그건 기분일 뿐이고. 라시오도라, 당신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부르지 마. 기분 나빠.”
“라시오도라가 어때서?”
“차라리 거미라고 불러.”
라시오도라는 거미와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로 숲속에서 은신하고 사는 종이었다. 이 근방에는 잘 나타나지 않아서 볼 일이 별로 없지만, 대륙에서는 흉포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몬스터의 대표 격인지라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었다. 용병들 중 라시오도라의 타투를 새긴 이는 사람을 고문하고 잔혹하게 절단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당신 때문에 이 근방 여자들이 숨어 지낸다는 이야기가 있어.”
“지들이 돈 벌려고 나한테 오는 거지, 내가 게네들을 억지로 끌고 온 적은 없어.”
빌린 돈을 안 내놓으면 죽인다고 협박을 한 적은 있다던데. 뾰족 턱이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아꼈다.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고 이렇게 얼굴 마주 보며 연초도 같이 피우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도 라시오도라는 이 일대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악명으로만 따지면 뒷골목 대장 격인 부르스 보다 더 할지도?
“그나저나 토엔은 왜 저런데?”
라시오도라가 연초를 입에 물었다가 뾰족 턱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뾰족 턱이 히죽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동전 몇 개를 꺼내 놓았다. 라시오도라가 그걸 받아 소매 안쪽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포세한테 자리를 뺏겼대.”
“에이, 우리끼리 이러지 맙시다. 포세한테 자리 뺏긴 걸 누가 몰라? 그리고 고작 그것 때문에 토엔이 저렇게 화가 났을 리가 없잖아요?”
정보를 사고파는 업을 하는 뾰족 턱의 주요 정보원은 라시오도라였다. 늘 이런 식으로 놀러 오듯 찾아와서 한마디씩 묻고 정보를 얻어갔다.
라시오도라는 소매를 들어 살짝 흔들었다. 소매 속 동전이 짤랑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 소리만큼의 정보야.”
정보업자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가 동전 몇 개를 더 꺼내 들었다.
“우리 웬만하면 후불제 합시다. 내가 셈을 제대로 안 치러준 적 없잖아?”
“됐고. 토엔의 부수입 있지? 그게 줄었다는 소문이야.”
말만 들으면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꽤 중요한 정보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네? 설마, 선이 끊긴 건가요?”
“그런가 봐.”
라시오도라는 딱 그 정도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는 듯 이후로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정보업자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토엔의 부수입은 마약이었다. 대륙 쪽의 조직과 선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선이 갑자기 끊어졌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어떤 사정으로 끊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권력 분포도를 새로 그려야 할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혹은 생길지도 모른다.
정보업자는 라시오도라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
“저녁 어떻게 할 거야?”
게리는 화제를 바꿀 겸 루치드의 최초 제안을 상기시켰다. 루치드는 멀리 산을 보고 아직 늦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일단 서문으로 가요.”
“서문?”
현재 있는 곳이 중앙 상업지구였기에 죽 서쪽으로만 가면 서문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거기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 가져와야 할 게 있어요.”
게리는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지만, 루치드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서문으로 간 두 사람은 경비를 서고 있는 이에게 인사를 했다.
“구덩이에 잠시 볼 일이 있어요.”
인상을 찌푸리던 경비 두 사람은 곧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
“구덩이는 왜?”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저 혼자 갔다 올게요.”
게리를 서문 근처에서 기다리게 한 후, 루치드 혼자 나가려는데 게리가 붙잡았다. 왜 그러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게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도망가는 건 아니지?”
루치드는 빤히 게리를 바라보다가 한 마디만 남기고 돌아섰다.
“아직은요.”
불안한 시선이 루치드의 등에 와 닿았지만, 루치드는 모른 척하고 성문을 나섰다.
얼마 후, 루치드는 등에 자루를 하나 지고 나타났다.
“뭐야?”
게리의 물음에 루치드는 게리를 데리고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성벽으로 가서 주위 사람들이 별로 없음을 확인한 후, 자루를 열어 보였다.
“어? 노루네?”
노루 한 마리가 목이 꺾인 채로 자루 속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보니 이 무거운 걸 아무렇지 않게 들고 온 루치드의 힘도 힘이지만, 역시 노루를 가지고 온 수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리의 물음에 루치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사냥이요.”
그 잠깐 사이에 사냥해서 노루를 잡았다고? 사냥 천재? 사냥꾼의 신? 그러다 게리는 그것이 루치드가 말한 저녁이라는 걸 깨달았다. 게리는 화색을 띠며 말했다.
“이게 우리 저녁인거지? 우리 오늘 저녁에 고기 먹는 거야? 바비큐야?”
루치드는 고개를 저었다.
“요리할 자신도 없고요, 이 가죽도 그냥 버리긴 아까우니까 상점에 팔고 돈으로 받을 생각이에요.”
“아, 그렇구나. 우와 역시 넌 똑똑해!”
‘역시’라는 수식어가 절로 붙을 만큼 오늘 하루 동안 루치드에 대해 많이 놀라고 감탄하는 중인 게리였다. 상점으로 가서 돈으로 바꾼 후―가죽에 상한 흔적이 없어 더욱 돈을 많이 받았고 차후에도 이런 거래라면 환영한다는 가게 주인의 지지도 있었다―야외 식당에 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원하시는 대로 드세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시켜도 아무 말 않을 거지?”
“보셨잖아요? 얼마 받았는지. 마음껏, 한도 내에서 시켜 드세요.”
게리는 그 한 마디에 여태껏 보아온 중 가장 밝은 표정을 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루치드는 게리가 메뉴를 정하고 시키는 동안, 홀로 생각에 잠겼다.
농부의 이야기나 행정관의 지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지구에서도 이와 비슷했다. 누구나 다 천재라고, 영재라고 떠들어대지만, 본인은 전혀 나설 생각이 없었고 나서고 싶지도 않았다. 불가피하게 나설 경우에도 최대한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움직였다. 비록 그 선이 때로는 과하게 적용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가장 적정한 선을 지켰다고 봤다.
그러나 문제는 루치드 본인의 성향이었다. 단순히 튀지 않는다는 선이 아니라는 것을 행정관이 지적했다. 나를 속이고 있다는 말이 왠지 가슴에 걸린 루치드는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나를 속이는 것이 무엇인가?’
희미하게나마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말 그대로 희미해서 마치 불투명한 거품에 쌓여 있었다. 혹은 먼지가 자욱하게 덮인 유리병 같았다. 거품을 터뜨리든, 먼지를 닦아내든 해야 보일 것 같은데, ‘꼭 그래야 하나?’라는 생각이 그것을 방해했다.
‘그냥 그대로 둬.’
속삭임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이명(耳鳴)인지 위로인지.
‘넌 잘하고 있잖아. 왜 엉뚱한 질문에 널 혹사하는 거야. 바른 질문에 바른 답을 한다. 니가 지금껏 배운 것을 잊은 거야?’
‘나를 속인다’는 명제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질문이었던가? 실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 그저 나를 떠볼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던가.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에 혼자 심각하게 속을 파헤치며 괴로워하는 것일까?
“여기 놔주세요.”
루치드가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받고 기뻐하는 게리의 얼굴이 보였다.
“잘 먹을게. 너도 얼른 나이프 들어.”
게리는 곧 소스를 입 주위에 묻히면서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게리를 보던 루치드가 나이프를 드는 대신 인사를 남겼다.
“저 먼저 갈게요.”
루치드는 멍한 눈으로 보는 게리를 향해 아까 가죽 상인에게 받았던 돈을 모두 주었다.
“이걸로 계산하고 남는 건 가지고 계시다가 나중에 제게 주세요.”
“넌?”
“전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돼요. 늦어도 모레 새벽에는 다시 올 거예요.”
“모레?”
게리가 눈을 껌뻑이며 묻자, 잠시 궁리를 하던 루치드는 정정해서 말했다.
“그 전에라도 잠시 중간에 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양해해 주세요. 토엔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시고요.”
게리에게 인사를 하고 루치드는 가게를 나갔다. 게리는 잠시 루치드의 뒷모습을 보다가 손에 들린 동전을 바라보았다. 5젠 짜리 동전 3개. 이 정도면 오늘 저녁을 해결하고도 동전 2개가 남는다. 게리는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시 식사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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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웬일로 늦잠을 다 잤어?”
명수가 단유를 보며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늦게 나온 거야.”
“그래? 그럼 운동은?”
“같이 나가자.”
“콜!”
조기축구회 시합을 뛰러 나가는 명수의 뒤를 따라가는 단유는 잠깐 명수의 뒷모습에서 누군가가 연상되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젓고는 조금씩 다리에 힘을 불어넣고 뛰기 시작했다. 운동으로, 땀을 흘리며 머릿속을 비워나가야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