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30화 (230/956)

좀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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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철규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철규가 비록 칼을 들었다고 해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 봐.”

단유는 낮은 어조로 천천히 철규를 불렀다. 철규의 시선이 태훈에게서 단유로 옮겨질 때, 단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너랑 싸우기 싫어.”

“그럼 비켜, 임마!”

공격적인 철규의 폭언에도 단유는 흔들리지 않았다.

“니가 아까 그랬지? 혼자 쓰는 공간도 아닌 곳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철규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나도 니 말에 동의해. 교실은 다 함께 있는 곳이니까 서로서로 배려하면서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 아니었어? 내 생각에도 니 말은 맞아.”

단유의 등 뒤에서 태훈이 발끈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단유는 철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너와 충분히 대화가 가능할 거로 생각하는데? 대화로 상황을 풀 수 있을 정도로 넌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라고 말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영리하고 이성적인’이란 수식어는 그야말로 철규 본인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철규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어간 힘이 풀렸다.

“그래서?”

허나 아직은 경계의 끈을 놓지 않은 철규는 단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봐. 지금 교실에서 또다시 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단순히 처벌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거, 너도 알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철규는 처벌 이상의 큰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이야기하는 단유의 말을 무시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만약 큰일이 벌어지고 그것을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철규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지금의 일도 사실 서로가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 일일지도 몰라. 지금 서로가 잠시 흥분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조금씩 미루고 있지만, 어쩌면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는 일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 일의 본질을 생각해봐. 결국, 태훈이가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기 때문이잖아. 그럼 음악 소리를 줄이거나 아니면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이런 일로 괜한 감정싸움으로 몰고 가버리면 두 사람 모두에게 손해가 될 거야. 태훈이 너도 좀 진정하고.”

태훈은 단유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는데, 그 타이밍에 단유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너도 내 이야기를 들어. 침착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넌 단지 나한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거잖아? 음악을 들려주고 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였잖아.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돼버렸지만, 나중에 너랑 진지하게 이야기하도록 할게. 너랑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려 했던 내 잘못도 있으니까 말이야.”

단유가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자 태훈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분명 지금 자신의 화를 돋운 것은 단유가 아닌 철규였다. 철규가 자신을 무시하는,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선물해준 소중한 시디플레이어를 무시하는 말을 뱉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사과는 단유가 하고 있고, 게다가 자신과 진지하게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약속하니 태훈으로서도 딱히 무턱대고 화를 내기가 곤란해져 버렸다.

단유는 다시 철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너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그리고 아까 처음 태훈이한테 와서 했던 이야기도 생각해보면, 넌 분명히 이성적이고 사리분별이 정확한 사람이라는 게 내 판단이야.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고. 그렇지?”

철규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좋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싸움을 일으킬 이유도 없어. 물론 내가 말 몇 마디 한다고 니 화가 다 풀리진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은 조금 진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너도 그렇고, 태훈이도 그렇고 지금은 서로가 많이 힘드니까 잠시 떨어져 있다가, 나중에 수업 끝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그리고 그때는 차분하게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대화를 풀어나가 보자고. 원래 그게 네가 하려던 거 아냐?”

대화로 풀려는 생각이 있었던가, 라는 물음이 잠깐 스쳐 갔지만, 철규는 그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이 원했던 방식이라고 인정했다.

“맞아. 그게 내 방식이야.”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점심시간도 거의 끝날 때가 다 되었으니까, 너도 쉬어야겠지? 자리로 돌아가서 잠시 쉬는 게 어때? 그리고 수업 끝나고 보자. 그때는 나도 같이 자리해서 니 이야기를 들어줄게.”

“···그래, 알았어.”

철규도 살짝 눈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는 단유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너무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감정 소비를 한 탓인지 피곤하기도 했으니까.

“김태훈. 너 나중에 보자.”

그래도 아직은 태훈에 대한 앙금이 남았는지, 끝내 시비조의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서는 철규였다. 다시 발끈하는 태훈은 남들 모르게 자신의 상의를 살짝 쥐어 잡는 단유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단유의 놀라운 말재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철규가 듣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티는 못 내지만, 흥분해서 칼까지 든 아이를 말로서 달래는 단유의 모습이 가히 솔로몬급이라 생각했다.

철규가 자기 무리 애들과 자리로 돌아간 뒤, 아이들끼리 속삭였다.

“대단하지 않냐? 말로 어르고 달래고?”

“나 입 벌리고 봤다. 완전 말빨이··· 와!”

“철규 표정 봤어?”

“칭찬 몇 마디 했다고 금방 얼굴 풀리는 거? 완전 대박. 나 무슨 드라마 보는 줄. 표정이 개쩔.”

그 뒤로 아이들은 점심시간 동안 밖에 나가 있느라 전혀 사정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단유의 새로운 능력을 영접한 목격담을 전하느라 바빴다.

****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어?”

진이 빠져 기력이 바닥난 것은 단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조그만 커터칼이라고 해도 칼이었다. 찔리면 상처가 나고, 베이면 갈라지는 것은 다른 칼과 마찬가지였으니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다행히 사태가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었지, 사실 위험천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겁 많이 났어.”

“거짓말.”

지태와 채윤은 단유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단유는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고, 드르륵거리며 칼날을 삐죽이 드러낸 커터칼 앞에서 한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던 ‘철인’이었다.

단유는 괜히 자기를 치켜세우는 듯한 두 사람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돌렸다. 5교시가 마친 후, 교실 안에 있기가 부담스러워 운동장 근처 벤치로 나온 참이었다. 학교 담벼락을 따라 푸른 수목들이 울창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계절이었다. 벤치에 앉아있으면 자장가 같은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에 절로 눈이 감기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철규는 왜 갑자기 화를 낸 거지?”

채윤이 물음을 던졌지만, 단유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답은 지태에게서 나왔다.

“글쎄다. 나도 좀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긴 하던데. 혹시 정신병 같은 거 있는 거 아냐? 급성흥분증 이런 거?”

“그게 뭐야?”

“아니, 그냥 지어낸 말인데, 왠지 그런 이름의 병이 있을 거 같아서.”

그 말에 채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지태를 바라보았다.

“좀 야시시한 표현 같은데? 너 몰래 밤에 뭐 보는 거 아냐?”

금방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지태가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야. 우리 집에서 그런 거 못 하거든? 컴퓨터가 거실에 있는 데다가 할아버지가 항상 거실에 계셔서 보고 싶어도 못 본다.”

“보고 싶긴 한가 보네?”

“당연히 보고 싶지. 사내로 태어나 야동 한 번은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냐?”

“오버하기는···.”

단유가 생각해도 철규의 분노는 사실 뜬금없긴 했다. 정확히 어떤 포인트에서 철규가 화가 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를 알아야 확실히 중재할 수 있을 텐데, 이를 모르면 나중에 대화하다가도 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재현될지도 몰랐다.

“자기 분을 못 이겨서 화를 낸 거 같긴 한데···.”

단유의 중얼거림에 한참 야동 얘기로 꽃을 피우던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아까 그랬잖아? 말 함부로 한다고. 그런데 어떤 말이 그렇게 사람을 순식간에 바꾸게 했을까,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단 말이지.”

지태가 가만 생각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화를 낸 건 아닐까?”

채윤이 반론을 펼쳤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갑자기 막 화를 내면서, 칼까지 집어 든다고? 화가 난다고 앞뒤 안 가리고 칼을 집어 드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나?”

“너무 화가 많이 나서 눈이 확 뒤집힌 거 아냐?”

“야, 무슨 애도 아니고. 화가 난다고 칼 휘두르는 게 말이 되냐?”

지태가 그 말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 반대였다.

“그렇지. 그런데 가끔 뉴스 보면 그런 사람들 나오잖아. 화가 나서 친구 찔렀다는 사람도 있고, 가족을 찔렀다는 사람도 있고.”

“그건 정신병 있는 사람들 얘기지. 우울증이나 뭐 그런 거.”

“혹시 알아? 철규도 그런 병이 있는지.”

“어? 그럼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혹시라도 나중에 걔 미쳐서 막 칼 휘두르고 그러면 더 큰 일인 거잖아?”

지태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거 되게 위험한 거 같은데? 선생님께 이야기해야 하나?”

반장으로서, 교실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에 미리 대비하는 차원에서 선생님께 ‘고자질’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지태였다.

“오버하지 말고. 조금 있다가 직접 물어보면 되지.”

단유의 말에 지태가 돌아보았다.

“뭘? 철규한테? 정신병 있는지 물어본다고? 안 돼. 그러다 진짜 큰일 나면 어쩌려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무슨 정신병이야? 그냥 왜 화를 냈었는지, 어떤 게 그렇게 화가 났던 일인지 물어보겠다는 거야.”

지태와 채윤이 걱정 반, 두려움 반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을 때 스피커에서 알림 벨 소리가 들렸다.

“가자, 수업종 쳤네.”

단유가 무릎을 곧게 펴고 교실로 향했다. 그 뒤를 어미 새 쫓는 새끼들처럼 두 사람이 졸졸 따라갔다.

****

수업이 끝난 후, 단유와 태훈, 그리고 철규는 미리 말한 대로 대화를 위해 교실에 남았다. 철규와 함께 하는 아이들이 함께 자리하려 했지만, 세 사람만 차분히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단유의 의견을 다른 두 사람이 동의하면서 교실에 세 사람만 남았다.

“오래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야. 난 사과만 받으면 돼.”

쿨하게 자신의 제안을 먼저 밝힌 것은 철규였다.

“무슨 사과? 사과를 받으려면 내가 받아야 하는 거 아냐?”

태훈은 철규의 뻔뻔함에 화가 난다는 듯, 몸을 들썩였지만 단유의 제지로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야만 했다.

“니가 무슨 사과를 받아? 넌 누가 봐도 잘못했잖아? 단유도 아까 이야기했지? 교실에서 떠드는 건 잘못된 거라고. 니가 잘못을 했고, 거기에 대해 내가 지적을 한 것 뿐인데 내가 무슨 사과를 해?”

단유는 일단 철규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태훈을 대신해 철규에게 물었다.

“넌 어떤 사과를 듣고 싶은 건데?”

“나? 아까 저 새끼가 나 모욕하는 거 못 봤어? 나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모욕당해본 적 없는 사람이야. 아 놔,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진정하고. 잠깐만.”

단유는 얼른 철규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였다. 철규의 눈에 금방 핏줄이 서는 듯해서 불안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오고가서 정확히 어떤 점이 널 모욕했는지, 어떤 점이 불쾌했는지를 정확하게 짚어주지 않으면 또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그러니까, 분명하게 말해줄래?”

철규는 태훈을 노려보며 단유의 물음에 답했다.

“저 새끼가 나한테 개소리라고 하는 거 들었지? 지 잘못한 건 인정 안 하고 나한테 개소리니 뭐니 막말하는 거 들었잖아!”

진술(?)하는 동안 점점 격앙되어 가는 철규였다. 단유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철규에게 말을 걸었다.

“알았어. 니 말의 요지는 태훈이가 널 모욕했다는 거지?”

“그래!”

“그 전에 니가 먼저 나한테 개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라니 CDP가 고물이라느니 하면서 막말했잖아, 새끼야!”

단유가 제지하기도 전에 태훈이 반박을 했고, 철규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새끼가!”

“그만!”

단유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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