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43화 (243/956)

배틀 트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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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

신테가 진지한 목소리로 루치드를 불렀다. 루치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우린 너에게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야. 네가 답을 찾을 방법들을 알려준 것이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난 너에게 답을 줄 수 없어. 그러니 지금 그 숙제 역시 네가 풀어야 한다.”

루치드는 그 말이 옳다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대로 너에게 맡겨버리면 네가 여기까지 온 수고가 없으니, 조금 도와주도록 하지.”

루치드는 신테의 말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꿈이 뭘까?”

“···되고 싶은 것? 아니면 하고 싶은 것?”

“그런 의미에서 넌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거지?”

“네.”

“두 가지 물음을 주마. 넌 뭐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니? 아니면 뭔가 해야만 하는 게 있니?”

루치드는 잠시 그 물음에 고민을 했다. 되어야 하는 사람? 그런 건 없다. 주변에서 루치드에게 똑똑하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공부만 해서 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혹자는 의사, 변호사 같은 직업을 이야기하지만, 꼭 그게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게 그 직업이 마땅히 되어야만 하는 직업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해야만 하는 게 있냐고 물으면, 정확한 대답은 아니지만 없다고 말하기가 곤란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 그 부분이 아마 니가 풀어야 할 숙제라는 거다. 직업이 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꼭 꿈이 직업은 아니잖아? 내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난 어릴 때 ‘지톤’이 꿈은 아니었거든. 내 꿈은 세계의 진리를 아는 거였지, ‘지톤’이 되자는 게 꿈은 아니었어. 세상의 숨겨진 진리, 진실, 혹은 다르게 불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알기 위해 꼭 지톤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어. 기사가 되든, 푸줏간 주인이 되든 직업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다는 친구의 장래 희망이 꼭 기사나 치안감 같은 직업일 필요는 없잖아? 백정 일을 하든 목수가 되든 불의에 맞서고 용기와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꿈을 이룰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확한 답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지구의 생활과 시스템을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지구라는 곳은 세분된 직업과 그 직업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엄격히 구분되는 사회이니까. 경찰이 아니면 마을 치안을 위해 힘을 쓸 수 없고, 써서도 안 되는 사회였다. 괜한 일에 말려들어서 오히려 치안을 위협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세계의 진리를 알고 싶다는 꿈이 직업과 관계없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생활의 영위를 위해 직업에 종사하다 보면 그 꿈을 이루기는커녕 발도 못 내밀 경우가 생긴다.

루치드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것이었다.

“먹고 살기 힘든 데, 그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어딨어?”

나이 불문, 직업 불문 남녀노소 할 거 없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그랬다. 한두 사람이면 모를까, 그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을 할 정도라면 이미 사회 시스템이 직업과 꿈을 나눌 수 없게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테의 말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말대로 루치드는 당장 자신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테제에 루치드가 바로 떠올린 것은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뭔데?”

루치드는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며 힘겹게 뱉은 대답.

“가족을 찾아야 돼요.”

****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로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 그러나 이제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서 할 수 있는 일. 그렇지만 현재와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된 것도 한참 전의 일임에도 여태까지 시도하지 못했던 일. 바로 가족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20년이나 지났잖아요? 사실 여기 시간으로만 따지면 20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지났을 거예요. 그럼 우리 가족들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겠죠. 그럼 어떻게 우리 가족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증거도 하나 남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말을 할수록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덩달아 루치드의 어깨도 아래로 축축 처져만 갔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답을 줄 수가 없구나. ···이것 참 결국 난 아무것도 답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구나. 이래서야 세상의 진리를 찾는다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내 꼴이 우습게 되었네.”

신테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담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어둑해진 숲속이었다. 신테가 느릿느릿 일어나 벽에 걸린 등에 불을 밝혔다. 지나가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꼿꼿이 일어서 주위를 밝히는 등불이었다.

돌아서서 루치드를 바라보던 신테가 한 마디 했다.

“내가 지금껏 세상의 진리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였지만, 지금 내가 깨달은 게 뭔 줄 아니? 세상에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없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정해진 게 없다는 거지. 어떤 때, 어떤 조건에서는 진리였던 것도, 또 다른 때, 또 다른 조건에서는 진리가 아니게 되기도 하지. 그래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신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고. 도대체 당신이 감쳐둔 진리는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야.”

‘신’이라는 말에 루치드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신의 저주’를 가진 여자와의 만남에 대해서, 그리고 그 여자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해서. 조금은 신테가 놀라는 반응을 보일 거라 기대했는데.

“그러니? 하긴 그쪽 집안이 대륙에서 유명하긴 하지.”

라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신의 저주를 부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게 과연 신의 저주, 혹은 축복인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리같이 세상의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이야기야. 왜냐고? 그건 단지 불규칙적인 현상에 불과하니까. 단순한 오류 혹은 의도된 신의 기획일지라도, 그것이 세상의 보편적 진리에 다가가는 데는 방해일 뿐이거든.”

요는 이 세상의 규칙 속에서 보편성을 찾는 일인데, 불규칙한 특성에 집착하게 되면 보편성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적용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법이지.”

잘 모르겠지만, 이걸 가지고 토론을 하기에는 루치드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전 이만 가봐야 되겠어요.”

“그래. 그런데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는 거지?”

“네. ···일단은요.”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100% 확신을 갖지 못하는 루치드. 신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치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넌 아직 시간이 많다. 얼마든지,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서 고민할 수 있는 문제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

‘조급하다’라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루치드는 신테의 격려에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뜬 단유가 창으로 눈을 돌렸다.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오는 바깥이 보였다. 서둘러 침대에서 벗어난 단유가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바라보니 6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거의 8시간 가까이 지났네.’

그곳에서 이틀을 보냈는데, 이곳에서는 8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돌아온 셈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더구나 가족을 찾는 일이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뤄서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못 찾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어떻게든 찾는 노력과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단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너 오늘 되게 피곤해 보인다?”

상미가 쭈그리고 앉아서 턱걸이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던 단유를 보며 말했다.

“그래? 난 괜찮은데.”

“잠을 잘 자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이 어두워.”

가끔, 아주 가끔 상미가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바로 이럴 때였다. 늘 털털한 모습만 보이고, 마치 명수처럼 행동하고 말하던 아이가 가끔 날카로운 감각을 드러낼 때, 단유는 상미도 여자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단유는 대답 대신 다시 철봉을 잡고 턱걸이를 시작했다.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피곤함은 오랜 시간 잠들지 못해서 오는 피곤함보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물음과 숙제 때문에 피곤했던 것이 더 컸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운동은 거를까, 하고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차라리 운동으로 땀을 쫙 빼고 나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온 단유였다.

“넌 이제 운동 안 해?”

“응. 역시 현실에서는 레벨업이 안 되니까 흥이 안 생겨.”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밤, 저곳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행동지침을 떠올리고 정리하느라 복잡한 머리였다.

오늘 새벽, 그러니까 저곳 세상에서는 해가 저물던 저녁 무렵, 신테는 헤어지기 전에 조언 한마디를 해 주었다.

“너에게 한계를 짓지 마라.”

그냥 격려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으련만, 신테는 그 말만 남기고 숲속 집의 문을 닫아걸었다.

‘나도 모르게 나에게 한계를 지었던가?’

일부러 한계를 짓지 않음에야, 그 물음에 딱히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신테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었다. 그 의미가 없지는 않을 테니 궁리는 계속해봐야 할 것이다.

“석고야! 가자! 상미야!”

어느새 시합을 마친 명수가 수돗가에서 단유와 상미를 부르고 있었다. 머리 전체가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어서 윗옷까지 축축이 젖어 들고 있는 상태였다. 앞뒤 할 거 없이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 그렇게 머리하고 있으면, 머리에 비듬 생긴다?”

상미가 놀리듯 말하자, 명수가 입꼬리를 내리며 대답했다.

“마르면 괜찮지 않을까?”

명수가 하늘을 가리켰다. 과연 아침부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어, 햇볕 아래서 5분 정도만 걸어도 저 정도 젖은 머리는 금방 마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날씨였다.

“그래도 집에 빨리 가서 머리 말리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럼 엄청 가려워.”

경험이 투영된 상미의 말에 명수가 서두르자며 먼저 등을 보였다. 문득 옆머리를 심하게 긁어대던 신테가 떠오른 단유는 피식 웃음 짓고는 명수의 뒤를 따라갔다.

집에 도착한 단유는 아침을 먹은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전처럼 책을 읽는 대신,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명상이라기보다는 밤에 시도할 이세계 탐험의 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역시 처음에는 녹스로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서쪽 대산맥을 넘어가 볼까?’

어느 쪽이든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녹스로 가면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고 행동할 수 있는 지침이 설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녹스에서 실패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 방법이 효과적일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었잖아.’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기도 전에 경비대장 포우에게 붙잡히고 미친 마법사 제윅과 얽히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다시 한번 탐문을 시도해도 좋으리라.

반면 대산맥 쪽은 완전히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잠깐 산맥 아래쪽으로 간 적은 있지만, 그때는 자신이 너무 어린 나이였고, 함께 있었던 마법사 핀체노가 급변하면서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도 넘을 수 없는’ 대산맥이 마치 ‘아무도 가지 못하는’ 남쪽 인지의 경계선 같아서, 한 번쯤은 넘어갈 시도를 해봄직도 했다. 다만 그런 시도도 단유니까 할 수 있는 것이지, 마을 사람들이 과연 그런 시도를 했을까 추측해보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두 선택 모두 가능하되, 가능성은 낮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선택할 만한 옵션이 없으니 어느 한쪽을 고르기는 해야 할 것이다.

단유의 고민은 점심시간이 지나서도 멈추지 않았고, 저녁 시간이 될 때쯤에도 여전히 가능성과 효율성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단유야, 밥 먹어라.”

“네.”

식탁에는 시원한 오이 냉국과 뜨거운 된장 찌개가 함께 올라와 있었다. 명수가 두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떤 걸 먹어야 돼요?”

이모님이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되지.”

명수는 우선 오이 냉국을 숟가락을 떠서 먹더니, 그 시큼한 맛에 살짝 눈을 찡그렸다. 밥을 한 숟가락 떠 넣은 뒤, 이번에는 된장 찌개에 숟가락을 얹었다.

“맛있니?”

“네!”

명수는 어떤 반찬도 마다치 않고 좋아했기에 이모님은 명수 먹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다 하셨다. 단유도 뒤이어 수저를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시원한 냉국과 뜨거운 찌개가 모두 입에 맞았다. 굳이 어느 하나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던 것일까?

식사를 마친 단유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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