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35화 (235/956)

업타운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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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해봐.”

상미는 진짜 단유의 손에 패드를 쥐여주었다. 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얼굴에 드러내고 있음에도 전혀 모른다는 눈으로 방으로 들어가려는 단유의 손목을 붙잡고 거실에 앉힌 상미는 패드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말했다.

“원래 재밌는 건 같이 해야 친구인 거야.”

“맞아, 맞아.”

오늘따라 명수가 얄밉다고 느끼는 단유였다. 곧 게임이 시작되고 단유는 캐릭터를 움직여 전장을 누볐다. 칼인지 몽둥이인지 모를 거대한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적들을 무찌르는 캐릭터의 동작은 소위 ‘타격감’이라고 부르는 맛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오른쪽! 오른쪽!”

상미가 옆에서 코치하면서 단유의 게임을 돕고, 명수가 단유의 뒤를 쫓으며 단유가 흘리는 적들을 무찌르는 식으로 게임을 진행했다. 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잠시 손을 쉴 수 있는 때가 왔다. 단유는 패드를 내려놓자, 상미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재밌지?”

단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래. 재밌어.”

“거 봐. 재밌다니까.”

단유는 패드를 상미에게 넘겼다.

“더 해.”

“아니, 난 충분해. 난 잠깐 쉴게.”

“그럴래?”

애써 거절하지 않는 상미였다. 이미 한 에피소드를 단유에게 넘겨주었고, 또 단유도 게임이 ‘재미있다’고 인정을 했으니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상미가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기 전, 맵을 보면서 명수와 전략을 짜고는 에피소드 시작 버튼을 눌렀다. 곧 명수와 상미는 아까보다 더 복잡해진 미션 수행과 더 강한 적들을 맞아 정신없이 게임에 집중해야 했고, 그 사이 단유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방에서 책들을 정리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단유를 보며 물었다.

“왜 더 놀지 않고?”

“다 놀았어요.”

단유는 덤덤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책상에 앉아 보고 있던 책을 펼치고 샤프를 집어 들었다. 역시나, 싶은 생각이 들어 선생님이 살짝 미소를 짓다가 물었다.

“그런데 저렇게 예쁜 애한테 너무 차갑게 대하는 거 아니니?”

단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그 얼굴이 마치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말도 안 돼요. 쟤가 예쁘다고요?”

“그럼, 예쁘지? 저 정도면 남자 아이들이 많이 쫓아다니겠는걸?”

물론 얼굴만 그랬다. 말하는 모양새나 행동은 거의 명수 복사판 같았지만.

“선생님, 진지하게 여쭤볼게요. 쟤가, 그러니까 저 얼굴이 여기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합하는 얼굴이라는 건가요?”

“여기 사람들?”

“아, 저기··· 그러니까 서울 사람들이요.”

선생님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단유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네가 TV를 안 보고 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만, 저 정도면 어디 아역 배우라고 해도 믿을 거다. 굳이 TV를 보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저 정도면 예쁜 얼굴 아니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구나, 라고 속으로 되뇌며 단유는 몸을 돌려 책을 보았다.

“단유야.”

선생님이 다시 단유를 불렀다. 단유가 돌아보자, 침대에 걸터앉은 선생님이 단유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선생님은 네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 내가 여태 살면서 여러 아이를 봤지만, 너처럼 바르고 착하게 사는 아이를 본 적이 드물단다. 그런데 단유야. 선생님이 세상을 살다 보니까 말이야. 그냥 공부만 하는 게 다는 아닌 것 같더라. 명수처럼 아예 공부랑 담쌓고 사는 것도 문제긴 하겠지만, 어쨌든 주위의 아이들처럼 TV도 보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여자 친구도 사귀면서, 그렇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편하게요?”

단유는 말의 요지를 정확히 짚어냈다. 비록 상미와 불편해 보이는 단유가 걱정스러워 말을 시작했지만,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평소 단유가 가지고 있는 ‘강박’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그래. 선생님이 보기에 넌 너무 여유가 없이 사는 사람 같아.”

“저 여유로운데요. 학교에 지각하는 일도 없고, 숙제를 밀려서 하지도 않고, 책이나 식사도 되도록 천천히 하려고 하고요.”

“···우리 똑똑한 단유가 왜 갑자기 딴소리할까? 선생님 말이 뭔지 알면서?”

물론이다. 단유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려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이곳에 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단유는 생존을 제1의 가치로 보고 있었다. 명수라는 좋은 친구와 재훈이라는 보호자가 생겼지만, 그리고 눈앞에 계신 선생님이나 하은, 태호, 수련과 같은 이들이 주위에 있지만, 여전히 단유는 ‘생존’이 행동법칙 제1항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이 세계에 생존하기 위해, 즐길 거리, 여유를 조금 미루는 면이 있음을 단유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 사회에서 단유의 그런 행동방침은 ‘모범생’이라는 타이틀로 포장되어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려되는 터였기에 지금까지 단유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존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돌보며 그것을 업으로 한 선생님의 눈에는 단유의 ‘강박’이 잘 보였던 모양이었다. 특히나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길고, 또 부모도 아니니 제삼자로서 객관적으로 단유를 바라볼 수 있었기에 그런 평가를 할 수 있었던 선생님이셨다.

“지금 이 방을 봐. 깨끗하지?”

당연하다. 단유는 늘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살았다. 침대는 마치 새로 산 것처럼 깨끗했고, 책장에는 책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르게 정리·배열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필기구와 노트, 그 밖에 여러 가지 것들이 쓰임새에 따라 일정한 구역을 정해 정리되어 있었다. 이모나 선생님이 청소하러 방에 들어와도 할 게 없어서, 대충 둘러만 보다가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였다.

“너 예전에, 그러니까 6학년 때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어.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이게 더 심해졌어. 주위가 흐트러지는 것, 혹은 더러워지는 것을 심리적으로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된 거지. 물론 깨끗하게 사는 거, 나쁘지 않아. 정리 잘하고 깨끗한 게 뭐가 흠이겠니. 하지만 그게 너무 심해지면 그것도 일종의 병으로 본단다. 선생님이 보기에 넌 작년보다 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보이거든.”

선생님은 한동안 기회가 없어 꺼내지 못했던 말들을 이때를 빌어 털어놓기로 하셨는지 줄곧 생각해왔던 단유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혔다. 단유는 선생님이 자신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에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고맙지만, 자신의 생각과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 속속들이 알아낼까 두렵고 부담스러운 것도 진심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니가 정말 다른 아이들처럼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물론 선생님도 알지. 요즘 교육 시스템에서 너희들이 마냥 편하게 지낼 수만은 없다는 걸 말이야. 어쩌면 너처럼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할 수도 있어. 그런데 선생님은 네가 단지 공부만 잘하는 아이로 크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하는 말이야. 선생님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단유는 곧바로 인정했다.

“그렇다고 너무 명수처럼 놀지는 말고. 적당히. 적당히, 라는 말이 참 어렵긴 한데, 그래도 단유 넌 똑똑하니까 중심을 잘 잡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조금 어긋나더라도 네 주위에는 주영씨나 재훈씨, 그리고 선생님이나 이모님도 계시니까 너무 걱정만 하지 말고, 부디 편하게 생활하길 바랄게.”

“네, 선생님.”

선생님은 그래,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똑똑한 아이니까, 스스로 생각하고 옳은 길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선생님이 나가신 후, 단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베개를 침대 가운데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페이지를 마저 읽기 전, 베개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이 편하게 살지 않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한번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 같았다.

문이 벌컥 열리며 상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간다.”

“···가는 건 좋은데, 앞으로는 노크 좀 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은 앞으로도 자주 보자는 뜻?”

“···그렇게 들리니?”

“응!”

상미는 손을 흔들어 보이곤 문을 닫았다. 다시 조용해진 방에서 단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제2의 명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무려 4시간 동안 게임만 하다 돌아가는 상미였다.

다음 날, 등교하는 명수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고 환해 보였다. 마치 얼굴에 빛이 나는 크림이라도 바른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좋아?”

단유의 물음에 히죽 웃던 명수가 대답했다.

“날씨가 좋잖아?”

날씨가 좋긴 했다. 아침부터 뜨거운 공기에 길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였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과 탁한 공기가 뒤섞여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절절히 알려주는 아침이었으니까.

“다행이다. 어제보단 얼굴이 좋아 보여서.”

“그래? 뭐 그런 날도 있고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명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 나갔다. 잠시 그 뒤를 쫓던 단유는 문득 자신이 단 한 번도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콧노래로 부를 만한 노래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음악이라고 해도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래가 다였다. 그런 노래를 콧노래로 부르자니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안 들고.

“흠흠.”

콧소리를 내보려고 시도하려다 괜히 창피한 생각이 들어 관두고, 앞서가는 명수를 쫓았다.

****

그 뒤로 상미가 종종 집에 놀러 와서 게임을 하고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갔다.

“우리 집보다 TV가 크고, 우리 집보다 반찬이 많고, 게다가 여기서는 같이 게임 할 친구가 있잖아?”

라며 명수의 어깨에 팔을 거는 상미였다. 명수의 입이 이보다 더 커질 수 없다는 듯이 길게 찢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선생님도 상미를 두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미가 올 때마다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반겨주시는 선생님이셨다.

“너희들 학교 가고 없을 때, 상미 어머니가 한 번 찾아왔었거든.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상미가 외동이라서 많이 외로움을 탔다고 하더라. 취미가 또 게임이다 보니 같이 어울릴 동성 친구도 많지가 않고 말이야.”

선생님은 함께 있는 아이들에 대해 상미 어머니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다. 공부를 잘하는 단유와 축구부 활동을 하고 축구에 재능이 많아서 꿈이 축구선수인 명수에 대해 이야기를 드리니 어머니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단유가 전교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다. 단유 같은 아이라면 상미가 공부에 취미를 가질 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게다가 선생님과 이모님이 계속 집 안에 계시니, 혹시라도 아이들이 일탈할 가능성도 적어 보이니 나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말씀해 주세요. 그럼 여기에서 공부방 겸해서 아이들이 모두 공부할 수 있게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 비록 이성 친구이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라는 게 걸리긴 하지만 고리타분하게 그런 외적인 문제로 상미를 걱정하는 어머니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성 친구들이랑 잘 놀지 못하는 상미가 걱정스럽던 차에 이런 성향(?)의 아이들이라면 잘된 일일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상미 어머니는 단유와 명수가 있을 때도 한 번 찾아오셨다. 특히 단유를 보며 눈에 빛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니가 명수구나. 상미가 네 이야기 많이 하더라.”

명수가 헤벌쭉 웃으며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뭐가 고마운 건지 모르겠다만. 뒤이어 단유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단유에게 상미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네?”

“나중에 같이 공부도 하고, 상미가 모르는 거 있으면 많이 가르쳐 주고 그러라고.”

“아, 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상미는 더 자주, 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이미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던 터라 의미가 없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이전에는 9시쯤이었던 것이 이제는 10시쯤으로 늘어났다는 것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바뀐 것이 상미의 귀가 시간뿐인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의 관계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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