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38화 (238/956)

파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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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네 부모님과 단유네가 함께 한여름 바캉스의 목적지는 강원도 속초 인근이었다. 바닷가로 갈 줄 알았더니 한참을 굽이진 시골길을 따라가나 싶더니, 인가가 드문 한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웠다.

“주차할 데가 여기 밖에 없어서.”

이후 짐을 나눠서 지고 여섯 사람은 한참을 걸었다. 푸른 들판과 작은 수림(樹林)을 지나 나온 곳은 뜻밖에도 바다였다.

“사람 많은 해수욕장에서 노는 것보다 이런 곳에서 쉬는 게 더 좋을 거야.”

군사경계지역 근처라서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는 상미네 아버지의 말처럼 그곳은 아주 작은 해변이었다. 주위로 시커먼 암석층이 병풍 두르듯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100걸음이 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프라이빗(private)하고 미니멀리즘(minimalism)적인 해변이지. 괜찮지?”

상미의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꺼낸 소개말을 뒤로하고 명수와 상미는 히죽 웃으면서 물가로 뛰어갔다. 파도가 쓸고 간 젖은 모래 위에 맨발로 자국을 남기면서 즐거워하는 두 사람과 달리 단유는 멀찌감치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상미의 어머니가 굳은 얼굴의 단유를 보며 물었다.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좋고, 조용한 것도 좋고. 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 저기 가서 같이 놀지 그러니?”

단유는 잠시 두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을 조용히 벗고 바짓단을 걷어 올린 뒤,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어나갔다. 시선은 수평선에 둔 채 천천히 걸어나간 단유.

단유는 지금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넓은 바다의 크기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말로만 듣던 바다라는 것이 이렇게 장엄한 것이었던가?

“단유야, 일로 와 봐. 여기 꽃게 있어!”

상미의 부름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와 넘실대는 파도와 하얀 거품이 시각적으로 단유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거대함이란 상상해본 적 없었다. 높은 산과 넓은 하늘을 마주하던 때랑은 또 다른 장관(壯觀).

“단유야!”

상미가 재차 부르니,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는 단유는 어느새 발목 어름까지 치고 들어오는 바닷물을 느꼈다.

“뭐해?”

“···바다 구경.”

“바다 처음··· 본다고 그랬지? 맞다. 깜박했네. 어떤데? 처음 본 느낌이?”

단유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멋지네.”

“그게 뭐야? 끝이야?”

예전에 숲의 바다라고 부르던 에르케넨을 볼 때도 그 압도적인 넓이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 바다는 달랐다. 소리가 다르고, 냄새가 달랐다. 몸에 와 닿는 공기가 다르고 보이는 색이 달랐다. 그 모든 게 단유에게는 충격이었고, 신선한 자극이었다.

“얘 봐? 정신 못 차리네?”

명수가 익살맞은 표정을 짓더니 손으로 바닷물을 가득 담아 단유를 향해 힘껏 뿌렸다. 그런데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손을 들어 얼굴을 막는 단유였다. 하지만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얼굴과 몸에 바닷물이 끼얹어졌다. 젖어버린 단유의 꼴이 재밌다고 명수와 상미가 배를 잡고 웃을 때, 단유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바닷물의 맛을 보았다. 책으로만 접하던 짠 소금물 맛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결국 직접 경험한 것만 못하구나.’

신선한 자극은 감동이 되어 단유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가만히 있는 단유의 모습이 조금 이상해 보였던지, 상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단유야?”

“···응?”

“혹시 기분 나빠서 그래?”

상미는 단유가 옷이 젖은 게 기분 나빠서 저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단유가 하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젓자 덩달아 미소를 짓는 상미였다.

“그럼 이리와. 같이 놀자.”

“그래.”

이후 세 아이는 옷이 젖는 것도 잊은 채 신나게 물놀이를 즐겼다. 그러는 동안 어른들은 텐트를 치면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쉴 수 있도록 준비해나갔다.

세 아이들이 흠뻑 젖은 몸으로 왔을 때, 상미 어머니가 세 사람을 데리고 인근의 별장으로 데려갔다. 별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그냥 작은 창고 같은 집이었는데 정수시설이 되어 있어서 몸을 씻을 수 있도록 기본적인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원래 이 동네 사람들이 여기서 몸을 씻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건데, 넓지가 않으니까 한 사람씩 들어가서 씻고 나오도록 해.”

상미가 먼저 씻으러 간 사이에, 단유는 상미 어머니로부터 이름 없는 해변에 오게 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상미 아버지가 어릴 때 여기 주변 마을에서 자랐는데, 당시 사람들이 가끔 놀러 오던 해변이라고 했다. 동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해안국도도 여기에서 거리가 멀어서 대부분 외지 사람들은 이곳을 잘 모른다고, 그래서 아는 사람만 와서 놀다 가는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상미가 개운한 표정으로 나온 뒤, 명수와 단유가 번갈아 씻었고, 세 사람이 다시 해변으로 돌아갔을 때, 해변에서는 아이들이 먹을 바비큐가 한창 구워지는 중이었다.

“자, 어서 와서 먹어.”

상미네와 단유네는 자리를 잡고 한참 동안 즐긴 물놀이의 여파로 굶주렸던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저녁을 다 먹을 때쯤, 길었던 해도 지고 붉은 노을에 물들었던 바다도 점차 검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단유는 색색이 변하는 바다의 모습을 한순간이라도 놓치기 싫다는 듯, 한 자리에 서서 바다를 지켜보았다.

“아까부터 뭘 계속 보는 거야?”

명수가 단유 곁으로 와서 물었다.

“바다.”

“신기해서?”

“응.”

“야, 처음 보는 나도 계속 보니까 금방 질리는데 뭐가 그렇게 볼 게 있다고 계속 보는 거야?”

단유는 수평선 아래위를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노을에 점점이 빛나는 바다도 신기하고, 바다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수평선 끝의 하늘도 신기하고, 바다 끝에 걸린 구름도 신기하고, 다 신기해.”

“우와 너 시 써도 되겠다! 시인이네, 시인.”

옆에서 듣고 있던 상미가 손뼉을 쳤다.

“근데 이제 뭐 하고 놀아?”

명수의 물음에 상미가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어른들끼리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그러게? 뭐하지?”

단유가 보아하니, 상미는 이미 속에 무언가 꿍꿍이를 감춰둔 표정이었다. 다만 그 속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을 뿐.

문득 생각해보니, 상미의 표정을 보고 속을 읽을 만큼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상미는 속을 읽는 게 어렵지 않은 아이였다. 명수와 마찬가지로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얼굴로 드러나는 타입이랄까?

처음에야 어떤지 몰라서 서로 각을 세우기도 했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또 이렇게 솔직한 아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하고 싶어서 고집도 부리고 영악하게 꾀를 부리기도 하지만, 결코 거짓으로 포장하거나 속을 감추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상미를 이해하고 보니, 이제는 그냥 명수 대하듯 대해도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명수는 상미의 그런 점 때문에 더 이상 상미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상미를 잘 모를 때는 얼굴이 예뻐서, 그리고 여성미가 느껴지는 얼굴 때문에 뭔지 모를 호감을 느꼈던 명수였는데 한 달간 함께 게임 하고 공부를 하는 동안 상미에게 감쳐진 매력 따위는 쥐뿔도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덕분에 명수는 ‘여자친구’는 잃었지만, 대신 ‘여자 사람 친구’를 얻었다.

“숨바꼭질이나 할까?”

“에이, 유치하게 무슨 숨바꼭질이야?”

“왜? 여기 숨을 데 많잖아?”

상미가 주변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데, 어두워질수록 음영이 짙어지면서 곳곳에 검은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곳에 서서 움직이지만 않으면 가까이 가지 않는 한은 보이지도 않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런 지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겨우 세 사람이, 그것도 중학생이나 된 이들이 숨바꼭질이나 하고 노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명수는 극렬히 반대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앉아서 쉬는 게 낫겠다.”

“야, 그래도 해 보면 재밌을 거야!”

“재미는 개뿔. 됐어, 안 해.”

상미가 도와달라는 듯, 단유를 바라보자 단유 역시 명수와 같은 의견임을 밝혔다.

“난 명수 말대로 저기 앉아서 바다나 구경할래.”

명수가 괜한 말을 해서 단유가 빠진다고 생각한 상미가 주먹으로 명수의 팔을 세게 두드렸다.

“아야!”

“못됐어, 정말.”

“뭐! 야, 아무리 그래도 숨바꼭질은 아니다.”

“그럼 넌 뭐 하고 놀건대? 진짜 단유처럼 바다나 구경하고 있을래? 할아버지도 아니고.”

“야, 그럼 단유가 할아버지야?”

“단유 쟤는 원래 좀 그런 게 있잖아.”

상미의 말에 또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는 명수였다.

“여기 좀 둘러봐도 돼요?”

어른들에게 다가간 단유가 넌지시 물었더니, 상미 아버지가 흔쾌히 그러라며 허락해 주셨다.

“너무 멀리만 가지 말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 군사경계지역이니까 철조망 보이면 가까이 가지 말고 도로 이쪽으로 와야 해. 알겠지?”

아버지의 주의를 들으며 단유는 몸을 돌렸다. 다른 아이들이, 특히 상미의 손에 붙잡히기 전에 먼저 몸을 빼려는 단유였다. 상미가 명수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단체활동에 대한 집착이었다. 뭘 하든 다 같이 하는 게 좋고, 다 같이 먹는 게 좋고, 다 같이 노는 게 좋다는 식이었다. 비록 공부를 싫어하는 상미지만, 공부를 해도 다 같이 해야 좋다는 식인데 도저히 단유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명수도 단유와 함께 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단유가 혼자 있고 싶어 할 때는 결코 귀찮게 들러붙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미는 귀찮다, 고 여길 정도였다. 그렇다고 또 같이하기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단유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단유 못 봤어?”

명수와 말다툼을 하느라 뒤늦게 단유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상미가 어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아버지가 대신 대답을 해 주자, 눈썹을 가운데로 모은 상미가 명수에게로 몸을 향했다.

상미의 얼굴을 본 명수가 찔끔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무섭게?”

“단유, 혼자 놀러 갔대.”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상미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부터 시작이다.”

“뭘?”

“단유 찾기 놀이.”

“그게 뭐야?”

“단유 먼저 찾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진 사람은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솔깃한데? 명수가 관심을 보이자 상미가 입술을 끌어올려 보였다.

“준비, 시작!”

“야, 잠깐만. 단유가 어디로 간 줄 알고?”

“알아서 찾아봐.”

상미는 대뜸 몸을 돌려 모래사장 끝 언덕을 향해 달렸다. 어딘지 몰라도 일단은 상미만 따라가다가 단유가 보이면 상미를 앞질러 나가겠다는 계산을 마친 명수가 뒤를 쫓았다.

그 시간, 단유는 올 때 봤었던 수림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수림 사이를 걷는 단유는 느긋한 걸음으로 숲의 향기를 만끽했다. ‘향수(鄕愁)’라는게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걷던 단유는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산마루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 위치라면 아마 주위가 잘 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곳에서 보는 경치는 또 어떻게 다를까, 라는 기대를 하며 단유는 산마루로 향했다.

이윽고 산마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던 단유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아래에서는 한참 어둑해졌던 것과는 달리 산마루에서 내려다보는 하늘과 바다는 아직 노을이 완전히 지기 전, 끝물에 붉은빛이 살짝 감돌고 있었다. 아래에서 볼 때도 길게 쭉 뻗은 수평선에 감탄했었는데, 올라와서 보니 더더욱 장대한 바다의 위용이 느껴졌다.

‘저 바다에 고래가 살겠지?’

엉뚱하게도 디아트리네 집 근처에서 잡았던 거대한 고래를 떠올려 보는 단유였다.

한편, 단유를 찾아 쫓던 상미와 명수는 수림 근처에서 흐릿하게 그림자가 보여 달려왔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명수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훑어봤지만, 수림 주변에는 들판이라 딱히 숨을 곳도 보이지 않았다.

“저쪽으로 갔으려나?”

명수가 가리킨 쪽은 수림이 끝나고 작은 암석이 장작처럼 쌓인 조그만 돌산이었다.

“일단 가보지 뭐.”

“근데 넌 무슨 소원 빌 건데?”

“바보냐? 그걸 말하면 재미없지.”

“어? 그런가?”

“그리고 그만 쫓아다녀. 너도 다른 데 좀 찾던가 그래. 왜 계속 졸졸 쫓아다녀?”

“야! 나도 이쪽에 단유가 있을 거 같아서 가는 거야. 너 따라다니는 거 아니거든?”

“웃기시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시커먼 돌산에 다가갔을 때, 그 주위로 철조망이 처져 있었지만,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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