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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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3반은 총인원이 40명에 이른다. 그래서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대부분 아이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을 외우는 것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 등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특히 단유는 그 특유의 조심성 혹은 경계심 때문에 여러 사람과 친하게 지내려는 성격이 아니었던지라 아직도 잘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경준이었다.
사실 경준이는 단유의 시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단유는 창가 쪽 1분단의 가장 뒷자리였고, 경준이는 4분단의 3번째 줄에 앉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니가 보기에 어때?”
일전에 단유가 축구 지식을 뽐냈던 것을 기억하는 지태가 단유의 식견을 테스트하려는지 경준에 대해 물었다. 잠시간 바라보니, 나쁘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좋다고 말하기엔 모호한 점이 있었다.
“공을 많이 차던 애는 아닌가 보네. 그런데 달리기가 빠르고 운동신경이 좋아서 공을 잘 다루는 거야.”
달리기 실력만으로 보자면 레프트 윙에 어울릴 것 같은 경준이었다. 게다가 드물게 왼발을 잘 쓰는 아이였기에 왼쪽에서 밀고 올라간다면 어지간해선 막기 힘들 것 같았다. 물론 반 대항 시합 정도의 수준에서 말이다.
“그런 거야? 니 말을 들어서 그런지 빠른 것 같긴 하네.”
지켜보니 또 하나 짚을 부분이 보였다. 바로 공간 장악력. 경준은 공과 사람이 밀집되는 지역은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몸싸움이 약하거나 아니면 몸싸움을 피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대신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튀어나올 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경준이 자리 잡는 곳으로 공이 흘러나왔다.
“와아!”
경준이 공을 차고 달리자, 이를 막기 위해 7반의 아이들이 경준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경준의 달리기는 다른 아이들보다 2발은 더 앞서는 것처럼 보였다. 공을 멀리 차 보내고 그 뒤를 쫓는 방식은 스피드가 느리면 무소용이지만, 경준에게는 유용한 드리블 방식이었다.
경준이 중앙선을 넘어 상대편 골대 근처로 다가가자, 3반 응원석의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뒤에서 지켜보던 담임선생님까지 주먹을 불끈 쥘 정도였다.
“잘 달리네.”
최전방에 있던 명수까지 수비를 위해 되돌아왔다. 거리 차이가 있었다지만 그래도 달리기가 느리지 않은 명수였는데,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윽고 상대편 골대 앞에 골키퍼와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비수 한 명만이 달려가는 경준 앞에 버티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흐르던 공을 먼저 잡아챈 경준이 망부석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공이 멈춘 순간을 노린 거였는지, 망부석이 다리를 뻗어 공을 뺏으려 했다. 그 순간, 경준은 왼발 바깥쪽으로 공을 밀어 망부석의 스틸을 피했다. 곧 망부석을 지나친 경준은 골키퍼와 1:1이 되었고, 그때 경준은 기합을 넣었다.
그 순간 경준이 외친 기합성은 모두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어쩌면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고 단유는 짐작했다.
왼발로 공을 컨트롤하여 앞으로 살짝 구르게 만든 경준은 디딤발을 디디며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개씨밥바 레알트루 슛!”
왼발을 힘껏 뻗어 공의 가운데를 정확하게 찬 슛은 곧게 뻗어 나갔다. 날카로운 창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간 슛은 정확하게 골키퍼의 가슴을 쳤다. 너무 빨라서 골키퍼가 잡지도 못할 정도였다. 가슴에 맞고 튀어나온 공은 뒤를 따라오던 망부석이 옆으로 걷어내며 공격이 마무리되었다.
고요해진 응원석의 앞자리에서 채윤이 지태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뜻이야?”
지태는 고개를 저었다. 단유를 바라보니, 단유 역시 황당한 얼굴로 경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단유는 잠시 자신의 귀에 들렸던 소리를 해독하려 애써봤다. 어지간한 외국어는 모두 해석이 될 텐데, 신기하게도 해석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나중에 직접 물어봐.”
모르면 물어보는 게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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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혹은 위험이 될 만한 아이들을 주시하는 정도였는데, 점점 지내다 보니 이 좁은 교실 안에 정말 다양한 군상이 모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레, 매점 가자.”
이제 반에서 경준이를 이름으로 부르는 아이는 없어졌다. 모두들 ‘개레’라고 불렀고, 격렬히 저항하던 경준이도 이제는 지쳤는지 ‘개레’라고 부르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며 ‘왜’라고 대답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이후부터 개레는 종종 이해하기 힘든 단어를 내뱉곤 했는데, 보통은 뭔가 답답하고 분이 안 풀릴 때 욕 대신 쓰는 말처럼 보였다.
“그게 욕 아냐?”
채윤이 갸우뚱거리며 묻자, 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욕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들어도 별로 기분 안 나쁜 욕?”
“기분이 안 나쁜 게 아니라, 그냥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 거겠지.”
게다가 경준은 사람을 향해서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청소시간에 청소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계단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할 때 소리를 질렀다.
“쑝트라무스 니믈렛!”
점점 발전하는 것은 덤이었다.
****
경준이 말고도 두고 보면 재밌는 아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어떤 아이는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트에 낙서를 했다. 수업시간에는 단유 못지않게 침묵을 지키며 존재감을 지웠는데, 쉬는 시간마저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아 주의하여 보지 않는다면 있는 줄도 모를 아이였다.
그 아이가 단유의 눈에 띄게 된 이유는 단지 단유의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단지 앞에 앉은 이유 때문이라면 단유는 그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정확히는 단유가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한다는 사실을 교실 전체가 알게 된 이후의 어느 날, 존재감이 없던 존재가 뒤를 돌아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단유야, 물어볼 게 있는데.”
단유는 말하는 마네킹을 보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의 간절함에 정신을 차렸다.
“뭔데?”
“너 영어 잘하지? 영어 좀 해석해 줄래?”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의 부탁을 허락했다.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노트를 꺼내든 마네킹, 아니 태훈이 노트를 펼쳐 보였다. 노트에는 비뚤비뚤한 영어 가사로 채워져 있었고, 여백에는 기괴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쳐다보는 것을 알았는지, 태훈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냥 낙서야.”
낙서라기엔 디테일하다. 그런데 잘 그렸다고 칭찬하기엔 그림이 너무···.
“그로테스크하지?”
단유는 적당한 표현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연필로 명암을 새긴 해골이 혀를 빼물고 있는 모습이 꽤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기어 다니는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의 오른팔에는 잘려나간 다리 한쪽이 들려져 있었다. 그림의 대부분은 기어다니거나, 절단되거나, 절단되기 직전이거나, 절단하는 중인 그림들이었다.
“아무튼, 이것 좀 해석해줘.”
단유는 노래 가사라고 지칭된 글의 첫 줄을 읽었다.
“Scurrilous, wide spread death(비열함, 넓게 퍼진 죽음) Punitive, stagnant mess(전복, 정체된 혼란). 이게 노래 가사라고?”
태훈은 중간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그냥 단어라서 대충 이해가 가는데, 여기는 잘 모르겠어.”
태훈이 짚은 부분을 읽는 단유의 눈이 절로 좁혀졌다.
“The act of mudering so empowering / Exact number of dead will be unkown / Intact corpse are few and far between(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살인 행위 /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다. / 훼손되지 않은 시체는 거의 없고 멀리 떨어져 있다)
단유가 입 밖으로 꺼내기가 내키지 않는 문장을 읊어주자, 태훈이 보기 드문 미소를 띠며 고마워했다.
“고마워. 종종 부탁할게.”
부디 부탁하지 말란 말을 전하기도 전에 몸을 돌리고 귀에 이어폰을 꽂는 태훈이었다. 그제야 태훈이 듣는 음악의 실체를 알게 된 단유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거 아냐?”
어쩌면 저 멀리 입 다물고 있는 광종보다, 눈앞의 태훈이 더 위험한 인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가져보는 단유였다.
그 이후 단유는 태훈 덕분에 영어공부를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 즐겁지 않았지만, 태훈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상대하던 단유는 원치 않은 단어들과 수사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몇 번의 문답 이후, 태훈은 단유를 가깝게 여기는지 종종 대화를 시도했다.
“이 가사는 정말 의미심장해. 아마 굉장히 감성적인 순간에 툭 튀어나온 가사이지 싶어. 결코, 머리로 만들어낼 수 없는 가사라고.”
단유는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며 태훈이 감탄하던 글을 읽어보았다.
“You spoon fed us Saturday morning mouthfuls of maggots and lies(토요일 아침, 너는 우리에게 구더기와 거짓말을 숟가락 가득 담아 먹였다).”
진심이냐고 묻지 않았다.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어야 이 대화가 끝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태훈은 지치지 않게 쉬는 시간 내내 그 노래를 부른 가수를 찬양했다.
“조심해. 사실 다른 아이들이 쟤한테 안 붙는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어.”
태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태훈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채윤이 다가와서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단유는 몰랐지만, 이미 학기 초에 태훈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채윤이었다.
“지태가 반장이라서 공부를 잘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지태한테 가사를 묻더니, 그다음부터 자기가 듣는 음악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솔직히···취향에 안 맞으면 좀 그렇잖아? 그런데 너무···.”
“열정적이라고?”
대충 단유가 순화된 단어로 표현해주자 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열정적이어서 지태도 질려 했거든. 그런데 그거 빼고는 애가 나쁜 애는 아니라서, 또 막말하기가 그래. 그래서 지태가 먼저 피하기 시작했지.”
단유는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채윤을 바라보았다.
“혹시 지태랑 너랑 쉬는 시간마다 내 뒤로 와서 수다 떨던 이유가 그거야?”
“···어. 솔직히 우리 반에서 니가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이미지였으니까, 우리가 여기 있으면 태훈이도 우리한테 말을 잘 안 걸 거 같았거든.”
그리고 그 노력이 빛을 본 건지, 쉬는 시간에 말을 잘 걸지 않게 된 태훈이었다. 대신 태훈의 사냥감(?), 아니 태훈의 제물(?), 아무튼 뭐 그런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단유라는 이야기였다.
채윤이 볼을 긁적이다가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으니까, 잘 부탁해.”
마침 자리를 피했던 태훈이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단유야, 나 좋은 거 하나 구했는데, 같이 들어보지 않을래?”
‘니가 좋다는 게 어떤 의미로 좋은 건지 알기가 두렵다.’ 는 게 단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단유의 눈치를 보던 태훈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왜 눈치를 보는 건데?’
가방에서 시디플레이어를 조심스럽게 꺼내들고,
‘무슨 폭약 다루듯 하는 거야?’
이어폰 대신 소형 스피커를 꽂았다.
“야, 그거···.”
단유가 말리기도 전에 태훈이 씩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그 날, 단유는 신세계를 접했다. 언제나 배움에 한계가 없고 알면 알수록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단유의 기준이 흔들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개레, 아니 경준이 새로운 욕, 아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낸 날이었다.
“야 이 씹탱자 너구리 세 마리야!”
태훈에게 외친 걸까,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를 뱉어대는 스피커에게 외친 걸까?
아무튼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교실에서 벌어진 소란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태훈은 의기소침하게 지내야 했다. 단유로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