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타운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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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명수가 기어코 게임 하나를 골랐다.
“그거야?”
명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다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무의미한 경쟁을 펼치던 예의 그 여자아이가 명수를, 정확히는 명수가 들고 있는 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절절해서 단유는 물론이고 명수마저 쉽게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거 할 거예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얼굴처럼 앳된 미성이었다.
“이, 이거요?”
명수가 타이틀을 슬쩍 들어 보이자,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동자가 마치 새벽 운동 나가기 전 자신을 바라보는 호빵의 그것과 비슷해 명수는 잠시 멈칫했다.
“예, 예.”
좀처럼 보기 힘든, 쑥스러워하는 명수의 모습이었다. 여자아이는 살짝 볼을 붉히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저 양보해 주시면 안 돼요?”
하지만 명수로서도 어렵게 고른 게임일뿐더러,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한 탓에 더 이상 게임을 느긋하게 고를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 눈동자를 바라보며 ‘안 돼’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던 명수는 단유를 향해 바라보았다.
‘도와줘!’
라는 눈빛이었다. 단유는 머리를 슬슬 긁다가,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제 친구가 이미 고른 거니까요. 거기 찾아보시고 다른 거로 하시죠? 거기 똑같은 거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여자, 아니 소녀는 같은 눈동자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저거랑 같은 건 안 팔거든요?”
그럴 리가, 라는 생각으로 명수를 바라보자 명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거, 원래 할인 안 되는 타이틀로 유명한데··· 저 가격에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연히 생긴 게임기가 집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게임을 사려는 명수나, 게임 자체에 관심이 없는 단유가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단유는 나름 합리적으로 소녀의 말을 이해하려 했고, 그에 따라 합당한 추론과정을 통해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희가 양보하기 힘들다는 걸 이해하시겠네요. 그쪽에서 탐내시는 만큼 저희 쪽에서도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니까요. 저희가 먼저 선택했고, 제 친구도 그걸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 그쪽···에서 포기하셔야겠네요.”
단호한 단유의 대답에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우는 거 아냐?’
라는 물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는 명수를 무시하고 카트를 붙잡은 단유였다.
“가자.”
드르륵 카트를 돌려 가려는데,
“저기요!”
소녀가 등 뒤에서 단유를 불렀다. 단유가 고개만 슬쩍 돌리자, 머리를 쓸어올리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소녀였다.
“아니, 여자가 좀 양보해달라고 하는데 그거 좀 양보해 주면 어디 덧나요? 왜 그렇게 매너가 없어요?”
단유는 순식간에 눈빛이 변한 소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요?”
“왜요는 뭐가 왜요에요?”
“왜 우리가 양보해야 하냐고요.”
기가 찬다는 듯, 헛바람을 뱉은 소녀가 허리에 손을 걸쳤다.
“매너 몰라요?”
“그게 무슨 매넌데요?”
“아, 나 참. 진짜 말 안 통하네.”
단유는 잠시 소녀의 짜증 섞인 시선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봐요. 그거 뭐예요? 지금 그거 무슨 뜻으로 고개를 흔들어요?”
소녀의 날카로운 반응에 옆에 있던 명수가 오히려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뜻이긴요. 말 안 통하는 사람이랑 대화하려니 답답하다는 뜻이었어요.”
“뭐라고요?”
단유는 오늘날 한 번 제대로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그러더니, 저녁에는 마트에서 이러고 있다.
“지금 그쪽에서 계속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몰아가고 있잖아요.”
“네?”
단유는 카트를 밀고 갔다. 명수에게 카트를 넘기고 소녀와 마주한 단유는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여자가 양보하라고 하면 양보해야 한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그런 게 매너라는 소리를요. 혹시 그게 사회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매너인데 제가 모르고 있었던 거라면 제가 사과할게요. 됐죠?”
소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단유는 옆에서 구경하는 직원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까부터 말리거나 중재하긴커녕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베물고 있던 사람이었다.
“계속 들으셨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철저히 구경꾼으로 남아있고 싶어 했던 직원은 단유가 물어볼 줄 몰랐던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 아니, 저기 난···.”
여자애도 지지 않고 직원에게 물었다.
“어디 한번 말씀해보세요.”
입 잘못 놀렸다간 가만두지 않겠다, 는 의사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여자애 때문에 직원은 더더욱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창고 정리나 하러 갈걸.
그 사이에 단유는 직원 옆에 있던 또 다른 구경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앗 뜨거, 하는 눈으로 다들 카트를 몰고 다른 곳으로 사라져갔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단유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도 그만 가보세요. 고작해야 애들 싸움인데, 그렇게 곤란 해하지 마시고요.”
직설적인 단유의 말에 직원이 머뭇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러지 말고 있잖아··· 여기서 큰 소리 내면서 싸우면 안 되거든?”
“잘 알고 있어요. 절대 소란 피우지 않을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이 같지 않은 아이의 말에 직원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다가 얼른 몸을 돌렸다.
“뭐하는 짓이야?”
여자애가 고리눈을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람들 많은 데서 그쪽이 창피당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그랬어요.”
여전히 돌려 말할 줄 모르는 단유였다.
“내가 왜 창피를 당해?”
“아시잖아요? 왜 창피한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억지 쓰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이겠어요? 아까 어떤 사람들은 핸드폰도 들었던데, 요즘은 금방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린단 말이에요. 그럼 누가 창피하겠어요?”
이미 경험이 있던 단유였다. 아마 지금 이 모습이 인터넷에 올라가면 또 한 번 유명세(?)를 치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 일을 통해 겪어본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사람은 아마도 여자애일 것이다.
여자애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참.”
더는 말을 못 잇는 소녀에게 단유는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분명하게 말씀드릴게요. 이건 저 친구가 먼저 골랐어요. 저 친구가 변심해서 저걸 내려놓거나 혹은 나중에라도 환불을 하는 등의 사유로 저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반환하지 않는 한은 저 친구에게 소유권이 존재해요. 법적으로요. 그리고 우리가 일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고,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사인데 어떤 양보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게다가 자발적인 양보도 아니고 강압적인 양보는 양보가 아니겠죠? 그러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양보해드릴 수 없으니 그쪽 분은 다른 원하시는 것을 찾으시길 바랄게요.”
단유는 할 말 다했다는 듯, 입을 다물고 등을 돌렸다.
“잠시만.”
단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첫째는 포기할 줄 모르는 소녀 때문이었고, 둘째는 행동이 굼뜬 명수 때문이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데도 명수는 왜 저렇게 엉거주춤 서 있는 걸까?
“니 말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 포기할게.”
굳이 가려는 사람 붙잡고 선언할 거까진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 소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억지 부려서 미안해.”
“?”
단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다시 머리를 쓸어넘기며 소녀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 이름 뭐야?”
“응?”
“이름 뭐냐고?”
“김단유라고 해요.”
대답은 명수가 했다. 아니, 얼굴은 왜 붉히고 있대?
“난 상미라고 해. 유상미.”
도대체 무슨 상황이래? 단유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라보는데 소녀, 상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인데 무턱대고 양보해달라고 하면 어렵겠지. 그래, 이해했어. 그러니까,”
상미는 입꼬리를 올렸다.
“얼굴 좀 알고 지내자고.”
문득 단유는 자신의 머리를 막 긁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머리 구석구석 느껴지는 가려움증이 참기 힘들 정도였다. 보는 시선만 없다면, 체통도 신경 안 쓰고 그냥 드러눕고 머리를 긁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맥락 없는 자기소개, 어리벙벙한 얼굴의 명수,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는 단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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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만 사면 돼.”
어느새 주문지에 적힌 것들을 모두 카트에 담아낸 단유였다. 카트를 밀고 나가는데, 계속 뒤가 신경 쓰였다.
“이게 처음 플레이하면 말이야···.”
“나도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상미는 뭔가를 계속 이야기하고, 명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너 집에 안 가?”
알고 보니 상미는 같은 학년이었다. 게임을 무척 좋아한다는 그녀는 게임 할인 이벤트를 뒤늦게 알고 찾아온 거라고 했다. 그래서 딱히 다른 급한 일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이미 그녀의 손에도 게임 타이틀 2개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진짜 원했던 것은 명수의 것이었다는 듯, 명수 옆에 서서 그 게임에 대한 이런저런 지식들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어차피 나도 이거 계산하고 갈 거야. 왜? 그렇게 꼴 보기 싫어 죽겠어?”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꽤 넉살이 좋은, 털털한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여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하긴 했지만, 사실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했더니,
“그만큼 그 게임이 탐이 났던 거지.”
자기 생각과 신념에 반하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잠시 자신을 속일 만큼 영악한(?) 면도 있다는 본인 소개였다. 어처구니없는 본인 소개였다.
그런데 상미만큼 답답한 건, 명수의 태도였다. 연신 헤벌쭉해서는 상미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이는 명수였다.
“너 왜 그래?”
“뭐?”
뻔뻔함까지 갖춘 명수는 상미와의 대화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때문에 애초 맛있는 걸 사 먹겠다고 결심했던 것도 잊을 정도였고, 그래서 주 미션(main mission)인 ‘게임 타이틀 구매’는 성공했지만, 부 미션(sub mission)인 ‘간식 구매’는 실패하고 말았다.
마트를 나와 봉투를 들고 터벅터벅 길을 걸어가던 단유는 인상을 쓰고 뒤를 돌아보았다.
“집에 안 가?”
명수와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던 상미가 눈을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가는 중인데?”
“어딘데?”
“저기.”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은 우연히도 단유의 오피스텔이 있는 방향과 일치했다. 단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집에 가자마자 수학책을 꺼내야겠다고. 수학 문제나 풀면서 복잡하게 꼬인 머릿속을 풀어야겠다고.
어느덧 오피스텔 앞에 다다른 단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명수와 무슨 이야기를 그리도 심각하게 하는지,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명수야, 가자.”
명수가 고개를 번쩍 들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 그래.”
명수는 옆에 선 상미한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보자.”
“어, 그래. 안녕.”
상미가 손을 흔들어 보이곤 계속 걸어갔다. 단유 옆을 지날 때는 단유에게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가, 친구야.”
친구? 누가? 나? 단유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을 때, 명수가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너 뭐냐?”
“뭐가?”
“···됐다.”
단유는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던 단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명수에게 물었다.
“다시 보기로 했어?”
“응?”
“아까 걔가 나중에 보자고 했잖아.”
“아, 응. 조금 이따가 보기로 했어.”
“뭐?”
단유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상미네 집이 우리 오피스텔 뒤에 있는 빌라더라고. 저녁 먹고 놀러 온다고 했어.”
“···왜?”
“이거같이 하려고. 도와주겠대.”
단유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방문을 잠그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