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1)
-------------- 237/952 --------------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나는 계절이 돌아왔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나는 판에, 뛰어다니는 사람은 오죽 힘들까? 그런데 그게 좋다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패스!”
명수의 외침에 공간을 넘어 날아오는 하얀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명수의 가슴에 와 닿았다. 절묘하게 공을 컨트롤한 명수는 공을 발 앞에 두고 빈 공간을 치고 달렸다.
“막아!”
상대편 팀의 주장이 외치지 않더라도, 근처에 있던 수비수 2명이 명수를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명수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하얀 잔상을 남기는 공을 향해 내 달렸다. 죽죽 나아가는 명수가 어느덧 골대 앞에 다다를 무렵, 골키퍼가 앞으로 나오고 동시에 오른쪽에 치우쳐 있던 수비수가 마주 오는 공격수를 포기하고 명수를 상대하기 위해 달릴 때, 명수는 반 박자 빠른 타이밍에 공을 걷어찼다. 왼발로 살짝 감아 찼던 모양인지, 공은 묘한 궤적을 그리며 골대를 향해 나갔고, 골키퍼의 손끝을 스치며 지나간 공은 곧 골망을 흔들었다.
“나이스!”
명수와 같은 편이던 아저씨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명수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고, 요 녀석! 요 귀여운 녀석!”
동네에서 조그만 막창 가게를 하는 아저씨는 명수가 귀엽다며 머리를 힘껏 흔들어댔다. 명수가 아픔을 호소하기도 전에 다른 아저씨들까지 달려와 명수를 꼬집고 때리고 비볐다(?).
“아, 그만 좀요!”
명수가 버럭 화를 내자, 아저씨들이 또 좋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명수의 등을 한 대씩 때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명수는 인상을 살짝 쓰긴 했어도, 굳이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것도 나름 아저씨들이 자신을 반겨주는 행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되고 상미와 함께 주변의 맛집을 찾던 중, 우연히 한 가게에 붙은 조기축구회 포스터를 본 명수가 가게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학생이라고?”
“네.”
“축구 잘하냐?”
“네.”
“뻔뻔한 거냐, 자신감이냐?”
“자신감이죠.”
“뻔뻔하구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죠.”
구경하던 상미가 협상을 시도했다.
“명수가 한 골 넣을 때마다 삼겹살 1인분 어때요?”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상미는 히죽 웃었다.
“재밌잖아요? 이렇게 귀여운 애가 공 가지고 노는 것만 봐도 좋은데, 골까지 넣어봐요? 아저씨네 팀에 사기도 올라가고, 승률도 올라가고 좋잖아요.”
“···어릴 땐 안 그러더니, 상미 너 되게 뻔뻔해졌구나?”
“얘랑 같이 다니면서 변했어요.”
상미는 뻔뻔하게 명수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저씨는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조기축구회가 골이 잘 나는 편이라고는 해도 중학생이 쉽게 덤벼서 골을 넣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상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여름 동안에만 한시적으로 받아주기로 한 탓에 크게 부담이 안 간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그리고 격동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오전에 축구부 활동이 잡혀 있었지만, 새벽에 잠시하고 가는 거라면 크게 무리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명수가 활약을 보인 건 3번째 시합부터였다. 첫 시합 때는 조기축구회의 수준을 체감하는 수준에서, 가볍게 몸을 푼다는 개념으로 뛰었고, 두 번째 시합 때는 첫 시합의 후유증인지 아저씨들이 선수교체를 해 주지 않았다.
“레프트 윙?”
“네.”
그 포지션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어필하는 명수의 말에 한 번 시험이나 해보자며 스타팅으로 뛰기 시작한 게 세 번째 시합. 그리고 운이 좋게도 시합 시작 10분 만에 명수는 한 골을 넣었다. 상대 팀이 앞선 시합의 팀들과 달리 약체였던 것도 한몫했지만, 축구부 활동을 하는 동안 제대로 파이팅 넘치는 시합을 하지 못했던 명수가 모처럼 아드레날린을 폭발시켜 뛰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그 날, 명수는 해트 트릭을 했고, 저녁에 단유와 상미를 불러 아저씨네 가게에서 삼겹살 3인분을 먹었다.
그 이후, 명수는 시합마다 골을 넣기 시작했고 아저씨들은 인근 조기축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팀으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단유야! 골 넣었어!”
“봤어.”
상미가 호들갑을 떨며 명수 파이팅, 을 외칠 때 단유는 기지개를 켜고는 쉬었던 푸쉬업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잠시 명수가 골을 넣는 순간을 보느라 식었던 근육이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사실 단유가 이곳까지 끌려온 것은 전부 상미 때문이었다. 상미는 뭘 하든 ‘다 같이 해야 재미있다’는 철칙이 적용되는지, 뭘 할 때마다 단유든 명수든 불러서 같이 하자고 꼬셨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근처의 맛집을 잘 모른다는 명수의 한 마디에 두 사람을 데리고 온 동네를 순회하듯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상미의 추진력 때문이었다. 명수가 조기축구회에서 뛰게 되면서, 상미는 굳이 그걸 구경하겠다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는 ‘단유와 함께’ 운동장으로 향했다. 상미의 부모님이야, 평소 게으르던 상미가 아침 일찍 일어나니 좋아하셨지만, 평소 운동하던 코스가 있던 단유의 입장에서는 왜 굳이 그래야 하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가 시합하는 데, 응원해주면 좋잖아? 그리고 니가 가는 공원이나 거기 운동장이나 시설은 비슷해. 아니, 그 운동장이 더 좋을걸? 거기서 운동하면서 응원도 하고. 좋잖아?”
결국, 단유는 상미를 따라 운동장에 나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상미를 깨우러 단유가 상미네 집에 가고, 눈 비비며 일어난 상미가 대충 머리만 빗고 눈곱을 띠며 단유의 뒤를 따라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는 것이다. 단유가 운동장 주위를 크게 돌며 달리기를 하고 철봉과 평행봉에서 근육 운동을 할 때, 상미는 스탠드에 앉아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운동장 가운데서 몸을 푸는 명수를 응원했다.
“물 줄까?”
“아니, 괜찮아.”
땀을 흠뻑 흘린 단유를 보던 상미가 물통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하자, 대신 자기가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개 했어?”
“몰라.”
단유는 숫자를 세지 않았다. 힘들 때까지 하고, 못 할 거 같으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힘들 때까지 반복할 뿐이었다.
“나도 운동이나 할까?”
가만히 앉아서 응원하는 게 편하긴 하지만,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좀이 쑤시는지 다리를 들썩거리는 상미였다. 운동장에서 시합이 잠시 정체되는 분위기가 되자, 상미는 스쿼트를 하는 단유를 보며 물었다.
“마음대로.”
단유가 쉬지 않고 앉았다 일어서는 모습을 보던 상미는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하면 돼?”
단유가 잠시 흘깃 상미를 보다가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이렇게 하면 근육을 다칠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하고··· 여기까지 앉았다가 이쪽 근육을 쓰면서 일어나는 거야.”
단유의 설명을 들으며 상미는 스쿼트를 몇 번 하더니, 이내 죽는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많이 힘들 거야. 그래도 이거 많이 하면 건강에도 좋고, 몸매 관리에도 좋대.”
“그래?”
상미도 나름 한 고집하는 성향이 있어, 쉽게 포기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단유가 말리니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서 다리를 주무르는 상미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해. 너무 몸을 혹사하면 오히려 병이 생겨.”
“알겠어. 근데 나도 너무 운동을 안 했나 봐. 이거 조금 했다고 금방 근육이 당기네?”
상미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운동하겠다고 자세를 잡는데 얼굴이 금방 일그러졌다.
“하지 마. 오늘은 적당히 하고, 내일부터 조금씩 횟수를 늘리면서 운동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으읔. 그, 그럴까?”
자기도 모르게 삐져나오는 신음에 상미는 별수 없다는 듯 운동을 그만두고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잠시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후반전 경기를 바라보던 상미가 결심했다는 얼굴을 하고 단유를 돌아보았다.
“단유야.”
“응?”
“나 내일부터 운동할래.”
“···그러든가.”
“도와줘.”
“응?”
“나 운동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니까, 니가 도와달라고. 넌 운동 오래 해서 잘 알 거 아냐?”
상미가 단유의 팔에 불끈 솟아난 근육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명수처럼 축구도 하고 싶은데, 그건 무리인 거 같고. 그냥 너처럼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운동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근데, 왜 갑자기 운동하겠다는 건데?”
운동 목적에 따라 운동의 강도나 방향성이 정해지기 때문에 단유는 상미의 의도를 물어보았다.
“체력이 약해진 거 같아서 말이야. 요즘은 게임 하다가 졸 때가 있거든? 아마 체력이 약해서 그런 거 같아.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게임도 오래 못하겠어.”
그런 이유라면 뭐.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냥 달리기만 해도 충분하겠다.”
“그래?”
“응. 달리기만 오래 해도 체력은 길러지니까.”
게임을 오래 하기 위해 운동하겠다는 상미의 정신 상태나 현재의 체력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어서 관두었다. 다만 달리기만 해도 충분히 운동한다는 보람은 있을 테고, 따로 단유가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다음 날, 단유와 상미는 운동장 주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 정도 리듬으로 달려.”
“응.”
“호흡은 이렇게.”
“응.”
“천천히.”
“후우.”
대충 오래 달릴 수 있는 팁들을 알려준 뒤, 단유는 자기 페이스대로 내달렸다. 달리던 와중에도 상미의 달리기를 틈틈이 봐주었다.
“빨라, 조금 더 천천히.”
“호흡이 거칠어.”
“발바닥 전체를 써야지.”
“조금 더 속도를 내고.”
상미는 나름 뚝심 있게 달렸다. 그러고 보면 상미는 결코 우는소리는 하지 않았다. 힘들다거나, 못하겠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소리는 없었다.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운동할 때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만 달려. 더는 위험할 거 같다.”
“조금만, 저기까지만.”
상미가 바라보는 곳에는 작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을 통과한 뒤에야 상미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면서 운동장 스탠드에 주저앉아 쉬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지 말고, 일어나서 조금씩 근육을 풀어. 그냥 주저앉아버리면 오히려 다칠 수 있어.”
쉬는 법까지 알려준 뒤에야 상미 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단유는 다시 자기 페이스대로 운동을 시작했다. 명수가 2골을 넣고, 상미가 명수 파이팅을 목이 쉴 정도로 외치고, 단유가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운동한 뒤에야,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있잖아.”
“응?”
“아까 너 달리기 할 때, 왜 거기까지 가는 거였어?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그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응. ···사실 거기까지 해야 레벨업이 될 거 같아서 말이야.”
“레벨업?”
“딱 그 선까지 달려야 경험치가 완전히 충족되면서 레벨업 하는 기분이랄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 나 무슨 뜻인지 알 거 같다!”
“넌 알겠지?”
“응! 나도 막 뛸 때 그런 생각 많이 하거든? 공을 찰 때도 딱 30개만 더 차면 레벨업 하는 기분!”
“응! 응! 맞아!”
명수와 상미가 죽이 맞아서 서로의 경험들을 늘어놓을 때, 단유는 머릿속으로 오전 중에 읽을 책들의 목록을 점검했다.
****
7월 말 때쯤의 어느 날, 상미가 제안했다.
“놀러 가자.”
“어디?”
“바다!”
명수와 단유가 서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디?”
“바다, 바다 가자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단유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나 바다 본 적이 없었네.”
“나도.”
명수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예전 아네스 보육원에 있을 때, 보육원 차원에서 여러 곳을 다니긴 했지만, 대부분 주변 산의 계곡이나 도시 내의 문화시설이 다였지, 바다로 가본 적은 없었다.
“바다를 가본 적이 없어? 정말?”
“응. 그러고 보니까 초등학교 때 수련회도 전부 계곡으로 갔었네.”
“그러네. 신기하네.”
“난 니들이 더 신기하다. 어떻게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대? 그럼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명수가 발끈했다.
“야, 내가 바보냐?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게? 바다를 가본 적이 없다는 거지, 모르긴 왜 몰라?”
“뭘 화내고 그래. 알았어. 그럼 갈 거지?”
“근데 누구랑?”
“나랑.”
“셋이서?”
“바보니? 우리끼리 바다를 어떻게 가? 우리 부모님이 여름에 바다에 가는 데 너희들도 같이 가고 싶으면 가자고 물어보랬어.”
단유와 명수는 당연히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연락받았고, 너희들이 오케이만 하면 다 같이 갈 거야. 그런데 너희 정말 바다 본 적 없었니?”
“네.”
“잘됐네. 그럼 이번 기회에 바다 가면 되겠네.”
그렇게 여름 방학 특별 이벤트, 바다 구경이 ‘Select’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