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44화 (244/956)

배틀 트립(4)

-------------- 244/952 --------------

어제는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고, 마음도 급해서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마을은, ‘마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그냥 ‘집터’ 정도로 부르는 게 나을 듯싶었다. 번듯해 보인다 싶었던 벽들은 거의 갈라지고 부서져 간신히 외형만 간직한 듯 보였고, 어떤 집은 아예 무너져 내린 곳도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지켜주리라 생각했던 나무 골조들은 가운데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바닥을 뒹굴고, 멀쩡한 식탁을 찾는 일이 어려워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루치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자고 마음먹고 왔지만, 역시 갈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바람마저 더워서 가만히 서 있어도 정수리 끝이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오래 생각해봐야 소용없어, 라고 알려주는 것 같아 루치드는 곧 선택했다.

무릎 위에까지 오를 정도로 길게 자란 풀들로 덮인 들판을 지나 들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멀리서 들려오는 산을 넘어, 루치드는 곧 녹스 성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녹스 성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예전처럼 거대한 성벽과 그 성벽 위를 돌아다니며 순찰 중인 경비대원들의 복장에도 변화는 없었다. 마치 20년의 세월이 사람에게만 적용된 것처럼.

줄을 서서 녹스 성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성문 출입구에서 간단한 신분 조회 후에 성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쉽게 들어갈 수 없고, 쉽게 나갈 수 없는 녹스 성과 조우한 루치드는 긴 줄의 끝에 서서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갔다.

동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대원들은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들이었다. 생김으로만 추측해보자면, 이전의 난리가 났을 때 아직 젖도 떼지 않았을 얼굴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루치드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름?”

“루치드요.”

조카뻘 혹은 나이 어린 동생뻘로 보이는 애가 동그란 눈을 하고 자신들을 바라보는데, 그 순진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직업정신이 투철했던 경비대원은 쉽게 인상을 풀지 않았다.

“용무는?”

루치드는 기다리는 동안 준비했던 대사를 읊었다.

“일자리를 찾으러 왔습니다.”

“일자리?”

거짓말도 아닌 것이, 사실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계에 자주 오게 될 것이라면 당연히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니 예전처럼 일자리를 얻어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했다.

“도망자인가?”

“아니요. 가족이 갑자기 사라져서, 그들을 찾는 중인데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요. 그래서 일단 살기 위해서 일자리를 찾는 중입니다.”

루치드로서는 달리 할 말도 없었고, 그저 솔직하게 털어놓는 전략을 취했다. 다만 불필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뿐. 두 경비대원은 잠시 서로 마주 보더니, 이윽고 루치드를 향해 말했다.

“통과.”

루치드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녹스 성안으로 들어서니, 예전과 달라진 점이 몇몇 보였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큰길을 중심으로 포장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지구의 보도블록처럼 칼 맞춤을 한 것은 아니지만, 또 비록 크기가 일정치도 않고 반듯하지도 않았지만, 네모난 석재를 바닥에 깔아서 길 위를 덮은 것은 루치드가 보기에도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남자가 루치드를 힐끗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너 이곳이 처음이구나?”

“네?”

“촌뜨기처럼 바닥만 보고 다니는 꼴을 보니, 누가 봐도 처음이란 걸 알 수밖에. 바닥에 돌을 깐 게 신기하냐?”

“···네.”

“이것 덕분에 비 오는 날에도 길을 걷기가 수월해진 건 물론이고, 말들이 이곳을 지날 때도 먼지가 나지 않게 되어서 얼마나 좋아졌는지 몰라.”

“언제 만든 거죠?”

“음, 아마 2년도 안 된 거 같긴 하네. 처음에 이 도로를 공사한다고 했을 때, 상인들이 엄청나게 반대를 했었지. 이 공사 때문에 사람들이 통행을 못 하니까 장사가 안된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곳 성주님이 비전이 있으셨던지, 공사를 강행하셨고, 결국 이런 길이 만들어진 거야. 사실 수도나 큰 도시를 가면 이런 길이 많다고 하더라만, 녹스에서도 이런 길이 만들어질 줄 누가 알았겠니? 그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루치드는 남자의 설명에 장단을 맞춰주느라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지금은 이 도로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이 돌아다니게 돼서 장사도 잘되고, 그래서 세금도 더 많이 내게 되었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려는 루치드를 남성이 붙잡았다.

“그런데, 여기 처음 온 건 맞지?”

“네, 그런데요?”

“혹시 일자리 찾으러 온 거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사내가 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니 나이 또래 애들이 자주 일을 찾으러 여길 오거든. 경비대원들이 아무 말도 안 하디?”

“별로요.”

그러고 보니 경비대원들이 딱히 경계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 수상하긴 했다.

“하긴, 좀 많아야지. 요즘 이 거리에 애들이 넘쳐나서 오히려 문제야, 문제.”

뭔가 일이 있다는 생각에 루치드가 호기심을 드러내자, 남자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는 말을 돌렸다.

“아무튼, 일을 찾으러 왔다니까 하는 말인데, 마침 일할 사람을 찾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같이 가보지 않을래?”

마침? 이렇게 우연히? 뭔가 수상하다 여겨졌지만, 루치드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사내의 제안을 수락했다. 어느 정도의 위기라면 얼마든지 피해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보니까 힘은 잘 쓰게 생겼는데, 어떠냐?”

“괜찮은 편이에요.”

줄곧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월등한 체력을 자랑하던 루치드였으니. 사내는 또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여행 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이곳저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녹스 성에 대해 안내하기 시작했다.

“녹스는 5개의 지구(地區)로 나뉘어 있다. 가운데가 상업지구. 사실 가운데에서부터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거의 상업지구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지만, 특히 가운데 사거리 부근에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게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그곳을 상업지구로 분류한다. 그리고 동문과 북문 사이를 경관(京官)지구. 주로 공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이 모여 있지. 성주의 집무실도 여기에 있다. 바로 저기야.”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높은 건물 사이로 우뚝 솟은 하얀 3층 석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한 기억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없던 건물이었다. 게다가 성주 집무실?

“성주님은 성에 사시는 거 아니에요?”

“녹스에는 성주님의 성이 없다. 아주 오래전에 성에 침입자가 빈번히 출입한 전례가 있어서, 성주가 아예 성을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아무튼, 당시 그 성주가 성을 없애도 대신 최신식 집무실과 대저택을 마련했다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지. 그리고 집무실도 몇 번이고 개조해서 치안에 있어서는 대륙 귀족가의 그것들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들 하지. 물론 확인할 방법은 없어. 자기들 말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루치드는 다시 하얀 건물을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내의 뒤를 쫓아 뛰어갔다.

“그리고,”

“근데요.”

“응?”

“아저씨, 라고 해야 하나,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내가 아직 내 소개도 안 했었나? 이런 급한 마음에 너무 서둘렀나 보네.”

사내는 볼이 빨개지도록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다위. 로히메르 다위(Darw?h)야.”

“전 루치드라고 해요.”

다위는 루치드를 생경스럽게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루치드. 반갑다. 자, 더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하기로 하고 일단 움직일까?”

그 뒤로도 다위는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소개를 해 주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크게 바뀐 게 없다고 여겼던 녹스가 세부적으로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넓은 길이 석재 포장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집들의 구조나 배치들이 모두 달랐다. 마치 5개년 개발 계획에 따라 도시 전체가 변화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작은 실골목들은 여전히 흙바닥으로 익숙함(?)을 주고 있었고, 도시 전체가 내뿜는 냄새는 여전히 똑같았다. 각종 오물의 향취로 버무려진 석벽과 목조 건물들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중앙 상업지구를 지나 서문과 남문 사이로 향할 때, 루치드는 잠시 서문 쪽으로 난 길을 바라보았다. 예전, 감옥이 바로 저기쯤에 있었다.

잠시 걸음이 느려진 것을 눈치챈 다위가 재촉하는 바람에 감상에서 벗어난 루치드는 다시 다위의 뒤를 따라갔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구관(舊慣)지구’였다. 다위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지구들이 변화해 나갈 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변화를 겪지 않았고, 덕분에 예전 모습 그대로를 지켜나가는 곳이라고 했다.

설명만 들으면 마치 남산한옥마을 같은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냥 슬럼가였다. 다른 곳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석조 건물이 단 한 곳도 보이지 않았고, 칙칙한 나무껍질이 지붕에 덕지덕지 덮여 부실하다는 인상을 풍기는 집들이 시야에 가득했다.

“따라와라.”

다위는 루치드를 데리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른쪽 왼쪽 번갈아 가며 골목을 따라 들어가던 두 사람이 마침내 다다른 곳은 유독 낡은 집들 중에서 그나마 나은―벽에 푸른 넝쿨이 가득해서 낡은 토벽(土壁)이 잘 보이지 않았다―집이었다. 널빤지를 잇대어 만든 것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탁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제외한 어둠이 루치드를 맞이했다. 식탁 근처로 다가간 다위가 루치드를 자리로 안내했다.

“여기 앉아라. 조금 기다리면 곧 사람이 올 거다.”

루치드는 그 말대로 식탁 근처의 의자를 빼다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위는 전혀 낯설어하지 않고, 게다가 불안해하지도 않는 루치드를 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사실 이 집의 조명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어 놓긴 했는데, 이런 가운데에서도 저렇게 태연한 모습을 보인 아이는 루치드가 처음이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데리고 올게. 아, 뭐 좀 마실래?”

“물이 있으면 주시겠어요?”

“어, 그래.”

다위는 벽 한편에 걸린 물주머니를 빼내어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루치드는 컵을 받아서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맛을 보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어.”

다위가 나간 뒤, 실내는 암흑과 정적으로 가득했다. 촛불의 밝기가 집 안을 온통 환하게 비출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던 탓인데, 형광등 아래 살던 루치드에게는 갑갑한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래도 감옥보다는 낫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루치드는 다시 컵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그 시간, 다위는 바로 옆집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제대로 구했어. 힘도 잘 쓴다고 하니까, 몫을 잘 쳐줘야 돼.”

“알았어, 뭘 새삼스럽게.”

턱수염이 난 사내가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다위의 말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다위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까닥거리며 좀 더 자신의 노력을 알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포세 패거리한테 뺏길 뻔했다고. 내가 잽싸게 달려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또 뺏겼을걸?”

“알았다니까. 거 참 사람 되게 들들 볶는다, 응?”

“그러니까, 되지도 않는 그런 거 보지 말고, 가서 빨리 견적 좀 뽑아 보라니까.”

결국 턱수염이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야 다위의 치근거림이 멈췄다. 턱수염과 함께 돌아온 다위는 여전히 자리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루치드를 보았다. 보통 이 정도 기다림을 주면 얼굴에 긴장이 좀 어리고, 입술이 말라서 연신 혀를 내두를 타이밍인데 루치드는 마치 이 집에서 10년을 살던 사람처럼 보였다.

“인사해. 이쪽은 일꾼을 구하는 토엔. 그리고 이쪽은···.”

“루치드입니다.”

“키가 크구나.”

들어오자마자 루치드를 아래위로 훑던 토엔은 대뜸 루치드의 견적을 뽑아냈다.

“팔이나 어깨를 보아하니, 힘도 적당히 쓸 것 같고. 적당하네.”

“그렇지?”

다위가 히죽 웃다가 급급히 표정 관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엔은 루치드에게 다가가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도망, 은 아니지?”

“예.”

“일자리가 필요하고?”

“네.”

“좋아. 그럼 오늘부터 일하는 거로 하고.”

“잠시만요.”

“응?”

토엔은 자신의 말을 막은 루치드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오늘부터라고요?”

“급한 거 아니었어?”

뭐, 빨리 구하면 좋긴 하겠지만 이렇게 쉽게 자리를 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사람은 자신이 뭘 잘할 수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를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하는 게 좋지 않냐? 조금 있다가 교대시간이니까 같이 나가서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우는 게 좋을 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늘은 실습이고 본격적인 것은 내일부터다. 알겠지?”

루치드가 입을 열려는 중에 토엔이 말을 막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내밀었다.

“잠은 이 집에서 자면 된다. 저기 문 보이지? 저기가 침실이니까 저기서 자고, 여기는 보이는 대로 식탁. 일당은 매일 챙겨주니까, 그 돈으로 각자 알아서 먹고 살면 된다.”

각자?

“일이 끝나면 나한테 와서 확인을 받아야 하고, 그때마다 일당을 지급할 거다. 나는 이 집 바로 왼쪽에 있는 집에 있을 거니까, 거기로 찾아오면 된다. 그리고 그 밖에 궁금한 사항은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고. 이상.”

다른 애들?

“저기요?”

루치드가 손을 들었다. 다위와 토엔이 그런 루치드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데, 마침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