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타운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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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단유는 인사와 함께 주방으로 가 이모님께 봉투를 건넸다.
“저녁 다 됐어. 식탁에서 기다려.”
단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수학책을 펼치고 싶었지만, 참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명수는 곧장 거실로 내달려 게임기를 실행시켰다.
“명수야, 밥 안 먹어?”
선생님이 명수를 보며 묻자, 명수는
“먹어요!”
라고 대답을 하면서 손은 이미 새로운 게임 타이틀에서 꺼낸 시디를 게임기 속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타이틀 화면이 나오는 것까지 확인한 명수는, 그제야 식탁으로 왔다.
“저거 산 거야?”
선생님이 묻자 명수가 곧바로 시인했다. 그간 모으던 용돈으로 산 거라면서 선생님이 장 보라고 주신 돈으로 산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선생님은 그저 미소로 지으며 명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고, 단유는 갑갑한 머릿속을 어떻게든 시원하게 풀고 싶었다. 잠깐 가서 한 문제만 풀어볼까, 라는 충동이 느껴질 때 식탁 위로 뚝배기에 담긴 빨간 김치찌개가 올라왔다.
“먹자.”
선생님이 국자로 명수와 단유 앞에 놓인 작은 국그릇에다 김치찌개를 조금씩 담아 주었다. 살짝 시큼하고 살짝 맵지만 화끈한 기운이 도는 김치찌개의 얼큰함이 단유의 속을 풀어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명수는 듣지 못했는지 허겁지겁 먹을 뿐이었다.
“명수야, 천천히 먹어라. 그러다 체할라.”
그러나 명수는 괜찮다며, 그저 입안으로 밥과 찌개를 동시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너 천천히 안 먹으면 게임 못하게 한다.”
명수의 숟가락이 멈칫하더니 선생님을 향해 불쌍한 눈동자를 들이밀었다.
“왜?”
“···아니요.”
하지만 단유가 짐작하기에 아마도 상미라는 아이가 오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게임을 같이 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런 짐작을 이야기하자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걔가 누군데?”
단유는 마트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반면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선생님은 두 사람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반가워했다.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친구네?”
그러고 보니 여태 이 집으로 초대되어 온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학교에서도 그렇고 하굣길도 같이 하는 지태나 채윤이 있었지만, 그 둘도 아직 집에 초대되어 온 적은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게 게네들이 집에 온다고 해서 딱히 뭔가 할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다나 떨자고 집에 초대한다는 것은 단유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상미는 집에 오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몰라서 왜 안 오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명수는 시무룩한 얼굴로 게임기를 꺼야 했다.
“왜 안 해?”
“그냥.”
명수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단유는 머릴 시끄럽게 하던 아이가 오지 않아 좋긴 했지만, 반면 명수가 저리 시무룩해 하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은 조금 이기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상미를 보면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아서.
****
다음 날 등굣길에 단유는 눈 밑이 검은 명수를 보며 물었다.
“너 걔 좋아해?”
“응? 아··· 뭐, 아니.”
뭔가 대답이 시원찮다. 단유는 명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러는데? 걔 때문에 잠도 못 잔 거 같은데?”
그러자 고개 숙인 채 시무룩하게 걷던 명수가 오히려 단유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갑자기 뭐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난 걔처럼 예쁜 여자애는 처음 봤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단유가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명수는 가만히 상미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듯 아련한 눈동자를 하고 입을 열었다.
“얼굴도 하얗고, 눈도 크고, 순하게 생겼잖아? 근데 또 말도 잘하고, 입술도 작고, 빨갛고. 안 그래?”
“···그렇긴 뭐가 그래?”
뭔가 두서없이 자신의 감상을 밝히는 명수를 보아하니 분명 푹 빠져버린 것 같긴 했다. 문제는 단유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부분에 명수가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단유는 명수의 그릇된 환상을 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실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눈이 대략 이 정도 되지? 그런데 눈의 크기에 비해서 다른 이목구비의 비율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어. 특히 입이 너무 작다는 느낌 안 들었어? 그렇게 작으면 비율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쁘다는 인상을 받기 힘들지. 그리고 눈썹도 흐릿하던 거 안 봤어? 눈썹이 연하다 보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이마의 경계선이 흐릿해지지. 그래서 앞머리로 가리고 다니는 거였겠지만. 그리고 귀도···.”
“그만!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명수가 단유의 말을 잘랐다. 단유는 더 할 말이 남았다는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니가 여자 보는 눈이 굉장히 높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로 해. 그래도 심하다, 너. 어떻게 그 얼굴을 보고도 예쁘다고 못 느끼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얼굴은···.”
“거기까지.”
명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반했다는 거야?”
“응?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거지.”
명수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앞서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단유는 그 뒷모습을 보며 걷다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걔, 말 못하는데.”
****
단유는 그렇게 상황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명수가 잠을 설칠 정도이긴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으리라 판단한 것인데.
“안녕하세요.”
방에서 공부하던 단유는 순간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닫힌 방문 너머로 들리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단유의 집중을 방해했다.
“어? 안녕?”
“안녕? 어젠 미안. 집에서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해서 가지 말라고 해서 말이야.”
“아, 그랬구나.”
“전화번호라도 알고 있었으면 전화를 했을 텐데 말이야. 많이 기다린 건 아니지?”
“응?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밤새도록 잠도 설칠 정도였으면서.
“현관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말고 들어오지 그러니? 명수가 초대한 첫 번째 친군데, 이렇게 대접할 순 없지.”
선생님도 약간 들뜬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제 걔는?”
흠칫, 놀란 단유는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지금 열심히 과학 문제집을 푸는 중이었단 말이야.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단 말이야.
‘열지 마. 열지 마. 열지 마.’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면서 명수가 이보다 더 환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야!”
너 왜 그렇게 밝은 건데?
“상미 왔어.”
그리고 열린 틈으로 상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
단유는 어색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
명수는 히죽 웃으면서 상미에게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한다는 식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했다.
“단유는 공부를 좋아해서, 지금 시간에 방해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러면서 문을 닫아주는 명수였다. 고맙다, 명수야.
그러나 문이 닫히기 전, 쿵 소리 나게 닫히는 문을 막으며 몸을 들이민 상미가 곧 방으로 들어왔다.
“우와. 방 되게 깨끗하다? 책 좀 봐. 정말 공부 좋아하나 보네. 이건 뭐야? 고등학생 책 아냐? 이런 것도 보는 거야? 어, 이건 뭐야? 논어? 어려운 책도 많이 보나 봐?”
잠시 당황하던 명수는 이내 상미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전에 같이 살던 선생님이 선물해준 거야. 단유가 워낙 머리가 좋아서 이런 책도 잘 읽어. 저기 저 책도 친한 형이 선물해준 건데, 초딩 때부터 저런 책 읽었다니까.”
명수는 눈에 익은 책들을 중심으로 마치 박물관 큐레이터처럼 책의 연원과 단유가 얼마나 저 책을 좋아하는지를 상미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나저나 왜 그걸 니가 설명하는 건데?
“와,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프다. 야, 나가자.”
응? 단유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상미를 바라보는데 상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놀 때는 다 같이 놀아야 재밌는 거야. 나와.”
그리고 먼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명수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단유를 보며 말했다.
“나오래.”
그러고는 상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상미는 익숙하게 게임기를 작동시키고 게임을 시작했다.
“어? 너 어제 안 했어?”
“응.”
“왜 안 했어? 난 게임 사면 바로 해봐야 직성이 풀리던데. 어제 산 게임도 난 어제 바로 다 해봤는데.”
차마 니가 안 와서 흥이 안 났어, 라는 말은 못하고 명수는 그저 머리를 긁으면서 히죽 웃기만 했다.
“뭐, 같이 하면 되지. 아, 단유 넌 뒤에서 구경하고 있어. 조금 있다 시켜줄게.”
“안 시켜줘도 돼.”
단유는 소파에 기대고 앉아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관찰할 준비를 했다.
“아니야. 이런 건 구경만 하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게 더 재미있단 말야. 그렇지?”
“그럼, 그럼.”
명수는 상미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좋다고 할 기세였다. 단유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팔짱을 끼고 몸을 소파에 묻었다. 그리고 만약 상미가 게임패드를 자신에게 쥐여준다고 해도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렇게 나와서 구경해주는 것만으로도 단유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면서 그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자기들 뒤에 단유가 앉아있다는 사실도 잊었는지 신나게 패드를 조작하면서 게임을 즐겼다.
1시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전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컨트롤러를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유는 슬며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단유를 부르지 않았다.
단유가 한참 수학 문제를 풀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돌아보니 선생님이셨다.
“저녁 먹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생각하며 주방 식탁으로 향했는데 식탁에는 상미랑 명수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우와 이거 되게 맛있어요! 우리 엄마가 한 거보다 더 맛있어!”
이모님은 슬쩍 웃으면서 고맙다고 사례한 후, 접시 위에 황태 양념구이를 한 마리 더 얹어 주셨다.
“너 집에 안 가?”
그 말에 명수가 먼저 대답했다.
“저녁 먹고 간다고 전화했어.”
그걸 왜 니가 말하고 있는 건데? 상미가 황태를 오물오물 씹으며 말했다.
“넌 돌려 말하는 법이 없구나? 어제도 바로 눈치채긴 했지만.”
단유는 말없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너 나 싫어?”
순간 식탁 위에 숟가락이 동시에 정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단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 황태구이를 집어 들었다.
“아니.”
“그런데 왜···.”
“싫은 게 아니고, 그냥 신경 쓰기 싫은 거야.”
다시 식탁 위에 수저들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지만, 또 상미의 수저가 달그락거리며 밥그릇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게 싫다는 말 아냐?”
“그냥 내 일상의 리듬이 흐트러지는 게 싫어서 그런 거야. 너라는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냐. 그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놀아. 그러면 괜찮을 거야.”
상미는 열심히 턱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단유에게 주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계속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단유에게 상미가 말했다.
“너 삐졌니?”
“뭐?”
단유가 무슨 뚱딴지냐고 반문하려는데 상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게임 안 시켜줬다고 삐진 거 아니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사실 나도 게임기를 붙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나중에야 니가 방에 간 걸 알았어. 미안해. 조금 있다가 밥 먹고 시켜 줄 테니까, 마음 풀어.”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나 게임 안 좋아해.”
상미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거짓말! 세상에 게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아무리 책 좋아하고 공부 잘하는 애들이라도 게임은 다 좋아해!”
“거짓말 아니거든?”
명수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단유는 게임 안 좋아해. 그래서 저 게임 한 번도 안 해봤을걸?”
“안 돼. 게임 한 번 안 해보고 좋아한다, 안 한다 말하는 건. 한번 해보고 나서 말해봐.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 말이야.”
그때 식사를 마친 단유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게임 안 해도 돼. 난 그 시간에 책을 읽는 게 더 즐거우니까.”
“너 학교에서 무슨 외톨이 같은 거야? 뭐라더라?”
“히키코모리?”
“어, 뭐 그런 거. 너 그런 거 아냐?”
단유는 머리를 흔들며 물었다.
“게임을 안 하는 거랑 외톨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비슷하잖아? 사회성 부족한 애들이 방 안에 틀어박혀서 대화도 안 하고 숨어지내는 사람처럼 있는 거 말이야.”
“전혀 안 비슷하거든?”
“그럼, 게임 한 번 해봐. 해 보고 말해봐. 재미있는지 없는지.”
어제의 재탕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단유는 약한 두통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