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 트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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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약한 냄새가 회갈색 진흙탕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올 때, 부리를 집어넣고 이리저리 뒤적이던 큰 눈동자의 새가 문득 고개를 들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한여름의 열기 때문인지 아지랑이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래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시선을 고정한 새는 이윽고 넓적한 날개를 짝 펴더니 부채질하듯 크게 퍼덕였다. 하지만 무거운 몸 때문에 여느 새처럼 날아오르진 못하고 다만 바닥에 고정된 듯 박아놓았던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려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오랜만이네?”
새는 어느새 자기 앞에 나타난 소년을 향해 부리를 끄덕여 보였다. 새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익숙한 얼굴이라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소년은 새의 움직임에 반가워했다. 적어도 예전처럼 마냥 무서움에 떨지는 않게 된 것이었다. 비록 여전히 지독한 냄새 때문에 오래 이곳에 머물고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새를 보니 반갑기도 해서 잠시 걸음을 멈췄을 뿐이었던 소년이었다.
“널 금방 이렇게 볼 줄 알았다면, 먹을 거라도 챙겨올 걸 그랬어. 그런데 도대체 넌 뭘 먹는 거야?”
새는 큰 눈동자를 소년에게 고정한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소년은 굳이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자기 할 말만 계속해 나갔다.
“내가 여기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지금은 그냥 가지만, 만약 다음에 또 보게 될 일이 있다면, 그때는 네가 먹을 만한 거라도 챙겨서 올게. 잘 지내라.”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소년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새는 갑자기 사라진 소년을 찾는 시늉을 하는 대신, 날개를 크게 퍼덕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진흙 바닥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부리를 넣고 헤집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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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금방 돌산의 맨 위에 올라섰다. 소년이 이 돌산이 자신의 인지적 한계로 인해 드러난 허상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이 허상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보이니까 믿게 되고, 믿으니까 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체에 대해, 그 진실에 대해 모르지는 않으니까. 그냥 보이는 대로 둘 뿐이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돌산 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돌산 위에서 넓게 펼쳐진 운해(雲海)를 구경할 기회도 얻게 되었으니까.
잠시 그 장관을 지켜보던 소년은 이내 그 속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처럼 떨어지는 스릴을 만끽할 필요는 없게 되었으니, 곧 소년은 푸른 초원과 이제는 적당히 넓은 지역에 자리 잡은 수림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었는지 모를 사슴 한 쌍이 먼 나무 그림자에서 불쑥 나타나 소년을 쳐다보다가 곧 느긋한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아리 소리 같지만, 알고 보면 사납게 생긴 황조 1마리가 높은 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울음을 터뜨렸고, 고양이 소리 같지만, 알고 보면 노란 눈동자의 검은 비단을 두른 맹수가 갸르릉 거리며 바위 위에 드러누워 오수(午睡)를 청하고 있었다. 소년이 지나가도 맹수는 눈을 뜨지 않았고, 좋은 꿈을 꾸는지 입맛을 다시는 시늉도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마른 듯 갈라진 자작나무 껍질 틈으로 검은색 풍뎅이가 꿈틀대며 삐져나와서 몸을 떨었고, 이슬 맺힌 풀잎 사이로 귀뚜라미가 펄쩍 뛰어올라 시냇가에 걸쳐진 한 뼘짜리 널조각 위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건너편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시간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여유는 부려도 되겠지, 라는 마음에 소년은 느릿느릿 주위를 둘러보며 보고 싶은 거, 듣고 싶은 거, 느끼고 싶은 거 다 찾아보면서 숲길을 걸어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익숙한 집이 소년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건만 커다란 나무 사이에 난 그 집은 여전히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고, 소년은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집 왼편에 있던 그루터기도 여전했고, 현관 앞에 걸린 마른 가죽도 여전했다. 가죽을 들추고 현관을 두드렸더니 반응이 없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디아트리? 안트? 신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는 건 꺼려져서 소년은 잠시 집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맑은 햇살이 공터처럼 뻥 뚫린 숲 천장을 지나 집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어 주위를 둘러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빛이 덜 드는 숲 안쪽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슬쩍 소년을 보다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 외에는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낚시하러 갔나?”
소년은 기억을 더듬어 세 사람과 함께 낚시하던 곳으로 향했다. 오래된 기억임에도 5년을 머무르는 동안 숱하게 갔던 곳이라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서울에서 살 때도 주변 지형지물을 익히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바로 소년이 가진 관찰력 때문이었다. 다 비슷비슷한 나무처럼 보여도 소년의 눈에는 슈퍼마켓과 철물점을 지나 오른쪽 골목에 있는 오락실의 맞은편, 붉은 지붕의 서점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윽고 자신이 자주 오르던 나무를 찾아낸 소년.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높기도 엄청 높았다. 지금처럼 키도 크지 않았고, 힘도 많이 없던 시절의 자신이 이렇게 높은 나무를 올랐던가, 떠올리니 새삼스러웠다.
소년이 나무 위에 오르자 숲의 그늘에 막혀있던 뜨거운 햇살이 가장 먼저 소년을 반겼다.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손우산으로 눈 위를 가리는데, 소년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소년은 뒤로 돌아보았다. 두툼한 볼살에 장난기 가득한 눈매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신테?”
볼살이 출렁이며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루치드?”
신테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루치드를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낚싯대를 던지고 겅중겅중 가지를 건너 루치드에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너 나갔잖아? 아니 나갔지. 나갔는데, 그런데··· 얼굴이 왜 이래?”
“신테야 말로 얼굴이 왜 그래요? 몰라볼 뻔했어요!”
신테의 머리는 새하얗게 변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마치 혼자 늙은 사람처럼···. 늙어?
“넌 어떻게 20년간 얼굴이 안 변한 거야?”
“···20년이요?”
루치드는 3년이란 시간의 흐름만을 기억하다가 20년의 격차를 눈으로 확인하자 굉장히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물론 이곳과 지구 사이에 시간 차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크게 벌어질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루치드의 이야기를 들은 신테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집어던졌던 낚싯대를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반가운 손님도 왔으니, 여기까지구나. 같이 집에 가서 배나 채우면서 마저 이야기하자.”
신테는 루치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낚시 바구니는 루치드가 들었는데, 바구니 안에는 돔 5마리가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중이었다.
“이렇게 손님이 올 줄 알고 낚시가 잘 됐나 보구나. 난 괜히 오늘따라 손맛이 좋다고 여겨서 신이 났었는데 말이야.”
“낚시가 많이 늘었나 봐요? 예전에는 디아트리나 안트보다 늘 적었잖아요?”
“세월의 힘은 무시 못 하는 거란다. 20년을 낚시만 쉼 없이 했더니, 이제는 눈감고 한 손으로 범고래를 낚는 수준이라고.”
허풍도 세월만큼이나 늘었나 보다. 루치드는 그마저도 반가워서 입꼬리가 계속 올라가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테는 능숙하게 생선을 잡아서 칼질을 쓱쓱 하더니 금세 접시 위에 갓 회를 뜬 하얀 생선 살이 담기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몇 가지 음식들과 함께 한 상을 차리더니 구석에서 커다란 물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한잔할래?”
이곳에서는 미성년자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신테의 제안은 거리낌이 없었고, 신테의 분위기에 동조한 루치드는 스스럼없이 잔을 내밀었다.
“뭐예요, 이거?”
붉은빛이 도는 맑은 액체가 컵 안에서 루치드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냥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열매들을 모아다가 담근 거야. 그렇게 센 술은 아니니까, 너한테도 맞을 거야.”
잔을 부딪치고 맛을 보니 달달한 맛 뒤에 쓰고 비린 맛이 느껴졌다. 비리다는 느낌에 미간이 찌푸려질 때쯤, 상쾌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신기한 맛이네요.”
“열매가 이것저것 들어가서 그래. 나쁘진 않지?”
하나하나 따지면 이상할 것 같은데, 어울리니 묘하게 맛있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생선 살과 같이 먹으니 계속 술을 마시게 되는 부가효과도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얌전해진(?) 신테와 술을 나누다 보니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보통 먹을 것이 있으면 다 같이 모여서 먹곤 했는데 말이다.
“디아트리랑 안트는 나갔어.”
“나가다뇨?”
“인지의 경계선 너머. 세상으로 나갔어.”
아, 이들은 인지의 경계선을 아는 사람들이니 그것을 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루치드는 일단 그 점을 이해하고 다음 질문을 했다.
“왜요?”
“지톤은 자신이 그동안 갈고 닦은 진실의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시기가 있다. 디아트리와 안트는 그 시기에 맞춰 세상으로 나간 거야.”
루치드는 ‘도를 아십니까’가 생각났다.
“전도(傳道) 같은 건가요?”
“···비슷하네.”
디아트리와 안트가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내고 나간 지 벌써 5년이 넘었다는 것. 그리고 신테는 아직 진리를 찾지 못해서 안 나가고 있지만, 곧 찾아서 나갈 거라는 이야기였다.
“만약 신테까지 나갔다면, 전 아무도 못 만나고 돌아갈 뻔했네요.”
“그럼 이제 네 이야길 들어보자. 왜 다시 돌아온 거니? 아니 왜 여기로 온 거야?”
루치드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제윅과의 만남, 근위대에게 쫓겨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는 도저히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루치드가 그 상황을 떠올려 흥분하기 전에 신테가 이미 흥분해서 식탁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미친놈이 다 있냐? 마법사란 놈들은 그래서 안 돼. 지들이 제일 잘난 줄 아는 놈들.”
“성주라는 사람이 사람들 눈이나 가리려고 하고, 진실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여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그런 놈이 어찌 성주가 되었을꼬?”
신테는 지구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들으며 놀라워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구나.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가능하니, 말의 힘이 큰 것인가,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사람이 나약한 것인가.”
하지만 역시 가장 놀라운 것은 두 세계 사이의 시간의 격차였다.
“예전에도 듣긴 했지만, 이토록 크게 차이가 나리라곤 생각을 못 했다.”
“저도요. 늙은 신테를 보니 이상해요.”
“늙었다는 말이 이렇게 낯설게 들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20년 전이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앉은 너를 보니 이상하긴 이상하구나.”
“신테는 되게 점잖게 변했어요.”
“그 말도 어린 너에게 들으니 더 이상하고.”
두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되짚으며 잠시 추억을 나누고 회포를 풀었다. 술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처음 마신 술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결국, 루치드는 본래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사담만 나누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잠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루치드는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스승이자 친구였던 이를 만난 기쁨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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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들고 왔구나.”
신테는 턱을 긁적이며 루치드의 말을 받았다. 루치드는 접시에 담긴 과일을 두고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신테의 대답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침에 일어난 루치드는 신테를 도와 주변 정리를 하고, 숲 외곽에서 몇 가지 과일을 따는 등, 일과를 도운 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루치드는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 왜 자신이 다른 사람과 벽을 지고 살게 되었는지를 토로하고 과연 이런 삶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또 안트가 알려준 진실에 다가가는 법―부정의 부정, 긍정의 부정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테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접시에 담긴, 하얀 과즙이 흐르는 과일을 한입 베어 물고 천천히 오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루치드도 군침이 돌아 덩달아 과일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일단 대답하기 쉬운 것부터 알려주자면, 안트의 방법은 말 그대로 방법일 뿐이야. 이전에도 말했을 테지만, 디아트리나 안트나 나나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세계의 진리를 찾고 있었어. 안트가 말한 부정의 부정, 긍정의 부정은 그저 방법론일 뿐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야. 거기까지가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최선이구나. 난 그 방법에 대해 안트만큼 치열하게 다루지 않았으니 말이다.”
신테는 곤란할 때면 귀 뒤쪽의 머리를 벅벅 긁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잠시 루치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렇게 긁다간 두피도 벗겨지겠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긁어대던 신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벽에 대한 문제는 내가 해줄 수 없는 물음이다. 그것은 네 삶의 문제이고, 네 삶을 니가 제대로 통찰해내면 저절로 알 수 있는 답이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이의 삶의 태도를 단지 몇 마디로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는 문제 인만큼, 그 ‘벽’의 존재에 대해서도 지금의 나로서는 대답을 줄 수 없다. 하지만,”
신테는 물을 한잔 마셔 입을 축이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꿈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그러니까 넌 미래에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것 아니냐.”
“네.”
“그 부분은 지금 네가 직면한 가장 큰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신테는 목을 쭉 빼서 루치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루치드의 눈동자를 좀 더 가까이 보려고 다가온 것일까? 신테의 푸른 눈동자가 루치드의 눈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