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27화 (227/956)

좀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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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눈을 떴을 때는 이제 막 새벽 안개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에 늘어지게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여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아니면 대도시의 열기 때문인지 안개의 생명력은 인평시에 있을 때보다 못했다. 거실 창밖으로 복잡하게 얽힌 건물들 사이로 가라앉고 있던 안개를 보던 단유가 푸른 색 바람막이의 지퍼를 올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컹.

단유의 부지런함 때문에 눈을 뜬 호빵이 단유의 발밑에서 코를 킁킁대며 졸졸 따라왔다.

“너도 더 자.”

단유는 호빵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뒤, 소리 나지 않게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을 닫기 전, 현관 안쪽에 선 호빵이 젖은 눈으로 단유를 배웅하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눈웃음으로 인사를 보내고 단유는 집을 나왔다.

오피스텔 건물을 벗어나니 상쾌한 공기가 단유를 포장하려는 듯 둘러쌌다. 언제나와 같이 힘껏 공기를 빨아당기니 폐 속으로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쌓였던 온갖 불순한 것들이 순식간에 압착되고 분해되어 사라져갔다. 이 기분을 느끼기 위해 이 시간에 나서는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천천히 다리에 힘을 주고 뛰기 시작했다. 뛴다, 고 했지만, 걷는 것보단 빠르게, 전력 질주를 위한 예비 운동 겸으로 천천히 달렸다. 서서히 예열되어가는 다리와 심장의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동시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말 못하는 식물부터 먼바다를 누비는 대형생물들까지, 모두 호흡을 한다.”

디아트리는 호흡의 깊이를 알려주며 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호흡을 제대로 하게 되면, 너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디아트리를 비롯한 구도자(지톤)들은 ‘통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었다. 자신을 통제해야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던 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최근 동양 철학―주로 논어에 한정되어 있긴 했지만―서적들을 탐독하며 두 종류의 철학 사이에 묘한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발전된 두 학문의 사이에 발견된 공통점은 흥미롭기만 할 뿐 아니라, 단유 개인의 공부에 힌트가 되어 주었다.

“후우, 흡.”

호흡을 조절하여 폐 속에 신선한 공기가 최대한 많이, 그리고 최대한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조절하며 뜀박질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뛰다 보니 어느새 근린공원에 오르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황토가 살짝 덮인 나무 계단 주위로 살짝 이슬을 머금어 촉촉해 보이는 사철채송화가 선명한 자줏빛을 뽐내고 있었다.

톡톡 리드미컬하게 계단을 밟으며 뛰어 올라간 단유는 마침내 공원 초입에 다다라 크게 기지개를 필 수 있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단유보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들이 없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 왔니?”

공원의 가장 좋은 목, 돋을양지 주변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이른 햇볕을 쬐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단유의 인사를 받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자주 만나다 보니 어느새 인사를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다만 단유가 워낙 숫기가 없는 데다 먼저 말을 건네는 넉살도 없어, 두 사람 사이에는 첫인사가 끝인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단유는 공원 안쪽으로 천천히 뛰어갔다. 계단을 뛰어오르며 잠시 흐트러졌던 호흡을 다듬는 시간이고 또 본격적으로 운동하기 전 몸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본격적인 운동은 공원 안쪽에 있는 체육시설에 도달한 이후부터니까.

“안녕하세요?”

무릎이 살짝 늘어난 회색 츄리닝을 입고 트위스트 운동기구 위에 올라서서 좌우로 몸을 돌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단유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냐, 어여 와.”

“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단유는 근처의 철봉으로 갔다. 풀업(Pull up), 소위 턱걸이라고 부르는 운동부터 하는 이유는 가장 가까운데 있는 기구였기 때문이다.

“이야, 볼수록 대단하네, 그려.”

허리를 돌리며 몸을 풀던 할아버지의 감탄사에 마주 보고 허리를 돌리고 있던 할머니도 시선을 돌려 단유의 운동을 감상했다.

“역시 젊으니께 저리 하는 것이제. 영감은 젊었을 적에 저리 했소?”

“저리만 했겠는가? 더한 것도 했지.”

“뭘 했는디?”

“보시오, 내가 소싯적에 쌀 세 가마니는 가볍게 들던 몸이었다고.”

“꼴랑?”

할머니가 비웃듯 이를 드러내자, 할아버지가 발끈했다.

“에헤, 이 사람 보게? 두 가마면 90㎏고 세 가마면 150㎏이여?”

따져보면 이상한 셈법이지만, 그걸 계산하고 있을 할머니는 아니었고, 설령 계산했다 쳐도 따지고 들 마음이 없었다.

“그럼 뭐 혀, 지금은 밥상도 지 손으로 못 드는데?”

“뭔 소리야, 그게?”

“언제까지 늙은 마누라 수발들 생각이냐고 타박하는 중이유.”

할머니의 투정이 재밌다는 듯 할아버지는 콜록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단유는 이미 다른 운동으로 넘어갔기에 더 이상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단유는 그런 만담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새벽 공원만의 여유가 좋았다.

어느덧 근력운동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다. 휴식을 갖지 않고 계속 운동을 이어나가는 고강도 트레이닝법이었지만, 익숙해진 단유는 언제나와 같이 운동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조금씩 개수를 늘리는 식으로 운동 강도를 더해갔지만, 그날의 목표량은 반드시 채우는 단유였다.

근력운동을 끝낸 단유가 이어 유산소운동, 즉 전력 질주를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마무리 운동 겸, 호흡의 절제와 통제를 위해 전력 질주는 좋은 운동이었다. 이미 충분히 예열된 신체는 곧바로 전력 질주에 들어가도 무리가 되지 않았다.

점차 짧아지는 호흡을 최대한 길게 끌며 여유를 가지되, 무릎은 높게, 디딤발은 멀리, 시야는 살짝 아래쪽을 향하게 두고 뛰었다. 이렇게 뛰면 가슴이 금방 타들어 가는 기분도 느껴지지만, 고통스러운 만큼 돌아오는 만족감도 컸다.

단유가 달릴 때, 뒤쪽에서 타닥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보통 이 시간에 운동할 때, 자기처럼 뜀박질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보통은 자신의 뜀박질 소리를 들으며 뛰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자기처럼 뛰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살짝 호기심이 가려는 찰나, 뜀박질 소리가 가까워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데, 소리의 주인공이 단유의 곁을 지나갔다. 단유도 빠르지만, 옆에서 달리는 사람이 더 빨랐던 것이다. 검은색 후드티를 눌러쓴 그 사람은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단유의 곁을 스쳐 지나가더니 금방 멀어져갔다.

단유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와 경쟁을 하려고 하는 운동도 아니었을뿐더러, 자신은 자신만의 리듬이 있었고, 그 리듬을 깨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자기보다 빠르게 달리는 이의 뒷모습을 보고 든 생각은, 꽤 어깨가 넓은 사람이라는 감상이 다였다.

****

“씻었어?”

단유가 김이 모락 나는 욕실에서 나왔을 때, 마침 명수도 땀을 흘리며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응. 다 썼어.”

처음엔 명수도 단유와 함께 운동하길 원했다. 같이 운동하는 게 혼자 하는 것보다 덜 심심하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몇 번의 동행 결과, 명수는 혼자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는 단유가 너무 일찍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무려 1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서 몸을 풀고 집을 나서는 단유의 페이스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두 번째는 단유의 운동이 너무 격렬했다. 자신이 따라 할 만한 운동이 아니었고, 자기가 따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운동만 죽어라 하는 것이었다. 특히 축구부에 들어간 이후, 체계적인 운동법을 배운 명수는 단유의 운동법을 거부했다.

“머리도 똑똑한 애가 운동은 왜 그렇게 무식하게 해?”

라는 게 명수의 총평이었다. 그 후부터는 명수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시간에 일어나 적당히 충분한 땀을 흘릴 정도의 운동―주로 조깅―을 주변 도로를 따라 뛰다가 들어왔다.

“얼른 씻고 밥 먹어라.”

오늘도 단아한 차림으로 두 아이를 맞이하는 박 선생님이었다.

“명수 너 요즘 너무 고기만 챙겨 먹는 거 아니니? 채소랑 같이 골고루 먹지 않으면 몸에 안 좋아.”

“원래 클 때는 고기 많이 먹어도 된다고 그랬어요.”

명수는 살짝 데운 불고기 반찬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학교에서 그러디?”

“예.”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이야기해 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명수의 짝이었다.

“그래도 채소 안 먹으면 병 생겨. 이거 먹어.”

직접 시금치 집어 명수의 숟가락 위에 얹어 주는 선생님이었다.

“아, 그리고 단유 너, 지난번 중간고사 성적표는 왜 안 보여줘?”

“깜빡했어요. 그때, 저 머리 다쳤을 때여서 잠깐 잊고 있었네요. 드릴까요? 가방에 있을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 이미 엉덩이를 떼고 방으로 향하는 단유였다.

“먹고 해.”

“금방 갖고 나올게요.”

행동 하나는 재빠른 단유였다. 사실 단유의 성적표가 궁금하진 않았다. 예상 가능한 성적표였고, 언제나 비슷한 성적표였으니까. 그럼에도 물었던 이유는 두 아이를 위탁 관리하는 보호자로서의 두 사람의 성적을 관리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언제나 먼저 성적표를 가져다주던 단유가 명수보다 늦었기 때문이었다.

명수에게 생각이 닿자, 얼마 전 명수가 보여준 충격(?)의 성적표를 봤던 기억이 났다.

“명수야.”

“예?”

불고기와 밥이 입안에서 뒤섞인 가운데, 또 하나의 고기를 집어넣다 걸린 명수가 눈을 끔벅거리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공부 좀 하자, 응?”

그 말에 명수가 잠깐 뇌가 정지된 듯 초점을 잃은 눈을 하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배시시 웃으면서 턱을 움직이는 명수였다.

“바빠서 그랬어요.”

도대체 중1이 얼마나 바쁘면 공부할 시간이 없었을까?

“이제는 공부도 해 가면서 운동해야지, 운동만 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어요. 예전 초등학교 때처럼 느긋하게 운동만 할 수 없단 말이야.”

“알아요. 축구부 있는 고등학교 들어가려면 엄청나게 운동을 잘하거나, 아니면 공부를 잘해서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거죠?”

“그것도 그렇지만, 요즘 축구선수들은 모두 머리가 좋다며? 니가 진짜 축구선수가 되고 싶으면 적어도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뇌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니?”

“에이, 제가 얼마나 상식적인 사람인데요?”

마침 단유가 나와서 성적표를 선생님께 건네고 자기 자리에 앉아 식사를 이어나갔다. 성적표를 흘깃 본 선생님은 그럼 그렇지, 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잠시 멈췄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얼마나 상식적인 사람인지 내가 잘 알지. 영어랑 수학은 아예 손을 놨더라? 0점짜리 시험지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그건 선택과 집중이에요. 축구를 선택하는 대신, 영어랑 수학은 포기한 거죠. 그 시간만큼 더 축구에 집중할 수 있다면 제 실력도 오르지 않겠어요?”

단유와 선생님이 놀란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가 저런 말을?

명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데, 선생님이 물었다.

“그 말, 누가 가르쳐줬어?”

“가르쳐 주긴요, 제 생각이에요, 제 거.”

힌트를 준 사람이 있긴 했다. 학교에 가면 옆자리에 앉는 사람이었다. 오늘 가면 빵이라도 하나 사줘야 할 것 같다, 고 생각하며 명수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

6월 중순이 되니 한낮의 온도가 더 이상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점심시간에 운동장 가운데 서 있으면, 살짝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는 되었다.

“온난화 때문이래.”

단유는 이마의 땀을 훔치다가 이 더위의 원인을 설명하는 지태를 돌아보았다. 지태는 채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난화가 심해져서 점점 더워지는 거야. 언젠가는 대구의 특산물이 파인애플이 되고, 부산의 특산물이 바나나가 되는 날이 올 거래.”

단유는 대꾸하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이었고 그게 뭐, 라는 생각이었다. 중요한 것은 더위가 문제가 아니라,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전반전에만 두 골을 먹었네.”

“명수가 후반전에는 안 나온다며? 그럼 우리 반에도 기회가 있겠지.”

예전에 이런 스코어 차이가 나면 감정이 격해져 싸웠던 두 반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열띤 응원전으로 속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 열띤 응원전이란 표현도 적당하진 않았다. 가만 앉아 있어도 더운 날씨 때문에 그냥 열이 나는 중이었으니까.

“그런데 쟤 축구 잘하는 것 같다?”

“누구?”

지태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티셔츠를 들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경준이?”

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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