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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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로 의기소침해진 태훈의 전도행위는 그렇게 끝나나 싶었다. 그러나 태훈은 그리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거 한 번 들어볼래?”
태훈이 눈을 반짝이며 작은 스피커를 들이밀었다. 단유가 살짝 당황해하는 사이, 태훈의 스피커에서 지난번보다는 조금 약하지만, 여전히 쟁쟁거리는 기타 사운드와 숨 가쁘게 달리는 드럼 소리가 뒤범벅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가 지난번에는 너무 강한 걸 들려줘서 그래. 사실 요즘 빠르고 강한 음악을 선호하다 보니 그랬는데, 처음 입문할 때는 이 정도가 적당할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확실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말하지만, 이건 내 스타일이 아냐.”
단호한 단유의 대답으로 태훈이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면, 그건 태훈의 전도 의지를 얕봤던 것이었다.
“아냐, 듣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이게 90년대 초반에 나온 건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멜로디인 데다가 귀에 쏙쏙 박히는 기타 리프가 매력적인 노래거든? 끝까지 한 번만 들어봐. 아마 나중에 계속 듣고 싶어질걸?”
LA메탈이니, 펑크록의 연장이라느니, 리드 기타의 솔로가 뛰어난 곡이라느니 해도 단유에게는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다만 확실히 지난번처럼 귀를 고문하는 형태의 음악은 아니었고, 인내심을 가지고 들을만한 곡이긴 했다.
“I know it's hard to keep an open heart // When even friends seem out to harm you // But if you could heal a broken heart // Wouldn't time be out to charm you”
(친구들조차 당신에게 상처를 줄 때 마음을 열고 있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다면 시간이 당신의 고통을 덜어줄 거예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이 함께 나오며 음악에 풍성함을 더하는 곡, 이라는 태훈의 설명을 들으며 곡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대략 9분 가까이 되는 긴 곡이 끝난 후, 태훈이 물었다.
“어때?”
감상을 묻는 태훈의 말에 단유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이건 들을만하네.”
태훈은 이를 활짝 드러내 보였다.
“그치? 괜찮지? 사실 록이라는 게 알고 보면 꽤 좋은 음악이라니까? 이런 노래 괜찮지? 비슷한 음악도 들려줄까?”
신이 난 태훈이 가방을 뒤적거려 또 다른 시디를 찾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가방에 얼마나 많은 시디가 들어가 있는 것일까? 교과서는 안 들고 다니나? 무겁지 않을까?
그때, 일단의 무리가 태훈과 단유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태훈이 이를 깨달았을 때, 그 무리의 가장 앞에 선 소년이 눈썹을 치켜세운 채 태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당히 좀 해라. 여기가 너 혼자 쓰는 공간도 아니고 왜 시끄럽게 떠들어? 공중도덕이 뭔지 몰라?”
태훈을 향해 독설을 날린 사람은 다름 아닌 철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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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규는 학기 초 광종과 민일의 싸움 이후, 잠잠하던 교실에서 한 무리의 리더로 등극한 이였다. 사실 무리라고 해봐야 7명 정도의 아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수준이었지만.
철규의 등장은 그다지 극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거한 환영식을 펼치며 두각을 드러냈다.
3월 말의 어느 날, 아직 서로에 대해 낯섦이 가시지 않은 때였다. 점심시간에 맞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피자 배달부였다.
“피자 시키신 분?”
무려 20판의 라지 사이즈 피자가 교실로 배달이 되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이들이 어리둥절할 때, 교실 앞으로 나선 이가 바로 철규였다.
“내가 시켰다.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잘 지내보자는 인사 차원에서 시킨 거니까 맛있게 먹길 바란다.”
두 사람당 피자 한 판씩이 주어졌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뇌물이니까 맛있게들 먹고 앞으로 일 년간 친하게 지내보자.”
익살맞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철규는, 그 이후로도 종종 지갑을 열었고 곧 아이들에게 ‘큰 손’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하였다. 돈을 쓰는 데 아낌이 없었고, 가끔 친구들과 피시방을 갈 때도 자기가 모든 계산을 다 하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였다.
한 친구가 너무 미안해하자, 그런 걱정은 접어두라며 웃음을 터뜨리는 철규였다.
“나 돈 많아. 집에 가진 게 돈밖에 없어.”
얄미울 수도 있지만, 헤프게 돈을 쓰는 스타일이라기보단 써야 할 때 통 크게 쓰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의 반감도 크진 않았다.
“친구들에게 돈 쓰는 걸 아끼지 말라고 하셨어, 우리 아버지가.”
우정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듯한 철규의 발언은 그의 ‘대인배’ 이미지를 한층 더 키웠고, 마침내 철규는 1학년 3반에서 나름 리더십을 가진 우두머리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반장인 지태가 공식적인 직급을 맡아 반을 이끈다면, 철규는 가장 현실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돈으로 마음을 얻는 행위를 통해 아이들의 신임을 끌어낸 것이다.
반의 운영에 대해서는 철저히 지태의 리더십에 따르지만, 사소한 다툼이나 불만들에 대해서는 철규가 나서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이날, 급식을 먹고 교실로 돌아왔다가 소란스러운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태훈을 목격한 철규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 아이들을 대신하여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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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태훈은 아직 철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이상한 음악이나 들고 와서 주위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란 말이야.”
“이상한 음악 아냐. 이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대 명반이야!”
“인정은 개뿔. 정신 사납게 만드는 음악도 음악이냐? 차라리 개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게 낫겠네.”
록음악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태훈에게 철규의 말은 참고 넘기기 힘든 것이었다.
“야! 너 뭔데? 뭔데 개소리니 뭐니 하는데? 개소리는 니 말이 개소리다!”
“뭐? 이 새끼가 미쳤나? 개소리?”
철규는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너야, 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며 태훈을 바라보는 철규였다.
“이 개새끼가···. 와, 나, 어이없네. 병신, 찐따 같은 새끼가 말 졸라 함부로 하네? 엿 같은 고물 CDP나 들고 다니는 주제에 말이야. 개 같은 새끼, 아니, 개만도 못한 새끼가 좋게 말하니까 아주 내가 만만하지, 응?”
태훈은 이보다 커질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철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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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훈아, 어떠냐? 좋지?”
태훈의 아버지가 이를 드러내며 아들의 반응을 살폈다. 초등학교 1학년인 태훈이 머리를 까닥이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태훈의 아버지는 젊었을 적부터 광적으로 록을 좋아하는 이였다. 소위 빽판이라고 부르는 불법복제 레코드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돌아다닐 정도였고, 특히 이 시기 구했던 오지 오스본의 ‘Diary of a madman’은 아버지의 보물 1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교 음악을 록으로 할 정도로 광적이었던 아버지 아래에서 록 음악을 듣고 자란 태훈이 록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자, 선물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선물이라는 명분으로 태훈에게 시디플레이어를 선물했다. 태훈이 오랫동안 탐내던 아버지의 보물 2호였다. 오랫동안 돈을 모아서 산, 그 당시로써는 최고급 기술과 품질을 갖춘 뛰어난 플레이어라고 자랑하신 제품이었다. 따지고 보면 무손실 음원을 재생하는 최근의 MP3 플레이어가 더 좋을 수 있겠지만, 태훈은 집 안 가득 쌓인 시디들을 들을 수 있는 이 시디플레이어가 훨씬 좋았고, 그래서 오래도록 탐내던 물건이었다.
“니가 공부 안 하고 놀았으면 안 줄려고 그랬어, 임마.”
아버지는 특유의 이를 드러내는 웃음을 지으면서 시디플레이어를 받고 기뻐하는 태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거나 말거나 태훈은 시디플레이어를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시디플레이어를 눈앞의 인간이 고물이라고 무시했다. 태훈은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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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규가 드물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생경하다는 얼굴을 하고 철규를 바라보는데, 단유는 철규보다 태훈이 더 걱정스러웠다. 철규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태훈의 무릎 위에 올려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끼, 눈 안 깔아? 사람이 만만하고 좋은 말만 하니까 귓구멍에 아무것도 안 들리지? 듣지도 못할 귓구멍 찢어서 개나 줘, 이 씨발 놈아.”
이마에 핏줄이 드러나도록 으르렁대는 철규는 상처 입은 야수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태훈도 다를 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철규와 머리를 맞대는 태훈.
“내가 싸울 줄 몰라서 가만있는 줄 알아, 이 새끼야?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이 씨발놈아. 돈 많다고 사람 깔보는 거야, 이 개새끼야? 존만한 새끼야?”
태훈의 기함에 갑자기 철규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하얀 침을 튀기며 소리를 버럭 지르는 철규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놀랬다. 하지만 얼굴에 침이 닿는데도 피하지 않고 철규를 노려볼 뿐인 태훈이었다.
“아, 씨발. 진짜 자존심 상하네. 이 뭣 같은 거지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씹새야, 뒤질래?”
철규가 태훈의 멱살을 붙잡자, 태훈 역시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태훈이 자신의 멱살을 잡았다는 게 도저히 참기 힘든 모욕을 받은 것인 양, 얼굴이 붉어진 철규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어느새 일어선 단유의 손에 제지당했다. 철규의 손목을 붙잡은 단유는 뒤이어 철규의 멱살을 잡은 태훈의 손목까지 붙잡아 멱살을 풀게 하였다.
그 둘을 강제로 떨어뜨린 뒤에야 주변의 아이들이 뒤따라 철규를 감싸고 말리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참으라며, 붙잡고 말리는 아이들에 의해 강제로 뒤로 밀려난 철규를 바라보던 태훈이 욱하는 심정으로 달려들려는데 단유가 다시 태훈을 뒤로 밀었다.
“그만해라, 너도.”
“뭘 그만해, 새끼야!”
단유는 태훈의 거친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싸움 때문에 난리 난 게 언제라고 또 이래? 이번에 싸움 일으키면 절대 지난번처럼 조용히 지나갈 리 없는 거 알잖아. 진정해라.”
씩씩거리며 움찔대는 것은 철규도 마찬가지였다.
“놔, 놓으라고! 저 새끼 오늘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인다고!”
철규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옆에서 말리는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릴 정도였는데, 단유가 그런 철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백철규. 너도 진정해라. 서로 오해가 있으면 대화로 풀어.”
“오해는 무슨 오해야! 저 새끼가 나한테 하는 말 못 들었어? 못 들었냐고? 너도 같은 편이야, 새끼야?”
“같은 반인데 편은 무슨 편이야. 진정하고 말로 해.”
철규는 단유와 대화를 하기 싫었다. 아니, 지금은 누구와도 대화하기 싫었다.
“놔.”
철규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아이에게 명령했다.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팔을 놓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지금 싸움이 나면 결코 좋은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규는 더욱 단호하고 분명하게 의지를 드러냈다.
“놓으라고, 새끼야. 확 죽여버리기 전에.”
철규가 눈을 부라리자, 아이는 철규의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철규가 평소와 다르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고 욕을 한다고 쳐도, 일단은 소중한 ‘물주’였으니까 그의 말을 어길 수 없었다. 반대 팔을 잡고 있던 아이도 다를 바 없어, 철규를 놓아주었다. 철규는 팔을 한 차례 털고는 태훈에게 다가왔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가오는 철규의 눈에는 이성이 보이지 않았다. 다가오던 중 옆에 놓인 책상을 손으로 대충 훑어 아무거나 집어 올렸는데, 마침 커터칼이 잡혔다. 야무지게 커터칼을 잡은 철규는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태훈을 향해 다가갔다.
“씨발 새끼가···.”
단유는 그 앞을 막았다. 뒤에서 나서려는 태훈을 등으로 막으며 철규를 바라보았다.
“비켜.”
단유는 입을 꾹 다물고 철규를 바라보았다. 삼 일 굶은 닭이 저럴까? 붉은 닭 볏만큼이나 붉은 얼굴을 하고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눈은 단유의 뒤에 있는 태훈을 향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비켜라. 안 봐준다.”
“철규야.”
“닥쳐! ···상관하지 마라.”
철규의 뒤에서 누가 말리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 철규의 고함에 밀려 입을 다물어야 했다.
“두 번 말 안 한다. 비켜라.”
그러나 단유는 오히려 뒤에서 버둥거리는 태훈이 뛰쳐나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데 더 힘을 쓸 뿐이었다. 이를 꽉 깨문 철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