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 트립(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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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관은 루치드와 게리를 데리고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집무실 바로 앞에 놓인 조그만 책상에 비서가 앉아서 일을 보다가 행정관을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홀리, 일이 있어서 ‘시설부’에 가지를 못했는데, 그곳 부장에게 가서 다음에 다시 뵙겠다고 전하고 약속 좀 다시 잡아줘.”
“알겠습니다.”
비서는 행정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나오던 중 허름한 옷차림의 루치드와 게리를 훔쳐보았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행정관도 다른 언급이 없었던지라 우선은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서둘러 나갔다.
“이리 앉게.”
주단(朱丹)이 깔린 긴 의자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는 게리는 연신 주변을 훑으며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반면 루치드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서 행정관의 말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이 행정관에게도 인상적이었던지, 콧바람 빠지는 소리를 살짝 내더니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지?”
“루치드입니다.”
턱을 쓸면서, 눈을 살짝 게슴츠레 뜨던 행정관은 게리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주위를 보느라―솔직히 루치드의 눈에 행정관의 집무실이라는 곳은 굉장히 소박한 모습이어서, 그다지 볼 게 없었지만 게리는 그렇지 않았던지―정신이 없던 게리는 루치드가 팔꿈치로 여러 번 신호를 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름을 말했다.
“그래, 아까는 인상적이었다, 루치드. 혹시 따로 글을 배운 적이 있던가?”
루치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디서? 어느 정도로 공부한 거지?”
루치드는 대답을 고르다 신중하게 답했다.
“어릴 때, 글과 셈을 조금 배웠습니다.”
“셈도 배웠다고?”
행정관이 눈을 반짝이며 루치드를 보기 시작했다. 늘어져서 축 처진 볼살을 쓸어내리던 행정관이 잠시 눈동자를 옆으로 옮겼다.
“저기 서가가 보이느냐?”
루치드가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행정관이 문제를 냈다.
“저기 서적 중에 빨간 표지와 검은 표지가 모두 몇 개이냐?”
루치드는 힐끔 쳐다보고 대답했다.
“빨간 표지가 5권이고, 검은 표지가 12권이니 총 17권이죠.“
행정관은 루치드의 빠른 셈에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그보다 복잡한 셈도 가능한가?”
“저 책장은 총 5칸으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제일 위 칸에는 11권의 책이 꽂혀 있네요. 만약 칸마다 같은 권수가 꽂혀 있다고 가정한다면, 총 55권이겠죠. 하지만 책마다 두께도 다르고 어떤 칸은 책이 빠진 자리도 보이네요. 그래서 각 줄을 모두 개별 합산한다면 저곳에는 총 47권의 책이 꽂혀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고요. 음, 특별히 계산할 만한 내용이 없어서 저도 뭐라고 대답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놀랍구나!”
행정관은 손뼉을 쳤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 중 하나를 골랐다. 루치드가 그 서류를 건네받으니, 예산 집행 문서 중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서류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앞뒤가 빠져 맥락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전월에 이월된 480만 720젠 중에 이번 달에 보수공사비로 책정된 돈이 300만젠이라고 나와 있네요. 300만젠 안에는 재료비 150만젠과 인건비 50만젠, 기타 시설비로 100만젠이 책정되어 있고요.”
그 안에는 좀 더 복잡하게 개별 품목과 개당 가격이 매겨져 있었으나, 루치드가 빠르게 계산해서 단순하게 읊었다. 당연히 행정관은 루치드의 놀라운 연산속도와 빠른 이해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행정관은 루치드에게서 서류를 받아 책상에 올려놓고 다시 루치드 앞에 앉았다.
“솔직히 놀랍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밑에서 일하는 수많은 부하 중에서도 너처럼 빠르게 셈하고 일을 처리하는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 정도라면 충분히 최고 수준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의심스러운 점이 있구나.”
루치드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신중했건만, 또 어떤 점이 행정관의 눈에 거슬렸던 것인지 궁금했다. 궁금했고 초조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왜 오물수거를 하는 것이냐?”
아, 그런 이유라면. 루치드는 혹시라도 ‘마법사’라는 오해(?)를 받을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간신히 굳은 얼굴을 풀며 대답했다. 루치드가 녹스에 들어온 뒤 다위를 만나게 된 사연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행정관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처럼 똑똑한 녀석이 그런 수작에 말려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지 않느냐?”
“네?”
“아닌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행정관은 머리가 복잡하다는 듯,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장고에 들어갔다. 나름 똑똑하다는 이들을 끌어모아 수하로 쓰고 있지만, 단언컨대 눈앞의 아이만큼 똑똑한 아이는 본 적이 없던 행정관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기 수하들 수준으로 아이를 바라보게 되는데, 수하들은 어엿한 성인임은 물론이고 일자리를 주겠다는 거간꾼의 꾐에 빠져 오물 수거일을 맡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외견상으로만 보면 아직 어린아이였고, 그러니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했다.
“오물 수거일을 계속할 생각이냐?”
루치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사실 제가 매일 일을 할 수가 없고요, 저 나름대로 볼일이 있거든요. 그런데 담당자? 맞나, 아무튼 토엔이 그랬어요. 격일로 해도 된다고요. 그런 조건에 맞춰서 일할 수 있다면 오물 수거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죠.”
“넌 왜 그 일을 하려는 것이냐?”
“네? 아니 방금 설명해 드린···.”
행정관이 손을 뻗어 루치드의 말을 막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행정관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아래로 깔고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넌 니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고, 환경도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
당연히 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리 없다.
“눈치를 보니 아는 것 같구나. 그러니 묻는다. 넌 왜 일을 하는 것이냐?”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같은 이야기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있다. 네 능력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넌 그런 일을 찾을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구나. 격일이라고? 내 입장에서 솔직히 너 정도라면 격일로라도 일을 맡기고 싶어질 것 같은데, 다른 곳이라고 다를까?”
루치드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머리는 똑똑한지 모르겠지만, 아직 제대로 머리를 쓰는 법을 모르는 아이구나.”
차마 행정관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 루치드는 고개도 절로 내려가는 듯했다. 오후 햇살이 창을 넘어 주단을 반짝거리게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루치드의 무릎까지만 와 닿다가 그 위로는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너를 속이고 있는 것이냐?”
루치드는 고개를 들었다.
“니가 스스로 오물 수거일을 선택했다는 것은 잘 알겠다. 다른 선택지는 들여다보지도 않았거나, 혹은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고 여긴 탓일 거다.”
행정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덕분에 무릎까지 비추던 햇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예전에 이런 적이 있었다. 한 농부가 자신이 경작하던 밭에서 귀한 약초를 구했지. 농부는 그 약초를 들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날 찾아왔다. 당시 난 상인조합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던 때였는데, 상인조합에 찾아오는 이들을 안내하거나 간단한 상담을 해 주곤 했지. 그 농부는 나에게 그 약초를 보이면서 물었다. 이 약초가 뭐냐고. 난 처음에 그 농부가 날 가지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건 꽤 유명한 약초였고, 약을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모습만 보면 ‘아 그거!’라고 알아챌 정도로 유명한 약초였으니까.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농부가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고맙다고 했다. 자기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고. 그래서 다른 이에게 확인받고 싶어 그랬다며 말이다.”
행정관이 몸을 돌려 루치드를 보았다.
“누구나 다 아는 약초를 보고도 자신을 의심해서 타인에게 확인받으려 하는 농부의 모습은 사실 특별한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습성이 있지. 나에게 이런 행운이, 같은 거랄까? 넌 어떠냐?”
루치드는 행정관의 말을 이해하려 했지만, 어딘가 막힌 것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너의 재능은 누구나 다 알 정도로 뛰어나다. 의심스러우냐? 네 옆에 있는 이의 눈을 봐라. 아까부터 놀라서 눈을 감지도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니.”
그제야 게리가 자신의 표정을 수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행정관은 말을 이었다.
“너도 너의 능력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오물 수거일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속일 마음이 있다는 것이겠지. 타인이거나, 혹은 자신이거나.”
타인을 속인다는 의심은 이해가 간다. 그런 의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자신을 속이다니?
“약초는 약방에 팔거나, 혹은 직접 달여서 먹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비싸고 팔 수도 있고. 그런데 만약 그 약초를 땔감으로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넌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아마 내가 지금 너에게 갖는 생각과 같을 것이다.”
행정관이란 사람은 통렬하게 루치드의 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너의 눈을 보아하니 그렇게 나쁜 마음을 가진 이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이 정도로 하마. 다만 속을 모르는 이를 단지 능력만 보고 일을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처음 널 데리고 올 때 가졌던 내 생각만 고치면 아무 문제가 없겠구나.”
행정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치드와 게리가 서둘러 일어나자, 행정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살펴 가라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행정실을 나온 두 사람은 어느새 자기 키보다 길어진 그림자를 옆에 두고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없이 한참을 걷던 게리가 문득 루치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왜 이 일 하는 거야?”
“네?”
“솔직히 난 아까 행정관님이 하신 말씀은 잘 이해가 안 돼서 잘 모르겠고. 니가 엄청나게 똑똑한 녀석이란 건 알겠어.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더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더 많은 보수를 받으면서 일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라는 게리의 질문에 루치드는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 튀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의지가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편해서요.”
“응?”
“편해서 하는 거라고요.”
게리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루치드는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다. 오물 수거일은 루치드에게 편했다. 몸의 부담이 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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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나간 뒤, 심부름을 보냈던 병사 한 명이 돌아와서 보고를 올렸다. 가만히 보고를 듣던 행정관은 혼자 있고 싶다는 말로 병사를 내보내고 창가에 서서 넓은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 끝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이 작게나마 보였다.
“약초를 팔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농부는 끝내 약초를 팔지 않았어. 그리고 죽을 때까지 밭을 매다가 갔다.”
농부는 약초가 있어도 제대로 쓸 줄을 몰랐다. 자신에게 큰 행운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고맙고 감사해 하면서도 그 약초를 다른 사람에게 팔지도, 자신이 먹지도 않았다. 그저 행운의 징표라며 집 안 깊숙이 모셔놓았다고 했다.
그 농부가 죽은 후, 약초를 챙긴 사람은 바로 행정관 본인이었고, 행정관은 그 약초를 팔고 그 돈으로 관직에 들어섰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행정관에까지 오른 후, 오랜만에 옛 생각을 떠올려 본 셈이었다.
“얼마든지 부유하게 살 수 있음에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속인 것이다, 그 농부는. 너도 그런 것이냐?”
행정관의 얼굴에 어두운 노을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