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31화 (231/956)

좀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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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들 해, 둘 다. 차분하게 대화하기로 했잖아. 태훈이 너도 무조건 화를 내기보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생각을 밝혀. 감정적으로 대응해봐야 너만 손해야.”

태훈이 억울하다는 듯 단유에게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모욕을 받아도 내가 모욕을 받았어. 그런데 왜 내가 사과를 해야 돼?”

“알았어, 알았다고. 잠시만 기다려.”

단유는 다시 철규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자리에 앉은 철규는 팔짱을 낀 채 태훈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백철규.”

“···왜?”

“나도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하나만 묻자. 괜찮아?”

철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는 내내 생각했던 물음을 던졌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에 대해 모두 들었어. 그렇지?”

철규는 가만히 말을 기다렸다. 단유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 넌 태훈이에게 공중도덕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꺼냈어. 그리고 ‘이상한 음악’으로 주위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어. 맞아?”

“그래. 난 정당한 요구를 한 거야. 그게 뭐 어때서?”

“그리고 태훈이가 이렇게 말했지. ‘이상한 음악이 아니다’라고. 그랬더니 니가 그게 음악이냐며 개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게 낫다고 이야기했어.”

순간 철규는 단유가 어디 녹음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런 말을 한 거 같긴 한데, 정확히 저렇게 말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철규는 그 말에 대해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난 그 점에서 의문이 들어. 태훈이가 듣는 음악이 너한테 이상하게 들렸을 수 있고, 또 조금 지나칠 수는 있지만 ‘이상한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게 니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 하지만 개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게 낫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내가 듣기에도 태훈이에게 모욕적인 발언이었다고 생각해.”

철규는 발끈했다.

“그게 무슨 모욕이야! 이상한 음악을 듣는 거잖아? 무슨 짐승 소리같이 웩웩거리면서 노래하는 게 안 이상해? 그냥 있는 대로 말한 게 뭐가 문제야! 그걸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쟤가 문제지.”

단유는 다시 태훈의 입을 막았다.

“일단 내가 정리하고 너한테 말할 기회를 줄게. 말싸움하자고 지금 이 자리 만든 거 아니잖아. 그리고 철규야. 그 말이 있고 나서 태훈이 그랬어. 철규 니 말이 더 개소리 같다고.”

“그러니까!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표현했을 뿐인데, 내가 한 말을 개소리라고 한 거잖아, 저 새끼가!”

“그래, 너는 그게 너한테 모욕이었다는 거지.”

“그래!”

단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만 하는 데도 지치는 이 기분은 뭘까?

“철규야. 난 결코 태훈이를 대변할 생각은 없고, 또 니 편을 설 생각도 없어. 그 점은 분명히 하자. 난 어디까지나 중립적으로 이야기하고 싶고, 그래서 지금도 너에게 말할 기회를 준 거야.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난 너에게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니가 모욕감을 느낀 건, 태훈이가 널 깔본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너도 상대방의 취향을 깔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태훈이가 듣는 음악이 이상하다고 해도, 면전에서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건 이미 상대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거야. 예를 들어서 니가 굉장히 좋아하는 옷을 입고 외출을 했는데 누군가가 너에게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고, 그런 옷 입지 말라고 하면 넌 어떤 기분일 거 같아? 게다가 차라리 그 옷으로 개나 주라고 하면? 넌 분명히 속이 상할 거야. 안 그래?”

“그거랑 이건 다르지!”

“어떻게?”

“미치겠네. 야, 김단유. 내가 그런 옷을 입을 리도 없지만, 내가 입은 옷을 보고 지적하는 사람이 패션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일 수 있는 거 아냐? 패션도 모르는 사람이 지껄이는 말이랑 내가 하는 말이 같아? 그리고 없는 말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한 거잖아? 솔직하게 말하는 게 모욕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안 되잖아?”

단유는 두통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다. 무한히 돌아가는 모래시계 같았다. 위에 쌓인 모래가 아래에 쌓일 때쯤 다시 돌려놓고, 그럼 또다시 위의 모래가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

단유가 보기에 철규는 굉장히 높은 철탑 위에 사는 사람 같았다. 너무 높은 나머지 주위에 보이는 게 없다고나 할까. 굉장히 이기적이고 자아도취적인 감성을 가진 아이가 바로 백철규란 아이였다.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면서 어떤 식으로도 상대를 비하하거나 깔보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말이야?”

“그렇지. 난 그냥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야.”

“개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게 낫겠다는 말이?”

철규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긍정의 뜻을 밝혔다.

“당연하지.”

“태훈이가 너한테 개소리라고 표현한 것에는 비하의 의도가 있었다?”

“당연하지.”

“어떠한 의도도 가지지 않고 한마디만 하자.”

“뭐?”

“난 니가 굉장히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뉘앙스가 굉장히 부정적이다. 철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넌 너무 이기적이야.”

“뭐!”

“니가 이기적이라고 표현한 내 말이 널 모욕한 거야?”

“내가 뭐가 이기적인데? 내가 애들한테 얼마나 돈을 많이 쓰는데? 너도 내가 사준 피자 먹었잖아! 태훈이 너도! 그리고 매점에서 애들한테 사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내가 이기적이라고?”

“미안. 그 표현은 잘못된 것 같다. 사과할게.”

즉각 튀어나오는 단유의 사과. 철규가 잠시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단유가 곧 입을 열었다.

“넌 너무 자기중심적이야.”

철규가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대화하는 동안에도 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지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져. 만약 반박하고 싶다면 이 물음에 대해 반박해 주길 바란다.”

철규가 부들부들 떠는 사이 단유가 물음을 던졌다.

“니가 개소리나 듣는 게 낫겠다고 말했을 때, 태훈이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뭐?”

“너랑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태훈이가 어떤 감정이었을지 짐작하겠냐는 물음이야.”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물어본 거야. 니가 아는지 모르는지.”

철규는 조금 당혹스러운 느낌이었다.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내가, 저 새끼가, 무슨 감정인지를 내가 왜 알아야 하냐고!”

“왜 알아야 하는지가 아니고, 그냥 알려고 하면 알 수 있는 거야. 저 사람이 어떤 감정일까, 하는 건. 그게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거잖아.”

단유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철규와 눈을 마주했다.

“니가 모욕받는 걸 싫어하듯이, 다른 사람도 모욕받는 걸 싫어해. 당연하잖아? 니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듯이, 다른 사람도 인정받고 싶어 해. 똑같은 마음이라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대화를 하는 거지, 누군가와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넌 계속 이기기 위한 말만을 하고 있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하자는 것이지,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게 아니야. 그런데 넌 줄곧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또 태훈의 언사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만 입장을 내세울 뿐이니까 대화가 안 되는 거잖아. 그 말인즉슨, 니가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지. 오직 너의 기분만 중요하고, 너의 말만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할 뿐이지. 그러니까 니 말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는 거야.”

철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물음에 답만 하면 돼. 점심때나 지금이나 이야기를 하는 동안 태훈이 과연 어떤 감정일지, 니 생각을 말해 봐. 그러면 나도 내가 말한 것을 철회하고 사과할게.”

단유가 입을 다물고 철규를 바라보자,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초침 소리와 운동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무렵, 철규의 입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줄곧 들썩이던 태훈마저 얌전히 철규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철규는 그저 부릅뜬 눈으로 단유와 태훈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철규가 소리쳤다.

“개소리 집어쳐!”

철규는 뒤돌아 가방을 집어 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복도 너머로 뜀박질 소리가 멀어지더니 어느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제야 태훈이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아니, 그냥.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아무것도.”

단유라고 딱히 지금 이 상황을 좋게 만들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게 하는 데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대화가 비록 파투는 났지만, 두 사람이 칼이나 주먹으로 싸울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됐다.

왜냐하면.

“도망간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돌아오지 않더라고.”

철규는 도망을 갔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대답을 들고 오지 않는 한, 철규는 돌아오지 않는다.’

단유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자.”

태훈은 다소 어리둥절한 눈으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단유가 몸을 돌려 태훈을 붙잡았다.

“앞으로 교실에서 스피커로 음악을 트는 행위는 삼갔으면 좋겠어. 그건 분명 철규 말이 맞아. 공공시설에서의 예의니까 지켜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음악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자면, 난 사실 음악을 잘 몰라. 음악에 취미도 없고. 만약 언젠가 니가 듣는 음악에 대해 취미나 호기심이 생긴다면 꼭 너에게 물어볼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거 같아. 그러니까 부디 그 음악만큼은 거절할게.”

태훈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단유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후 태훈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고, 두 번 다시 스피커를 가지고 오는 일은 없었다. 또 록의 전도사 역할도 당분간 휴업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혼자가 되었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 지태나 채윤과 함께 단유 곁에서 수다를 떠는 무리로 끼어든 태훈은 눈치를 많이 보긴 해도 단유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부류에 속하게 되었다.

“오늘 날씨 좋다, 그치?”

“흐린데?”

“원래 흐린 날이 좋은 거야. 눈부시지도 않고, 시원하고 딱 좋잖아?”

“그래?”

“이런 날 들으면 딱 좋은 음악이 있는데 말이야.”

“그렇구나.”

“혹시···.”

“아니.”

“응.”

철규는 단유의 예상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의 무리 속에서 떠받들어지며 살고는 있지만, 마치 태훈이나 단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며 지냈다. 단유 근처로 오지도 않을뿐더러, 혹 가깝게 오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유가 이것을 불편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일이 줄어 다행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말 거는 사람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게 차라리 낫지. 게다가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말을 걸면 피곤하기만 하고, 그렇더라고.”

그 말에 명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그런 애들은 그냥 멀리하는 게 낫지. 돈 많다고 돈 지랄이나 해대면서 사람 깔보는 새, 애기들은 없는 듯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아.”

단유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물었다.

“넌 철규 만난 적 없잖아? 어떻게 아는 것처럼 그래?”

그러자 명수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석고야, 세상에 철규 같은 애가 한둘인 줄 알아? 니가 그동안 운이 좋아서 지금에야 그런 녀석을 만난 거지만, 형은 지금까지 그런 애들 수도 없이 만났다. 초등학교 때도 있었고, 지금 우리 반에도 그런 애들 있어.”

단유는 순간 명수가 낯설게 느껴졌다.

“너도 고생 많이 했나 보네?”

“고생? 많이 했지. 지금도 우리 반에 있는데 걸핏하면 막 돈 지랄을 해대는데, 어우, 눈꼴시려.”

“그래?”

“매점 갔다가 오면 맨날 맛있는 거 얼마나 많이 사오는지 알아? 진짜 내가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오는데, 아주 정말··· 먹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한 입 달라고 하기엔 쫀심이 상하고 말이야. 아우, 생각만 해도 배가 고프네.”

단유는 명수를 슬쩍 째려보다가 등을 한 차례 세게 내리쳤다.

“아야! 왜 그래!”

“앞으로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 게.”

“그러지 말고, 오늘 사러 가자.”

“오늘?”

명수가 음모를 꾸미는 악당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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