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4)
-------------- 240/952 --------------
머리를 긁적이던 단유가 상미의 요구에 답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야기해봐.”
“꼭 들어준다고 약속해야 돼.”
단유는 잠시 입을 닫고 생각을 거듭했다. 이런 게 조금 어렵다. 잘 어울리고 싶고, 함께 즐기고 싶은데 이렇게 순간순간 자신의 이성에 브레이크가 들어온다.
만약 명수가 그랬다면, 그냥 들어준다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비록 상미가 조금은 편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경계에 선 아이다―무턱대고 요구를 하면, 마냥 받아들이지 말라는 브레이크가 머릿속에서 제동을 건다.
“그래.”
하지만 일단 오늘은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고, 상미가 다친 일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니 일단 브레이크를 무시하고 달려보기로 한다. 그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 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상미는 잠시 단유의 눈을 바라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아니야.”
“응?”
“그냥 나중에 얘기할게.”
상미는 뒤로 돌아서 부모님에게로 달려갔다. 난데없는 상미의 돌발행동에 단유는 물론이고 명수까지 황당한 얼굴로 상미를 바라보았다.
“왜? 아파?”
갑자기 아이들과 있다가 달려온 상미를 향해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나 상미는 고개를 젓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피곤해서 잠깐 쉬려고.”
그러고는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머니는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딸의 뒷모습과 바닷가에 서서 멀뚱히 이쪽을 바라보는 두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하던 뒷정리를 마저 하기로 했다. 딸아이의 변덕이야 그 나이 때 애들이 늘 하는 것이니, 별로 개의치 않으면서.
텐트 안으로 들어온 상미는 무릎을 굽히고는 두 팔로 껴안은 자세를 취했다. 소원을 들어달라는 자신의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단유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상미는 보았다. 어두워서, 혹은 텐트 근처에 켜놓은 불빛 때문에, 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변화였고, 상미는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별거 아니었던 소원이었는데도, 예감이 그랬다. 무엇을 말하든 단유는 자신을 꺼릴 것이라는 느낌. 아니면 직감?
자신도 정확히 형용할 수 없지만, 단유와 오래, 함께 친하게 지내고픈 마음이 상미의 입을 틀어막았다고 보는 게 옳겠다. 덕분에 두 소년은 해변에 우두커니 서서 조금 전 자신들 앞에서 벌어진 기행에 대해서 심각한 토론을 나누어야 했다.
“너 뭐 했어?”
“하긴 뭘 해? 너도 옆에 같이 있었잖아.”
“그런데 쟤 왜 도망가?”
“···도망간 거야?”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던데?”
명수의 말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단유는 볼을 슬슬 긁다가 머리를 휘저었다.
“모르겠다. 신경 안 쓸래. 넌 뭐 할 거야?”
딱히 이 시간이 되고 나니, 주변이 어둡기도 하고 같이 놀 친구가 단유 밖에(?) 없기도 하니 마땅히 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 명수였다.
“그냥 게임이나 할래.”
명수도 단유네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모두 텐트 안으로 사라지고 나니, 별빛 쏟아지는 하늘 아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된 단유였다. 해변에 앉아 먼바다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먹먹하기도 했다.
먼바다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지 너울이 높게 솟구쳐 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다가도 이 주변으로만 오면 각종 암초와 지형들에 부딪히고 갈라지다가 한껏 힘을 잃은 작은 파도만이 해변 모래를 적시다 사라지고 말았다.
보면 볼수록 넓고 광대했다. 사실 낮에 상미와 명수가 있을 때는 둘러 표현하느라고 기대도 안 했던 ‘시인’ 소리를 듣긴 했지만, 단유의 눈에 보이는 바다는 그냥 ‘광대함’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냐고 묻는다면 평범하게, 보이는 대로 대답하기 곤란함이 느껴질 정도의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바다는 지금껏 단유가 보아오던 세계를 막론하고 가장 넓은 넓이의 공간이었고, 그 공간을 아우르는 온갖 숫자들이 단유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바다를 보고 있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온갖 숫자의 향연은 끝나지 않았다. 좌표라고 해야 할까, 특정한 공간을 구성하는 은밀한 수의 비밀이라고 해야 할까.
온종일 보고 있어도, 끝이 없는 공간이 바로 바다였다. 그래서 보고만 있어도 즐거운 것이 바다였다. 쉴 틈 없이 나누고 더하고 계산하고 역산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 남들이 보는 것처럼 심심할 리가 없었다.
“단유야, 그만 들어와라. 감기 걸리겠어.”
선생님이 해변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단유를 불렀다. 단유는 잠에서 깨어난 눈을 하고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잤니?”
“아니요. 바다 보고 있었어요.”
“그렇게 좋아?”
“···좋네요.”
단유가 옅은 미소를 띠며 텐트 안을 보았다. 어느새 핸드폰을 쥔 채로 잠든 명수가 보였다. 단유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선생님이 붙잡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할래?”
“네.”
선생님은 단유를 데리고 텐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낮에는 선생님이 너무 흥분해서 너한테 너무 모진 말을 한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에요, 선생님. 괜찮아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그래도 선생님 진심은 알지? 다 널 걱정해서 하는 소리였어.”
“네, 알아요.”
“너보다 오래 살아온 선생님의 경험에 비추면, 지금 네 나이 때에 많은 친구와 만나고 소통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너와 명수가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왔을 때 선생님이 아주 기뻤단다.”
단유는 말없이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단유를 살피던 선생님은 먼바다 위에 떠오른 달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과 소통하고 지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이 세상 혼자 살 수는 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게다가 이런 말 꺼내긴 미안하지만, 너나 명수는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 주영씨나 재훈씨가 너희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고는 있지만, 그리고 선생님도 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없다는 게 어쩌면 너희들이 사는 동안에 어떤 편견이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 그럴 때 너희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게 어쩌면 친구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사귐을 이어온 친구들이 우리 어른들이 해주지 못하는 부분들을 봐주고 위로해주기도 하고 격려해주기도 할 거야. 그래서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잖니?”
단유는 선생님이 바라보는 광경을 함께 지켜보았다. 마침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는지, 일그러짐 없는 둥근 달이 바다 위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날씨는 어쩜 또 그리도 좋은지, 달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가끔 네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지만, 안쓰럽기도 한 게 선생님 마음이다. 네가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때면 주위에 벽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좋은 친구를 만나고 사귀는 것 또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구나.”
선생님이 말을 마치고 단유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단유가 선생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선생님. 명심할게요.”
선생님은 옅은 미소를 띠며 단유를 바라보다 괜히 머쓱해져서 맨살이 드러난 팔을 쓰다듬었다.
“밤바람이 차갑네. 들어가자.”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달이 예뻐서요.”
“그럴래?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선생님은 단유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먼저 자리를 피해주었다. 모래사장을 저벅저벅 밟아가는 소리가 단유의 등 뒤로 멀어질 무렵, 단유는 하늘에 떠오른 하얀 달을 시야에 가득 품었다.
하얀 달 아래로 울렁이는 바다의 너울들이 쉬지 않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그 너울들이 마침내 긴 거리를 옮겨와 단유의 발밑에 다다를 때쯤은 작고 하얀 물거품으로 분해되어 흔적만 남기고 돌아갔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그랬다. 마치 파도처럼, 단유의 마음에 와 닿기를 바라며 몰아쳐 오지만, 단유와 상대의 사이에는 거친 너울도 하얀 포말로 변해 버릴 만큼의 긴 거리가 존재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이야기도 좋은 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단유는 모래사장 위에 서서 먼바다를 구경하듯 볼 뿐이었다. 가끔 힘을 얻어 단유에게 와 닿는 말조차도 결국에는 발끝을 잠깐 적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발바닥을 젖게 하는 소금물의 위력 때문일까,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단유는 생각했다.
‘왜 어울리지 못할까.’
낮에도 던졌던 질문인데, 선생님의 조언 덕분에 또 되새기는 물음이었다. 문득 에르케넨에서 안트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마라.”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정한 뒤에 남는 것을 긍정하라. 당시에는 검증을 철저히 하란 이야기로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뭔가 다른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안트는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정한 뒤에야 긍정할 수 있었기에 안테는 자신의 신념에 확신이 있었다. 반면 단유는 현재 확신이 없다. 확신을 가지기엔 자신이 가진 지식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하기에 안테처럼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래도 안트의 말을 떠올리며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려 하는 심리적 저항선이 존재하다 보니, 단유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과 거리를 두었다.
단유의 이런 사고체계는 공부할 때는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자신의 지식수준에 맞춰 공부하는 동안에는 검증에 어려움이 없고, 그래서 문제에 대한 답에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삶에 대해서만큼은 답이 없다. 그러니 늘 조심하고 경계하고 거리를 두는 습관이 생긴 것이리라.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나름의 분석으로 현 상황을 파악했지만, 이것 역시 확신이 없었다. 너무 많은 변수와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가 완전히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 시스템 속에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일상에서 단유는 홀로 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얼거리며 바다를 보는 단유의 눈에 높이 떠오른 달과 수면에 비친 달이 동시에 보였다. 수면 위에 비추는 달과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같은 달이지만, 어디에 존재하는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외형과 모양은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 하얀 달.
단유는 자신도 저 달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빌어보았다.
****
다음날, 상미는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것만 아니라면 놀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어제 잠시 어색했던 것은 잊은 듯, 평소의 상미로 돌아와 단유와 명수를 괴롭혔다.
“야! 눈 따가.”
명수가 등을 돌리고 눈을 비볐다. 뒤에서 까르르 대며 웃던 상미가 몰래 명수 뒤로 다가와 명수 등 위에 업혔다.
“어어!”
명수가 무게를 버티기 위해 버둥대다가 결국 물에 온 몸을 담그고 말았다.
단유는 물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살짝 손바닥을 구부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손을 내뻗었다. 손을 휘두르는 방향에 맞춰 물덩어리가 날아가더니 함박웃음을 짓던 상미의 얼굴을 강타했다.
“어푸후. 뭐, 뭐야?”
“뭐긴, 복수지.”
단유는 웃음기 없이 명수의 복수라며 오른손을 연신 휘둘러 상미에게 물을 뿌려댔다. 상미도 지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리고 단유를 향해 물을 뿌렸다. 그리고 중간에서 엎어져 있던 명수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모양으로 엉금엉금 기어 전장을 빠져나왔다.
“단유, 잘한다!”
“야! 명수 너! 구경만 하지 말고 너도 해!”
손을 휘젓던 상미가 버럭하자, 명수는 잠시 누구 편에 설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 히죽 입꼬리를 올린 명수.
“에라 모르겠다!”
명수는 상미와 단유를 가리지 않고, 팔을 마구 휘두르며 다가갔다. 목적없이 그냥 되는 대로 팔을 휘둘러 사방팔방으로 물을 뿌려대는 명수 때문에 상미는 물론, 단유까지 물을 피해 등을 돌려야 했다.
“그만들 하고 씻고 와! 밥 먹어야지?”
텐트에서 상미 어머니의 외침에 아이들은 서둘러 씻으러 달리기 시작했다. 상미와 명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릴 때, 단유는 슬쩍 하늘을 보았다. 새파랗게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짙은 바다 위에 그림처럼 얹어져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하얀 구름 너머를 바라보던 단유가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고찰하던 단유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선생님 말이 맞았다. 혼자 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혼자 할 수 없으면, 도움을 받아야 한단 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단유는 도움을 받기로 했다.
조만간, 시간이 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