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 트립(5)
-------------- 245/952 --------------
“다녀왔습니다. 어? 여기 계셨네요? 토엔.”
키는 루치드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커 보이는 것에 반해 뼈만 남은 사람처럼 말라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왔군. 인사해라, 너랑 교대로 일하게 될 루치드라고 한다.”
문을 닫고 들어오는 남자가 식탁으로 다가오면서 그의 표정이 식탁의 불빛에 의해 보이기 시작했다. 마른 몸매만큼이나 광대가 불거져 보이는 마른 얼굴의 사내가 유난히 붉은 입술을 길게 늘어뜨렸다.
“와, 잘됐네요. 반갑다. 난 게리라고 해.”
루치드는 핼쑥한 얼굴의 게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치드라고 해.”
그리고 다시 토엔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흠. 질문이 많구나.”
토엔은 입술을 씰룩이다가 턱짓으로 말해보라는 듯한 시늉을 했다.
“어쩌면 제가 계속 일을 못 할지도 모르거든요.”
“뭐?”
“가끔씩만 도울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는데요.”
토엔은 소리 나게 고개를 홱 돌려 다위를 쳐다보았다. 다위는 당황해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 그런 말은 없었잖아? 일,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그랬단 말이야.”
“이야기하려 했는데, 다위가 무작정 끌고 왔잖아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오는 동안에도 계속 말을 하시니, 할 틈이 없었죠.”
다위는 손을 내저으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토엔의 고리눈은 다위의 입을 다물게 했다. 토엔은 그렇게 다위를 보다가 다시 루치드에게로 옮겨졌다.
“나와.”
루치드는 자신에게 말하는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닫혀있던 안쪽 문이 열리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한 덩치 두 사람이 나타났다. 팔에는 기이한 문양의 타투를 새긴 덩치 두 사람은 토엔의 뒤에 섰다.
그 뒤에야 토엔이 말했다.
“일하겠다는 놈이 준비가 덜 됐구나. 일할 마음이 없는 거지? 아무래도.”
‘정신 교육을 시켜줘야겠구나’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에 루치드가 말을 끊고 나섰다.
“잠시만요, 일단 말을 끊어서 죄송한데, 매번 이런 식으로 대화하실 요량이라면 저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중간에 끊고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부디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말씀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토엔은 루치드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청하게 ‘엉?’ 하고 되물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게리가 피식 웃고 말았다. 웃고 나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입을 막아 보지만, 이미 토엔의 뒤에 섰던 덩치 한 사람이 게리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하지만 덩치가 무언가를 하기 전에 방 안의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차피 일당이라도 주신다니, 어쩌면 일의 성격상 매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건 제가 어떤 일인지 몰라서 그런 것일 테고, 그건 뒤에 천천히 조율하기로 하고요. 제가 일할 수 있는 조건은, 일단 다음과 같아요. 첫째, 비정기적인 일. 제가 자주 자리를 비울 수 있거든요. 대신 일을 할 때는 얼마든지 길어도 상관은 없어요. 자리를 비운 시간만큼 채울 수 있다면 노력할 테니까요. 두 번째는.”
“그만.”
토엔이 조금 전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루치드의 말을 잘랐다.
“맹랑한 녀석이구나.”
다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토엔이 저런 목소리, 저런 분위기로 말을 걸 때는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릴까, 도망갈까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 토엔의 말이 이어졌다.
“감히 털도 안 난 조그만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고 깝죽대는 것이냐?”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루치드는 문득 제윅이 했던 말을 떠올랐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가리켰던 제윅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이런 요구와 질문은 이 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20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녹스 성의 성벽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토엔, 잠시만요.”
토엔을 말린 것은 게리였다. 게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언제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토엔의 앞을 막아섰다.
“토엔, 이 꼬마애는 분명 토엔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아요. 잘 모르니까 저렇게 건방진 얘기도 하는 거고요. 그런데 토엔이 여기서 화를 내고 저 아이를 쫓아내면, 토엔의 기분은 풀리겠지만, 내 후임은 또 없어지는 거잖아요? 나 안 불쌍해요? 날 봐서라도 한 번만 봐줘요, 토엔. 다위도 한 마디 해봐요.”
“응?”
다위는 뜬금없이 소환된 자신을 가리키며 게리를 바라보았다.
“다위, 당신이 데리고 온 아이 맞죠? 그럼 당신도 책임이 있는 거잖아요? 이봐요, 다위. 나 혼자서는 이 일 절대로 못 해요. 토엔 알잖아요? 나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요. 내가 언제 토엔 말에 싫다 한 적 있어요? 나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잖아요? 그러니까 토엔, 제발 날 봐서라도 화를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해 봐요.”
게리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다위가 눈치를 보다가 덩달아 토엔을 말렸다.
“토엔, 내 잘못도 있어. 맞아.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일단 화 좀 참고 이야기를 하자고.”
게리와 다위가 동시에 토엔을 말렸다. 루치드는 한 편의 희극 같다는 생각을 뒤로하고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래요?”
게리가 고개를 돌려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오물처리.”
“네?”
****
극적으로 토엔은 화를 다스리고 루치드와 대화를 시도했다. 루치드도 최대한 상대를 고려하여, 아니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여 말을 아끼면서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루치드는 일을 얻었다.
“좋다. 너 말대로 일이 최대한 밀리지 않는다면야 나도 더는 말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일이 밀려서 게리의 부담이 커진다거나, 혹은 구덩이가 넘치는 일이 발생하면, 그때는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 혹시라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녹스 성 사대문 모두에 내 눈과 귀가 있으니까, 만약 달아날 시도라도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알겠지?”
“콜.”
루치드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토엔은 어정쩡한 눈치로 손을 마주 잡았다.
게리가 루치드를 데리고 거리로 나갔다.
“난 정말 니가 이 일을 하게 돼서 기뻐. 사실 이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녹스 성이 보기보다 넓단 말이지. 이 넓은 곳을 나 혼자 감당할 수가 없다고. 2주 전까지는 같이 하던 친구가 있긴 했는데, 불의의 사고로 함께 할 수 없게 되었거든. 덕분에 지난 2주가 나한텐 지옥과도 같았어. 그래서 니가 온 게 이보다 기쁠 수 없다고. 알겠어?”
루치드는 사정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기뻐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게리는 집 뒤편에서 바구니와
이륜 수레를 꺼내왔다.
“내가 앞에서 잡을 테니까, 넌 뒤에서 밀어. 그리고 길은 기억하는 게 좋아. 알겠지?”
그리고 게리와 루치드는 수레를 밀고 끌어서 골목 사이 사이를 지나갔다.
“한 가지 철칙이 있다면, 절대 큰 거리로 나서면 안 돼. 특히 포장도로 위를 따라가는 건 금물이야. 잡히면 벌금 정도로 끝나지 않아. 알겠지?”
게리와 루치드는 ‘구관지구’를 지나 북문 쪽에 있는 ‘신관(新慣)지구’를 향해 갔다. ‘신관지구’는 북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민가 지역이었다. 구관지구와 달리 최신식(?) 석조 건물들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여기서도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을 따라가야만 하고, 소란을 피워서도 안 돼. 여기는 꽤 높은 분들이 많이 사는 곳이거든.”
하얀 석벽의 이층집의 문을 두드리자, 하얀 두건을 둘러쓴 붉은 뺨의 중년 여성이 얼굴을 드러냈다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게리가 먼저 들어가고 뒤따라 루치드가 따라 걸어갔다. 게리는 구석에 놓인 항아리를 들어다가 수레로 옮겼다. 그리고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수레 위의 커다란 주머니에다 옮겨 담았다.
흐물흐물한 대형 가죽 주머니가 꿀렁대는 게 보였다. 게리가 다시 항아리를 집 안에 들여다 넣은 뒤, 다음 집으로 건너갔다. 그 사이에 루치드를 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주머니 대신 커다란 자르(Jar)를 쓰기도 했다는데, 무겁고 깨지기도 쉬워서 주머니로 바꿨대. 보기에는 그렇지만, 처리하긴 훨씬 쉬워져서 나도 지금이 낫다고 생각해.”
주머니를 보며 루치드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본 게리가 루치드를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를 던진 것이리라. 그런 배려가 싫지 않아,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집에서는 게리를 대신해서 항아리를 들었다. 그렇게 한 지구를 모두 돌았더니, 주머니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서, 수레를 끌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제 이 주머니를 비우고, 다음 지구로 건너가야 돼.”
북문으로 나간 게리와 루치드는 경비대원의 손짓에 멈춤 없이 계속 수레를 끌어 성 밖으로 나갔다. 성을 나오자마자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40걸음 정도 나가니, 시커먼 구덩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토엔의 근처에 서 있던 덩치와 비슷하게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안녕, 밀리헤온.”
덩치가 손만 들어 게리의 인사를 받았다. 게리는 수레를 구덩이 가까이에 대고는 주머니의 아랫부분에 있던 마개를 열었다. 푸스슥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내용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밀리헤온은 냄새를 맡지 못해. 원래 못 맡는지, 아니면 이 일을 하다가 막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
그 와중에 심심했던지 게리가 다가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담당 지구를 돌고 난 뒤, 구덩이에 옮기는 것이 1차. 그 후에 다시 이곳으로 와서 구덩이의 것을 다시 옆의 구멍으로 한 칸씩 옮기는 것이 2차. 그렇게 일을 마치고 밀리헤온에게 확인을 받으면, 토엔에게로 돌아가 일당을 받고 하루 일을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빈 주머니를 다시 정비하여 녹스 성으로 들어오던 중에 루치드가 물었다.
“녹스 성 전체를 우리가 다 해야 하는 거예요?”
게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신관지구’랑 ‘경관지구’만 담당해. 상업지구랑 남쪽의 ‘경남(京南)지구’는 포세 애들이 하고. 사실 그쪽이 더 돈이 되는데, 보시다시피 우리가 인력도 모자라고, 게다가.”
게리는 듣는 사람도 없건만 굳이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이듯 말했다.
“토엔이 포세에 비해 세력이 약해. 그래서 알짜는 먹지를 못한 거야. 소문에는 말이야. 곧 경관지구도 뺏길 거라는 소문이 있어.”
“그 소문이, 소문이 아닌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게리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루치드도 돌아보니, 게리 뺨치게 마른 몸매에, 게리보다 훨씬 강퍅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테일, 무슨 소리야?”
“못 들었나? 오늘부터 경관지구 우리가 맡는다고.”
“뭐?”
테일이라 불린 남자는 히죽거리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앞에서 수레 3대가 덜거덕거리면서 달려와 게리와 루치드의 앞을 막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경관지구는 우리가 맡으니까, 너희들은 이리로 올 필요 없어.”
“···토엔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어.”
“그럼 이제 가서 들으면 되겠네. 그만 돌아가.”
수적으로도 밀린다는 생각이었던지, 게리는 감히 나설 생각도 못 하고 수레를 돌려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루치드야 당연히 분위기를 모르니 일단은 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다만 게리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짓던 테일의 표정이 어쩐지 과거 감옥에서 봤던 칼잡이와 인상이 비슷하다는 느낌에 기분이 불쾌해졌을 뿐이었다.
“제기랄.”
토엔은 단지 그 한마디만 하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게리는 루치드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 뒤에서 수레를 둔 뒤, 게리는 루치드를 데리고 북문으로 갔다.
“그래도 일은 마쳐야지.”
루치드는 일이 줄었으니 잘 된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럴 리가. 일당이 줄어드는 판인데, 이걸 누가 좋아해?”
“일이 많아서 힘들다고 했잖아요?”
“많은 만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거잖아?”
“힘들어도요?”
“힘들어도.”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그만큼 벌 수 있으니까. 죽기 전까지는 좋은 거야.”
루치드는 그 말에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냥 게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구덩이에서 게리와 함께 삽을 들고 옆 구덩이로 한 칸씩 퍼 나르는 일을 했다. 임시로 담는 구덩이와 영구적으로 담는 구덩이를 따로 두는 이유에 대해서는 게리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 이유까지 알아야 돼?”
그냥 시킨 대로 할 뿐이라는 게리의 말에 루치드도 더 이상은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