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2)
-------------- 222/952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방송 무대 녹화를 마친 후, 갤럭시즈는 형식적인 환호를 보내는 방청석과 제작진들에게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대기실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 허리를 꺾으며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인사를 하다가, 마침내 대기실로 돌아와 문이 닫힌 후에야 다섯 사람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나가야 하니까, 긴장 풀지 말고 있어.”
실장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한 마디 뱉은 후, 대기실을 나갔다.
“대기실에서까지 긴장을 풀지 말라는 게 할 소리야?”
예영의 투덜거림에 지수가 눈빛을 쏘아 보냈다. 찔끔 놀란 예영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막방인데도 오빠가 없으니까, 조금 섭섭하네.”
물론 섭섭함의 대상은 태호가 아니었다. 갤럭시즈 멤버들은 모두 태호가 피해자라고 생각했으니까. 드러난 피해자가 단유였다면,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는 매니저, 태호였다. 말은 대기 발령이었지만,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대기발령이란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암묵적인 퇴사 명령과 같았다.
덕분에 회사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는 갤럭시즈였다.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나?”
어차피 이제 방송도 없고, 스케줄도 없다. 간간히 들어오는 지방행사마저도 자숙의 의미로 모두 캔슬을 시킨다는 회사 측의 방침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별 수 있는가. 아직은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는 2년차 신인 걸그룹의 비애였다.
“언니, 오늘 술 한 잔 할까?”
명지가 슬쩍 수영에게 달콤한 제안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수영에게 몰렸다. 미성년자가 포함된 걸그룹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갤럭시즈에는 미성년자가 없었다. 그보다, 애초에 스케줄이 없으면 회사에서 특별한 관리도 하지 않는 갤럭시즈였다. 좋게 보면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고, 솔직히 말하면 소속사가 자기 일을 제대로 못하는 셈이었다. 다행히 갤럭시즈의 멤버들이 모두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데다가 리더가 멤버들을 잘 다독인 덕분에 아직까지는 크게 일탈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아무래도 곱게 집에 들어가긴 글렀다.
“그러자. 간 김에 오빠도 불러서 한 잔 하자.”
“콜!”
그 때, 대기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연출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클로징입니다. 다들 나오세요.”
“네.”
갤럭시즈는 의상을 점검하고 무대로 향했다.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붐비는 가운데 서열상 가장 뒤에 설 이들은 1위가 정해지고 앵콜곡을 부르는 그 순간까지 뒤에서 박수를 쳐주다 돌아오는 임무를 맡았다. 언젠가는 박수를 받는 갤럭시즈가 되길 바라며 다섯 사람은 무대 위에 올랐다.
****
“저녁 때? 알았어.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어. 나? 난 일이 좀 있어.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태호는 전화를 끊고 잠시 놓았던 조이스틱을 집어 들었다.
“야! 치사하게 그럴래? 형 전화 받는데 그 순간을 노려?”
“원래 경기는 심판이 휘슬 불기 전까지 계속 하는 거예요. 몰랐어요?”
명수가 뻔뻔하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곧 슛버튼을 눌렀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태호가 허둥댈 때, 공은 골대를 가르고 있었다. 화면 속 축구 캐릭터가 세리머니를 펼치는 동안, 명수도 두 손을 흔들면서 세리머니를 펼쳤다.
단유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기 위해 찾아온 태호는 오히려 단유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전 괜찮아요. 고소도 하고, 소송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형은 그렇게 못하잖아요.”
억울해도 그걸 풀 길이 없는 태호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한 단유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태호는 그 후로 아이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찾아왔다. 게임기를 하나 사들고 나타난 태호 덕에 명수는 신이 났고, 박 선생님은 아이들 공부시간 뺏는다며 열을 냈다. 하지만 며칠간 집 분위기도 그렇고, 태호라는 매니저의 마음도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닌지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형 어디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저녁에 갤럭시즈 애들이랑 술 마시려고.”
명수가 끼어들었다.
“저도 가도 돼요?”
“못 들었니? 술 마신다고. 미성년자는 출입 불가!”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명수는 풀이 죽고 태호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었다. 거실 한 켠에서 인터넷을 하던 단유가 말했다.
“위로 좀 해주세요, 누나들.”
“반대로 된 거 아니냐? 지금 위로받을 사람은 너라고.”
“전 괜찮잖아요. 그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들 저한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대신 누나들은 뮤직비디오도 방송에 못나간다면서요?”
“지금은 풀렸을 거야. 너희 보호자 분들이 워낙 힘이 좋으셔서.”
애초에 방송 심의에 걸리지도 않았건만, 회사 차원에서 뮤직비디오 송출을 막았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또 기사화시켜서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격으로 일을 크게 키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최초 기사를 쓴 기자를 고소하면서 회사는 지레 겁을 먹고 지금까지의 방침을 모두 철회했다. 물론, 소형 기획사의 방침이 어찌되든 신경 쓸 방송사는 없었지만.
“그리고 애들한테 할 말 있으면 직접 전화해.”
“활동기간이라 전화 못한다면서요?”
아, 그랬지. 태호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괜찮을 거야. 활동 끝났으니까.”
활동이 끝났음에도 활동 종료 기사 한 줄 나지 않는 인지도 폭망의 걸그룹 갤럭시즈의 매니저, 태호는 마지막 방송 날에도 남의 집에서 게임이나 하고 앉아 있었다.
단유는 그 사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통화를 끝낸 단유가 태호에게 말했다.
“이리로 온대요.”
“응?”
“형, 여기 있다고 하니까, 이리로 온다는데요?”
“애들 참.”
단유 때문에 태호가 한눈을 판 사이, 명수가 또 한 골을 넣었다.
“예이!”
명수가 두 손을 들고 단유에게 다가왔다. 단유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해 주었다.
****
“광종아, 이리로 좀 와봐라.”
“예.”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광종이 벌떡 일어나 상석에 앉은 선배에게 다가갔다.
“광종아.”
“네, 선배님.”
사복을 입은 선배가 담배를 입에 물자, 얼른 라이터를 집어 들어 불을 붙여 주었다.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선배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광종이 고개를 숙이자, 그 위로 손이 얹어졌다.
“요새 많이 힘들 다면서?”
머리 위를 토닥거리는 선배의 손길이 수치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광종이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긴. 너 발렸다는 소문이 장계동 전체에 다 퍼졌던데? 잘 하면 저기 일산까지도 소문나겠더라?”
광종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지만, 다행히 실내가 어두워 티는 잘 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 때는 제가 잠깐 방심해서 그런 겁니다.”
“그래가지고 1학년을 너한테 맡길 수 있겠냐? 재중아, 안 그러냐?”
“그렇습니다, 형님.”
2학년 일진의 자리를 맡고 있는 재중이 선배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이 자리에 앉은 선배들만 모두 15명 가까이 되었다. 1학년은 고작 4명. 서열상 가장 낮은 자리인 광종은 그나마 4명 중에서는 주먹으로 최고라고 자부했건만,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우리가 안 도와주면 힘들겠어?”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아직도 애들이 널 못 믿냐?”
광종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단유에게 졌다는 이미지가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누군가와 싸움에서 진 아이가 학년에서 일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배의 말은 왜 빨리 일을 해결하지 못하냐는 추궁이었고 압박이었다.
“하겠습니다. 곧 하겠습니다.”
“7월 되면 할래? 방학 되고 애들 없을 때 하려고?”
“아닙니다! 그 전에 하겠습니다.”
선배가 담배 연기를 광종의 얼굴로 뿜었다. 잠시 숨을 멈추고 담배연기가 흩어지기를 기다리다 조금씩 숨을 내뱉고 들이쉬었다.
선배의 눈빛이 날카롭게 광종의 미간을 찔러댔다.
“지켜본다, 광종아.”
“네, 선배님.”
“방학 때 내 생일 있는 거 알지?”
“네, 선배님.”
“선물 기대해도 되지?”
“네, 선배님.”
선배는 광종의 뺨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90도로 인사를 하고 돌아선 광종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윽고 천장의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며 방 안에 화려한 불빛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싸구려 스피커를 통해 노래방 반주음악이 나오고 곧 선배들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막간을 이용해, 광종에게 압박을 가했던 선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음을 질러가며 노래를 불렀고, 광종을 비롯한 후배들이 각종 후렴구와 박수, 환호를 질러가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선배가 광종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선배가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맥주 사와.”
그 즉시 광종은 돌 맞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 방을 나왔다. 으슥한 분위기의 복도를 걸으며 광종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일진이 되는 이유, 되어야 하는 이유. 모두 돈 때문이었다. 돈이 있어야 분기별로 생일을 맞는 대선배의 선물도 사고, 돈이 있어야 맥주도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종의 현재 처지로서는 돈을 수금(!)하기가 영 곤란했기에, 선배들이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돈도 못 벌어오는 후배 따위는 효용가치가 없으니까.
****
“오랜만이다. 단유야!”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들어오는 갤럭시즈를 보며 단유는 밝게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저들의 웃음이 다소 과장돼 보이기는 하지만, 굳이 그걸 짚을 필요는 없으리라. 사시사철 늘 맑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사시사철 늘 맑은 티를 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기에 그들의 웃음에 섞인 묘한 감정도 이해를 해줘야 하리라.
이전이라면, 이렇게까지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단유였지만, 최근의 일을 겪으며, 또 인터넷을 통해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녀들까지 덩달아 욕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들이 어떠한 처지에 처해있는지를 깊게 숙고할 수 있었던 단유였다.
태호에게도 말했었지만, 자신은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사람을 고소할 수도 있었고, 신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철저히 회사의 관리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이들이었고, 그런 속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직업이었기에 설령 불공평하고 불만족스럽더라도 자기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지금 그녀들의 웃음 뒤에 가려진 저 모습들을 보고 누가 가식적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우리 단유 많이 힘들었지? 우쭈쭈.”
“술 드시고 오신 건 아니죠?”
“어머, 얘 좀 봐? 누나들이 위로를 해준다는데 기껏 한다는 얘기가 그거니?”
별 거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들이 고맙기도 했다. 힘들고 아파도 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저리 마음을 써주는 것이 고마웠다.
“음료수 좀 드릴까요?”
“그럼 고맙지.”
“술도 깨실 겸.”
“야, 우리 술 안마셨어!”
“알았어요. 그렇다고 쳐요.”
단유가 그 답지 않게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이는 오직 명수와 박 선생님 뿐이었다. 그렇지만 단유가 나름 저 사람들을 마음으로 허락했기에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갤럭시즈 멤버들은 태호를 옆에 두고도 단유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단유를 걱정했었는지, 그리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단유를 위로했다.
“누나들이야말로 걱정 많으실 텐데, 왜 절 걱정하고 그래요. 괜히 제가 더 미안하잖아요. 저만 아니라면 노래 대박 났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릴. 우리 노래 원래 안 좋았어.”
“야, 하수련!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아니, 맞는 말.”
갤럭시즈 멤버들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태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금방 풀렸다. 대신 속으로 갤럭시즈에게 사과했다.
어쨌든 곡을 잘못 선택한 것도 매니저의 실수나 다름없으니까. 자기가 좀 더 발로 뛰고 노력해서 좋은 작곡가, 좋은 작사가와 선을 연결했어야 했는데. 이번 활동은 여러 가지로 미안한 일이 많았고, 반성할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속이 답답한 이유는,
‘내가 다시 이 아이들을 맡을 수 있을까.’
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웃고 떠드는 멤버들 앞에서 얼굴을 굳힐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같이 맞장구치며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단유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