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타운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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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시장을 보는 일은 대부분, 집 안 청소와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이모님의 몫이었다. 아침, 혹은 오후에 한 번씩 장을 봐 와서 해결하는데, 가끔 박 선생님이 이모님과 함께 외출해서 장을 보기도 했다.
단유와 명수 두 사람은 심부름도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가사에서 배제되어 있었는데, 이는 주영의 부탁 때문이었다. 최대한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달라는 주영의 부탁을 박 선생님이 들어준 탓인데, 사실 그런 부탁이 없더라도 딱히 두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킬 일도 없었다. 기껏해야 쓰레기 버리는 심부름 정도였는데, 그것도 거의 이모님이 알아서 제때 처리하셨기 때문에 두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 팔자 좋은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명수는 박 선생님 앞에서 반기를 들었다.
“우리도 이모랑 선생님, 돕고 싶어요.”
호빵이 명수의 바지 끝단을 물고 뒹굴어도 명수는 곧은 시선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뜬금없는 명수의 제안에 멀뚱히 바라보다 대답했다.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니?”
“저희가 가서 장 봐올게요.”
선생님은 나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는 소리를 하진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었다가, 다소 안심하는 기색을 보이며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런 건 안 도와줘도 돼. 그리고 이모가 어련히 알아서 잘 봐주시고 있는데 뭣 하러 그래? 안 그래요?”
주방에서 마늘을 다듬던 이모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집에 필요한 건 이미 다 있고, 필요할 때마다 너희들 학교 간 뒤에 마트 가서 다 사오고 있는데, 굳이 심부름시킬 일도 없어. 그러니까.”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유와 명수를 죽 훑은 뒤, 미소를 띠었다.
“공부나 열심히 해.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잖니?”
다른 집 같으면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컴퓨터 오락이나 TV에 빠져서 운동이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일부러 심부름을 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 선 두 아이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체력관리를 하는 기특한 아이들이니, 일부러 밖으로 내돌리며 몸을 움직이게 할 필요가 없었다.
“저 집에서 공부 안 하잖아요? 저 시간 많아요.”
명수는 뻔뻔스럽게도 당당한 얼굴을 하고 학생으로서 저래도 되나 싶은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하긴 그 말도 사실이긴 하지.’
명수는 단유와 달리 호빵과 놀면서 TV를 보는 게 낙인 아이였다. 처음 선생님이 두 아이를 맡았을 때, 명수를 공부시키려 했지만, 자긴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당당하게 밝히던 아이였다. 몇 번 다그쳐보았지만, 슬금슬금 거실로 나와서 호빵을 끌어안고 TV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저래 보여도 제 딴에는 축구에 올인하겠다며 아침마다 운동도 하고, 오후 늦게까지 축구부 활동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즐겁게 이어나가는 중인 명수였다. 학교 공부도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닌지, 숙제 같은 건 제대로 하는 모습도 보여서 선생님도 더는 공부하란 소리는 하지 않게 되었다.
단유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저절로 두 사람을 비교하게 되기도 했지만, 둘 앞에서 서로 비교하는 말은 절대 꺼내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과 별개로, 박 선생님은 혹시 명수에게 숨은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뭐 사고 싶은 거 있니?”
명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딱히··· 그냥 돕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학교 숙제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에게 가사일 돕기 같은 숙제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어보게 되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가만 바라보니 눈동자가 좌우로 요동치는 명수였다. 역시 뭔가 있구나, 싶었던 선생님은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한 번 갔다 올래? 아, 이모님. 애들 간식 많이 남았어요?”
이모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다 떨어졌다고 알려 주었다.
“마침 간식도 떨어졌으니까, 먹고 싶은 것도 사오고. 아, 가서 사올 거 몇 가지 적어 줄 테니까 그거 보고 사오도록 해.”
선생님은 메모지와 이 만원을 단유에게 쥐여 주었다.
“왜 제게?”
단유가 물음표를 달자, 선생님은 오히려 단유에게 반문했다.
“그럼 누구한테 줘?”
단유의 시선이 명수에게 옮겨졌다가 이내 선생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애초에 명수에게 돈을 주는 옵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선생님이셨고, 그것을 바로 이해한 단유는 명수의 소매를 끌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오피스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형마트를 찾아갔다. 사거리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는 그동안 오고 가며 보긴 했는데, 실제로 마트 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하은과 함께 지냈던 인평시에서는 가끔이지만 다 함께 마트를 다니기도 했는데, 서울에 와서는 처음 마트 구경을 하게 된 셈이었다.
“보자, 먼저··· 사과를···.”
“저기 가자!”
카트를 끌고 나와 먼저 살 물건을 찾으려 하는 단유의 앞을 가로막고 길을 인도하는 명수였다.
“어디?”
“그냥 따라와.”
어쩐지 무척 신이 난 얼굴을 하고 카트를 끌고 가는 명수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트를 가고 싶다고 그랬던 것일까, 궁금했던 단유였다. 하굣길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먹고 싶은 걸 사려는 걸까?
하지만 명수는 식품 코너를 지나, 시식 코너도 건너뛰며 달려간 곳은 디지털/IT 코너였다.
“뭐야?”
단유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명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뭔갈 찾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명수가 찾았다는 듯, 카트를 밀고 달려간 곳은 할인 이벤트가 진행 중인 매대였다.
“찾았다!”
명수가 신이 난 얼굴로 바라보는 그곳은 게임 타이틀들이 즐비하게 전시된 매대였다. 그제야 예전 태호 형이 집에 두고 간 게임기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단유였다.
“게임 사려고?”
“응. 맨날 같은 것만 하는 것도 지겹잖아. 그리고 그건 같이 할 사람이 있어야 재밌는데, 넌 게임 안 하니까. 그런데 오늘 반에서 누가 이야기해주더라고. 게임 할인하는데 가서 싸게 샀다고.”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돈은 있어?”
“응. 그동안 용돈 모아 놓았지. 그리고 이런 건 선생님께 사달라고 하기가 좀 그렇잖아? 나도 염치는 있다고.”
‘염치’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자신의 처지를 밝히는 명수가 우습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뭐 그랬다. 단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굳이 심부름을 자청한 이유는?”
“그래야 마트에 오지.”
“그냥 와도 되잖아? 학교 끝나고 마트 들렀다 집에 가면 되잖아?”
“그럼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될 거 아냐. 그럼 선생님이 걱정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랬지.”
나름 머리를 굴린 명수였다. 어떤 게임을 사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축구부 활동을 하면서도 집에는 늦지 않게 들어갔던 명수는 넉넉한 쇼핑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나름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한테 게임 사러 간다고 말하긴 창피하고, 그래서 심부름 핑계로 마트를 들려서 게임 타이틀을 산 뒤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인 듯한데, 뭔가 어설프다.
“주말에 시간 내서 와도 되고, 학교 끝나고 빨리 마트로 와서 물건 산 뒤에 집에 들어가도 되고··· 생각해 보면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심부름 핑계를 댈 필요가 있었냐는 물음에 명수가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한 애가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간대? 주말에는 할인이 끝날 수도 있고, 그 전에 재미있는 게임들이 다 팔릴 수도 있으니까 되도록 빨리 와서 사려는 거지. 학교 끝나고 빨리 마트로 온다고 해도 어떤 게임을 사야 할지 골라야 하는데 그게 금방 되겠어? 시간이 걸릴 거 아냐? 그러니까 넉넉하게 쇼핑할 수 있게 이런 방법을 쓴 거 아냐? 석고 넌 책 보는 데만 머리 쓰지 말고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도 좀 공부하고 그래라. 걱정된다.”
단유는 초점 잃은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명수에게 ‘걱정된다’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걱정이 됐다.
‘나,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카트 손잡이를 붙잡고 자신의 어떤 판단이 명수에게 그렇게 어리석게 보였던 것일까, 단유가 고민하는 사이, 명수는 신나게 게임 타이틀을 뒤적거리며 고르고 있었다.
“잠깐 비켜줄래요?”
단유는 등 뒤에서 난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짧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와 입은 작은데 눈이 큰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비슷한 또래 같기도 하고, 조금 더 많은 것 같기도 한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앞머리로 이마를 살짝 가리고 있어 시각적으로 얼굴이 작게 보이는 모습이긴 한데, 굳이 가리지 않아도 본래 얼굴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눈썹이 가늘고 연한데, 아마 화장을 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수련도 눈썹이 연한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외출을 나갈 때는 항상 눈썹을 진하게 그리고 나간다고 했으니까.
“저기요?”
“네?”
단유는 자기도 모르게 낯선 여자의 얼굴을 분석(?)하느라 얼이 빠져 있었다.
“비켜 달라고요.”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에 그제야 단유가 얼른 카트를 옆으로 치워주었다.
“별꼴이네.”
라고 중얼거리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단유는 방금 자신이 보인 추태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왜 그랬지?’
한동안 안 그러다가 갑자기, 그것도 처음 본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 너무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무래도 명수가 한 말을 좀 더 진지하게 고찰해봐야 할 것 같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단유가 비켜준 틈으로 지나간 여자아이는 명수가 게임을 고르고 있는 매대로 향했다. 그리고 명수처럼 게임 타이틀을 고르기 시작했다. 명수가 그 모습을 힐끔 보더니, 게임을 고르는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세로로 세워져서 타이틀의 제목만 눈에 들어오는 상황이라, 표지까지 확인하면서 꼼꼼히 게임을 고르던 명수의 손과 눈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자아이의 행동도 조금씩 변했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게임 타이틀 하나를 집어 들고 앞뒤로 확인하던 여자아이는 명수의 손이 바빠지면서 자신이 게임 하나를 들여다볼 때, 명수는 세 개 혹은 네 개를 확인하는 것을 인지했다. 그러자 여자아이의 손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게임 타이틀을 빼내고 표지를 확인하고 집어넣고, 다음 타이틀을 꺼내고 확인하고 집어넣는 절차가 빨라지더니 명수가 확인하는 개수와 비슷한 숫자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명수도 이를 알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대로 표지를 확인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뺐다가 넣었다가 뺐다가 넣는 동작이 이어졌다.
단유는 두 사람이 펼치는 속도전을 구경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경쟁이 붙어서, 누가 더 빨리 게임을 뽑고 꽂는지를 시합하는 듯했다.
명수는 그렇다 쳐도, 저 아이는 대체 어떤 아이길래 명수와 저런 무의미한 경쟁을 하는 걸까, 궁금했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아이한테 다가가서 ‘왜 이런 쓸데없는 짓에 열을 올립니까?’라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구경만 했다.
구경하는 사이에 단유는 여자아이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콧등에 난 작은 점과 다소 뾰족한 턱, 그리고 머리가 짧아서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는 긴 목선. 하얀 프릴이 달린 노란색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여자아이는 명수보다 5㎝ 정도 작은 키를 가졌다. 얇고 작은 입술에 살짝 힘이 들어간 듯한데 결코 질 수 없다는 의지가 조금 과하게 들어간 인상이었다.
‘도대체 저게 뭐하는 짓이지?’
분명 뭔가를 고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저래서는 뭐라도 고를까,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야, 너희들 뭐하니!”
마침 지나가던 점원 한 명이 그 장면을 목격한 뒤에야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아니 너무 티가 나게 다투던 경쟁이 끝이 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붉힌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본래의 목적을 먼저 떠올린 여자아이가 타이틀을 ‘천천히’ 고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골랐어?”
단유가 혹시나 하고 물었지만, 역시나 명수는 고개를 절레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게임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미 3분 전쯤에 빼서 보았던 타이틀을 다시 뽑아 들기 시작한 명수였다. 저래서야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못 고르겠는걸, 이라고 홀로 생각해 보는 단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